#17.

겨울이 깊어졌다. 그만큼 밤은 더욱 빠르게 찾아왔다. 얼마 전이었다면 희미한 햇발이 조금 남아 있어 환했을 시간이겠지만 하늘은 이미 어두컴컴하였다. 발치로 자욱하게 깔린 어둠을 걷어차며 김 씨가 안채로 돌아왔다.

별것도 아닌 일로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피곤하였다. 오랜만에 도성 인근 사찰에 다녀와서 더욱 피곤함을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잠시만이라도 지친 몸을 쉴 생각을 하였다. 지아비인 차호현이 돌아오기까지 아직 얼마간의 여유가 있었다.

김 씨가 반쯤 열린 중문을 손으로 밀며 안채의 앞뜰로 들어섰다. 대청마루 위에 보따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걸 발견한 김 씨가 얼른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안채 주변으로 오가는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김 씨가 중문을 살며시 닫았다. 치마꼬리를 말아 쥐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연신 주변을 경계하였다.

보따리를 자세히 살폈다. 다른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사찰을 떠나기 전 김 씨가 묶었던 매듭의 형태가 그대로였다. 하긴 그 누가 겁도 없이 김 씨의 물건에 손을 대겠는가. 당연한 일이었다.

김 씨는 보따리를 소중히 품에 안고 안방으로 쏙 들어갔다. 방문을 닫기 직전 은밀히 바깥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지나가는 바람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탁 소리가 나게 방문을 닫았다.

김 씨는 방 안 가장 깊숙한 곳까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걸음으로 걸어갔다. 벽과 벽이 만나는 곳에 놓인 서랍장 앞에 선 김 씨가 돌연 쭈그려 앉았다.

굶주린 짐승이 오랜만에 먹잇감을 발견하고 달려드는 것처럼 김 씨가 허겁지겁 보따리의 매듭을 끌렀다. 예비용으로 챙긴 털옷 아래로 손바닥보다도 더 작은 크기의 검푸른 빛깔의 비단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다행히 여기 있었구나.”

김 씨가 비단 주머니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굽혔던 무릎을 세우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 높이 정도 올라오는 위치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그런 다음 서랍장 안 깊숙이 비단 주머니를 찔러 넣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주변을 옷가지로 감춰두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뭐 하시오?”

보따리 안에 몰래 숨겨 가지고 온 물건을 숨기는 데 급급하였던 김 씨는 미처 중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다른 곳에 완전히 정신을 팔고 있어서였다. 심지어 유독 큰 발소리를 가진 차호현이 오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였다. 차호현이 방문 앞에 다 와서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흠칫 놀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당황한 김 씨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는 슬쩍 서랍장을 닫았다. 그리고 방바닥에 놓았던 보따리를 막 등 뒤로 숨겼을 때였다. 미닫이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또 사찰에 갔었소?”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눈이 오지 않았소. 그래서 혹시나 하여 물어봤소. 한데 정말로 사찰에 갔었던 것이오?”

집안 하인들에게는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놓았다. 차호현이 김 씨가 사찰에 가는 걸 썩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 씨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은은한 미소만 지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하시오. 죽은 지 이십 년도 더 된 사람을 언제까지 끌어안고 살 생각이오. 이제 그만하면 되었소.”

“이십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이 되어도 해야지요. 제겐 가족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 사람이 죽은 게 당신 잘못도 아니지 않소. 다 제 운명인 것을. 당신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할 만큼 하였소. 더는 죽은 사람을 위해 고생하지 마시오.”

“대감께서 걱정하지 않으실 만큼 적당히 하겠습니다. 게다가 오랜만에 바깥에 나갔다 와서 좋았는걸요.”

“내가 걱정할까 봐서 하는 말이란 걸 내 모를 줄 아시오?”

차호현이 방안 깊숙이 들어오며 한숨과 함께 말하였다. 이미 죽은 사람을 너무 오래 가슴에 끌어안고 있는 김 씨가 안쓰러웠다. 이제는 훌훌 털어버리길 진심으로 소망하였다.

