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이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자존심이 더 강한 사람도 있고, 덜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존심은 존재하였다.

차정우란 사람은, 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누구도 그가 울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얼굴에 철갑을 두른 것처럼 여간한 일에는 쉬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여인 앞에서만 서면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 딱딱하고 차가워지곤 하였다. 이게 그가 가진 유일한 결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 말곤 흠을 잡을 곳이 없었다. 학식과 무예에서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다. 조선에서 감히 그와 견줄 사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라도 외로움을 견디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 모르게 지치고 힘들 때면 남몰래 어머니의 산소를 찾았다. 그곳이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아무도 몰랐다. 그랬기에 이곳을 정우가 찾는 건지도 몰랐다.

한참을 그렇게 주저앉아 눈물을 쏟고 나니 널뛰던 감정이 많이 진정되었다. 예의 차분한 모습을 되찾은 정우는 내려갈 준비를 하였다. 순간 전신을 덮친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 기운이 어째서인지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이상하지 않은가. 상반되는 기운이 동시에 느껴지다니 말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찌 저리도 파란 것인지. 구름 하나 없이 푸르른 하늘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눈가에 남았던 눈물을 그렇게 하늘을 보며 말렸다.

조금 전서부터 말이 낑, 낑 거리며 우는 게 심상치 않았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안달을 내는 것인지. 꼭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았다. 정확한 이유야 말을 못 하니 들을 수 없었다.

말 못 하는 짐승을 괴롭혀 좋을 건 없다는 생각에 아쉽지만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정우가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말에 오른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말을 몰아 사헌부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동안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말을 모는 데만 정신을 집중하던 정우가 불현듯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하였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빙글 말머리를 돌려 방금 지나온 길을 바라보았다. 뿌연 흙먼지가 일어나 있었다. 그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흙먼지가 완전히 가라앉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그때부터 다시금 말이 불안감에 몸통을 떨기 시작하였다.

“워, 워.”

말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었으나 헛수고였다. 말이 안달을 내는 게 더욱 심해졌다.

“왜 이럴까?”

본디 말은 예민한 동물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고른 말은 그중에서도 유독 유순하였다. 좀처럼 없던 일에 정우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말을 괴롭히는 게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일까? 정답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이곳을 빨리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가자.”

정우가 말고삐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말이 기다렸다는 듯 앞을 향해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갔다.

*****

자신이 아는 건, 말 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였다. 더는 말을 할 수도, 아는 것도 없었다.

계현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이러다 얼굴이 뚫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계현의 애를 태운 죄가 있기에 그렇게 보지 말란 말도 하지 못하였다. 애꿎은 손가락만 열심히 살펴보았다.

드디어 기다리던 말이 계현의 입에서 나왔다.

“어쩔 수 없어서 용서해 드리는 겁니다.”

“고맙다.”

“그러니…….”

계현이 잠시 맘을 멈추었다. 유창만이 꿀꺽 침을 삼켰다. 계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다음부터 어딜 가실 생각이시면 미리 언질을 주고 가십시오. 제가 얼마나 할아버지 걱정을 했는지 아십니까.”

“네가 워낙 잠이 많아야지. 깨우려 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요. 깨울 노력조차 하지 않으셨잖아요.”

계현의 맞는 말에 유창만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더는 변명이 통하지 않았다. 스리슬쩍 유창만이 보료를 향해 걸음 옮겼다.

옅은 한숨과 함께 계현도 유창만의 뒤를 따랐다. 머릿속이 여러모로 복잡하였다. 물끄러미 유창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물으려고 입을 열던 계현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니야. 물어본다 한들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도 없어.’

결국 계현은 백기를 들었다.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였으나 유창만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다. 조금 전 함께 있던 여인이 대체 누구길래 저리 비밀을 지켜주는 것일까.

계현은 아까까지 묘령의 여인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서 있었단 흔적이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잠이 덜 깬 상황이라면 헛것을 봤다고 착각을 할 수준이었다.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지나갔다. 원래도 남아 있지 않았던 흔적이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싹 사라졌다.

*****

장침에 머리를 베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왼 무릎을 세운 후에 그 위에 오른 다리를 얹었다. 발을 까딱거리며 낮에 있었던 일을 천천히 되짚어 나아갔다. 당시엔 당황스럽고 놀라서 못 보고 지나쳤던 것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뭔가 새롭게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누워 있다 보니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계현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 자신을 누군가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계현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사위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길 여러 번 반복하였다. 흐릿하던 시야가 점차 뚜렷하게 변해갔다.

“할아버지.”

일단 유창만부터 찾았다. 순간 훅하고 밀려온 한기에 계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쯤 되면 적응할 법도 하건만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선득선득한 기운에 늘 놀랐다. 그래도 유창만이 옆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계현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발치를 더듬었다. 치맛자락이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손으로 확인하였다. 대충 치맛자락을 정돈하고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눈앞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벽에 계현은 속으로 숨을 삼켰다.