“잊는다고 잊히나요. 언젠가 때가 되면 대감께서 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때가 올 때까지 만이라도 모른 척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김 씨가 냉큼 차호현의 옆으로 다가서며 아양을 떨었다. 못 이기는 척 김 씨를 품에 안은 차호현이 애틋한 시선으로 김 씨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손길로 볼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순수함이 남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당신은 너무 착해서 탈이오.”

여전히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등바등하고 있는 김 씨를 차호현은 꼭 끌어안았다. 등을 어루만지며 더는 김 씨가 가슴 아파하지 않기를 소원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한자영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길 함께 바라였다.

“당신의 잘못이 아님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소.”

김 씨가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길 바라며 차호현이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

차호현의 품에 안긴 김 씨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뒤틀렸다. 예나 지금이나 어수룩한 사내였다.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며 조금도 의심이란 걸 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사내이기도 하였다.

김 씨는 앞으로도 이렇게 쭉 차호현이 제 말을 믿어주길 소망하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남은 생 동안 걱정거리가 없을 듯하였다.

*****

“이게 어딜 간 거지?”

지난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지아비인 차호현도 모르게 서랍장 깊숙한 곳에 비단 주머니 하나를 숨겨 두었다. 계현의 탕약을 달여 주러 나가기 전에 서랍장을 열었던 김 씨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조차 보이지 않는 그녀가 유다르게 초조해하기까지 하였다.

잠이 슬슬 깨기 시작하였던 차호현이 김 씨의 목소리에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뭘 잃어버리기라도 하였소?”

“그게 말입니다.”

다른 서랍장을 열며 김 씨가 말을 매듭짓지 못하였다. 손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차호현이 김 씨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녀는 또 다른 서랍을 열려 하고 있었다.

“뭐가 없기에 그러는 것이오? 말을 해보시오. 내가 함께 찾아 주리다.”

“분명 여기에 넣어 두었는데, 없습니다.”

“아까부터 뭐가 없어졌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는데 그게 무엇이오? 말을 해야 찾아주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오.”

애가 타는 듯한 김 씨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호현이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들이닥친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김 씨의 등 뒤로 걸어갔다.

“무얼 찾는 것이오?”

김 씨의 어깨 너머로 슬쩍 서랍장 안을 바라보며 차호현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첩이 무언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무리를 하였더니 몸에 바로 이상이 나타나는 거 보시오.”

“그래서 그런 거 아닙니다.”

“오늘 하루는 푹 쉬시오. 계현이 그 아이의 탕약도 이제부터 당신이 직접 달이지 말고 아랫사람에게 시키시오. 그런 일을 하려고 둔 사람들이 아니오.”

“여태 소첩이 쭉 해온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니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푹 쉬어야 하는데 탕약을 달이느라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지 않았소. 게다가 사찰까지 갔다 왔으니 몸에 무리가 온 게지.”

“아니라고 해도 그러십니다.”

김 씨가 슬쩍 몸을 비틀며 차호현이 바라보는 열린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등으로 가렸다.

“당신이 하지 않으면 아랫것들이 알아서 하게 되어 있소. 오늘은 방에서 꼼짝하지 말고 푹 쉬시오.”

“이 집안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이 어떻게 방에만 있겠습니까. 돌아다니면서 살펴야 아랫사람들도 긴장해서 일을 잘하는 법입니다.”

“너무 애쓸 필요 없소.”

“소첩이 애쓰는 걸로 보이십니까? 가족들을 위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자신보다 가족들을 더 생각하는 김 씨의 모습에 차호현은 가슴 한구석이 짠하였다. 어떻게 이런 참한 여인이 제게 왔는지 지금도 가끔은 믿어지지 않았다.

“대감께서야 말로 좀 더 쉬셔야겠습니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김 씨가 눕지 않으려는 차호현을 억지로 보료 위에 눕혔다. 그리고 이불까지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아침이 다 되면 그때 일어나셔도 늦지 않습니다.”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이럴 것까진 없잖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입궐하시기 전까지 소첩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늘어놓으실 게 아닙니까. 그러니 소첩이 소첩의 일을 보려면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차호현이 말을 이으려는 찰나였다. 김 씨가 입술 위에 검지를 세웠다. 애석하게도 차호현은 하고자 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

어렵사리 차호현을 떼어놓은 김 씨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마당으로 내려오고 나서야 손에 꼭 쥐고 있던 비단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어째 남은 게 없지?”

분명 기억하기론 절반도 더 남아 있었다. 한데 감쪽같이 없어졌다. 비단 주머니도 함께 없어진 걸 보면 누군가 가져간 게 틀림없었다.

“감히 뉘가 훔쳐 갔단 말인가?”

돌연 김 씨가 등을 돌려 안채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방에 들어가서 서랍장 깊숙이 숨겨 둔 비단 주머니를 훔쳐 갔다면, 그랬다면 어제 그녀가 집을 비웠을 때였을 것이다.

“한데 그게 저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 말곤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확히 비단 주머니만 톡 들고 간 걸 보면 아는 자의 소행이 분명하였다. 귀신의 장난도 아니고 미칠 노릇이었다. 김 씨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착각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것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리가.”

요즈음 들어 이상한 일이 자꾸만 생겼다. 아무도 없는 방에 꼭 누군가와 함께 인 것처럼 인기척이 느껴진다거나 제자리에 두었던 물건이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차호현의 말처럼 피곤하여 착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분명 어디 다른 곳에 치워두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걸음을 옮기며 생각하였다.

*****

“계현아, 일어나 봐라.”

“조금만 더요. 아직 마님이 탕약을 가져올 시간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서 일어나 보래도.”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걸 한 번 보아라.”

“그게 뭔데요?”

“그러니 한 번 보라는 게 아니냐. 이게 뭐 같으냐?”

정우는 계현을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손발이 꽁꽁 얼면 방에 가서 녹이고 다시 나오길 몇 번이고 반복하였다. 그렇다고 방에 들어가선 쉬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방에선 다른 공부를 하였다. 밖에 나와선 배운 걸 복습하였다. 그런 걸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방에 돌아왔을 땐 녹초가 되어버렸다. 방바닥에 머리가 닿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계현의 잠투정에도 유창만은 굴하지 않았다. 김 씨가 억지로 차호현을 눕혔다면 유창만은 계현을 억지로 일으켰다.

“할아버지, 진짜 왜 이러십니까. 제가 어젯밤 늦게까지 뭘 했는지 잘 아시면서.”

“중요한 일이라서 그런다. 시간이 없어.”

“무슨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유창만의 호들갑에 계현이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반만 뜨고 앞을 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유창만이 계현의 눈앞으로 무언가를 들이댔다.

“이게 뭡니까?”

계현이 상체를 뒤로 빼며 물었다. 너무 가까워 오히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걸 모르겠으니 한번 보라고 하는 게 아니겠느냐. 이게 뭐 같으냐?”

“무슨 씨앗 같은데요. 근데 이건 어디서 나셨습니까?”

“그건 네가 알 필요 없고. 무슨 씨앗 같으냐?”

“글쎄요? 이렇게 생긴 씨앗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도 같고. 자다 깨서 그런지, 아니면 머리가 굳어서 그런지 뭔가 퍼뜩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한 번 찬찬히 생각해보아라.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을 거야.”

“그러면 할아버지가 떠올려 보시면 되죠. 왜 제게 생각해보라 하십니까?”

“할애비는 도저히 모르겠으니 그러지. 그래도 젊은 사람인 네가 늙은 나보다 더 기억력이 좋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단 듯 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창만의 손바닥에 놓인 작고 검은 씨앗을 유심히 보았다. 킁킁 소리를 내며 냄새도 맡아 보았다. 아무런 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