정우는 계현과의 관계에서 첫발을 잘못 디뎠다. 한 번 삐끗하여 잘못 디뎠더니 아무리 걸어도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었다. 점점 더 목적지로 잡았던 곳과 멀어지기만 하였다. 이렇게 가다간 짙은 후회만 할 게 불 보듯 뻔하였다. 더 멀어지기 전에 새로이 방향을 설정해야 했다.

어머니 곁에서 기운을 얻은 정우가 계현을 찾았다. 오늘따라 피곤하기라도 했던 건지 불이 꺼져 있었다.

“후.”

매번 이런 식이었다. 정우가 어렵게 용기를 냈어도 계현과 때가 늘 맞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오늘도 역시나 어긋났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애틋한 표정으로 불 꺼진 방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게 정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언제쯤이면 저 방에 있던 사람이 날 봐줄까? 언제 자신이 진짜 생명의 은인이란 걸 알아줄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어째서 재형은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줄줄이 이어지던 생각이 재형에게서 막을 내렸다. 정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붙잡는 사람이 재형이었다. 계현이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누군지 물었을 때 그가 어떻게 대답했을지 보지 않았는데도 알 것 같았다.

“저리 아리따운 여인이 묻는데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겠지.”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다. 계현에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날이겠지만 정우에겐 뼈저리게 아픈 날이었다. 재형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던 계현의 미소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날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잠든 얼굴이라도 봐야겠다.”

오늘따라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하여 어머니 산소에도 다녀왔지만 그때뿐이었다. 복잡한 모든 걸 내려놓은 줄 알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순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 계현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나고 말았다.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가며 참아 보았다. 괜히 상처와 고통만 얻었다.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한 정우의 발길은 계현이 머무는 방을 향하였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가쁜 숨이 가시기도 전에 달빛 아래 놓인 계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벅차올랐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계현에게 걸어갔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인지 미간에 깊은 고랑이 파여 있었다. 쉬이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꿈에서도 뭐가 그리 괴로운 것이오?”

안쓰러웠다. 현실은 잔혹하여도 꿈만큼은 편안하길 바라였다. 정우가 슬며시 계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미간의 주름도 정우의 손길에 스르륵 풀려 버렸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계현의 속눈썹이 움직임을 보였다. 당황한 정우가 용수철이 튕기는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슬그머니 뒷걸음을 놓았다. 깊이 잠에 들었던 계현이 잠에서 깨어난 것도, 자리에서 일어난 것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쳐 피하고 말고 할 틈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계현의 영롱한 두 눈이 자신을 향해 놓여 있었다.

“나으리?”

“일, 일어나셨습니까.”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정우가 재빨리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찾아온 이유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뭐라도 말을 해야 했던 정우는 급히 변명 거리를 찾았다.

“불.”

“네?”

“불을 밝혀 드리러 왔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정우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계현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뭐 하십니까?”

“네?”

“불을 밝히러 오셨다면서요. 한데 왜 멀뚱히 서 계십니까?”

“아.”

그답지 않게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말부터 뱉고 보았다. 이젠 그가 뱉은 말을 수습해야 했으나 수습할 방도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했던 말이 거짓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자는 줄 아셨다가 일어나서 놀라셨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돌부처처럼 굳어버리신 겁니까?”

“아.”

“뭐라 말 좀 해보십시오.”

오늘따라 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었다. 왜 너도나도 다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인지. 속이 답답해 미쳐 보라는 건가? 계현이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정우를 바라보았다.

계현은 유창만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하인들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정우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터라 하면 안 되는 나쁜 행동임을 알면서도 엿들었다.

“우리 나으리만 불쌍하지.”

어째서 정우가 불쌍하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우가 불쌍할 일은 하나 없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다 멀쩡하게 살아 계셨다. 단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륜이 끊어지겠는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서로를 이해할 날이 반드시 올 터였다. 집안에 재물이 끊이지 않으니 거리에 나앉을 걱정도 없었다. 하나뿐인 동생도 형인 정우를 잘 따랐다.

계현이 의아해하는 동안에도 하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가 엿듣고 있음을 모른 탓이었다.

“나으리가 어릴 적엔 마님께서도 그렇게 잘해주시더니.”

“핏줄이 당긴다고. 제 자식이 더 소중하니 그렇겠지.”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그렇지 나리에겐 좌상 대감 댁 따님을 붙이면서 나으리껜 그런 경박한 여인을 갖다 붙이냐 말이야. 내가 나으리라도 그 혼인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래도 황해도 관찰사면 집안은 괜찮은 편이지 않은가.”

“좋긴 뭐가 좋아. 이참에 눈엣가시 같은 나으리를 저 멀리 황해도로 치워 버릴 생각인 게지.”

“그게 말처럼 되겠는가. 혼인해도 한양에서 살겠지.”

“어림도 없는 소리. 마님이 어떤 사람인지 잊었는가?”

더 엿듣고 싶었지만, 하인들이 자리를 옮겼다. 계현은 담장을 돌아 멀어지는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방금 들은 것처럼 귀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계현은 속으로 정우를 안타까워하였다. 그 말을 그가 들었다면 이렇게 넋이 나간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던 계현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자기에게 집중해달란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