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당도 못 할 거면서 건들기는
“오늘 나랑 같이 있자.”
“……?”
“나 좀 안아 줘.”
“야!”
어이가 없는 이현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갔다. 운전 중이 아니었다면 아마 더 큰 소리가 나갔을지 몰랐다.
“왜? 네가 내 첫 남자라면 좋겠어.”
“허, 너 내가 만만해?”
“만만하긴….”
“그런데 왜 이래? 내가 너 좋다니까 이용하는 거야?”
이보다 더한 이현의 반응을 예상했지만 율은 점점 화를 내고 있는 이현이 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언젠 이용하라며?”
“내가 이런 걸로 이용하라고 했어? 그리고 여자애가 아무한테나 막. 그러면 안 돼!”
“네가 아무나야?”
“너한테 나 아무나잖아.”
율이 왜 이러는지 이현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얼마 전 자신의 고백이 NO라고 확실하게 말했던 율이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시간 있으면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하더니 차에 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나… 아냐.”
“어장에 한 마리는 있어야 하니까….”
“나한테 어장이 어딨어?”
“그럼 이유라도 알자, 네가 왜 이러는지.”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율이 이러는 것을 이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현의 입장에서 율이 강하게 나온다면 넘어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유… 말해 주면 나랑 있을 거야?”
“대신… 나랑 만나.”
“이현아.”
“나도 나 싫다는 사람이랑 그러고 싶지 않아.”
“나 너 좋아해.”
“친구로 말고.”
율과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 처음 알았다. 2학년 때는 서로 싸우기 바빴고 싸우다 정이 든 것인지 3학년 때부터 매년 고백했다. 하지만 율은 한결같았다. 그렇다고 주변에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라고 해야 여자 친구 몇 명이 다였다.
‘너희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며 왜 그렇게 붙어 다녀?’
‘율이한테 남자가 어디 있냐? 주변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남자라고는 너밖에 없더라.’
‘우리 만날 시간도 없대. 맨날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는 것 같더라.’
율과 친한 친구들이 한 말이었다. 대학을 다니지 않는 이현이 율이 혹시나 학교 친구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친구들에게 물었을 때 다들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좋아한다면서 왜 사귀는 것은 싫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로도… 좋아해.”
“고율, 너 진짜 뭐야?”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이현이었다. 지금까지 이현의 고백은 다 거부하더니 갑자기 남자로 좋다고,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화가 나려고 했다. 이현은 율의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제대로 율을 바라봤다.
“진심이야. 네가 처음 고백했을 때부터 좋아했어.”
“하….”
“나 오늘 진심이야. 그러니까….”
“너 나 안 볼 자신 있어?”
“…뭐?”
“나 안 볼 자신 있으면 같이 갈게.”
“…….”
“나는 친구랑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넌 날 앞으로도 친구로 볼 거잖아.”
결단을 내려야 했다. 율이 오늘 왜 이러는지 말을 해준다고 했지만, 핵심은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란 걸 이현은 알았다. 지금까지 그랬으니 오늘도 그럴 것 같았다. 이현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매번 고백하고 거절당해 연락을 안 하다가 율이 연락을 하면 바로 나가는 일을 반복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결심한 것이다.
“네가 그럼 나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 율이었다. 생각만으로도 몸에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 목이 잠겨 버렸다. 이현의 차가운 목소리만으로도 가슴이 아픈데 이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나 호텔은 못 가. 우리 집은 가족들이 있고… 네 집으로 가?”
“…그래.”
율의 대답과 동시에 이현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을 했다. 율이 어머니와 함께 살다 올 초에 오피스텔을 구해 나왔다. 독립을 축하한다고 필요한 것을 물었더니 침실에 둘 스탠드를 사달라고 해 선물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이현은 몰랐다. 초대받지 않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로 들어가면 돼.”
오피스텔 입구를 알려 준 율 덕분에 이현은 쉽게 주차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율을 자주 데려다주어 위치는 알고 있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일 학교 안 가?”
“내일 일요일이야.”
“일요일에도 갔잖아.”
“…안 가도 돼.”
집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집중이 잘 되는 율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있으면 학교에 가 공부를 했다. 하지만 내일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옷 벗고 가.”
“어? 아….”
옷을 벗으란 율의 말에 순간 놀랐던 이현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었다. 자신의 옷 때문에 호텔에 갈 수 없다고 율은 생각한 것 같았다. 이현은 뒷좌석에 놓아둔 가방에서 윗옷을 꺼내 갈아입고 가방을 든 채로 차에서 내려 율을 따랐다.
“보안은 잘 되는 것 같네.”
“엄마가 구해 준 거야.”
전에 율에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어머니랑 같이 살지 왜 나왔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이것저것 따져 보고 구해 준 것이란 대답을 해 무슨 동문서답이냐고 했었다. 그때는 웃어넘겼는데 그 이유에 율이 숨기고 있는 내용이 있는 것 같아 이현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들어와.”
“생각보다 넓네.”
오피스텔이라고 해 방이 없는 곳으로 생각했는데 침실도 있고 거실도 꽤 넓었다. 주방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작은 공간에 알차게 다 있어 혼자 살기엔 좋을 것 같았다.
“나 좀 씻을게. 땀이 많이 나서.”
“아. 여기. 안에 수건 있어.”
“수건은 나도 있어. 물만 쓸게.”
이현은 자신의 가방을 들고 율이 알려 준 욕실로 들어갔다. 율은 그 모습을 보고 이현의 가방에 들어 있는 것이 생각나 픽 하고 웃었다. 샤워용품과 수건이 저 가방에 항상 있어 진짜 물만 쓸 거라고 하니 조금은 씁쓸했다.
“술이라도 마셔야 하나.”
계속되는 물소리에 율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슬프기도 하고 떨리기도 해 술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고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물 좀 마셔도 돼?”
“어? 어. 잠깐만.”
고민에 빠져 있던 율은 갑자기 이현이 나와 당황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이현에게 주고 율은 잠시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를 보니 긴장이 되었지만, 자신도 씻어야 했기에 옷을 챙겨야 했다.
“나도 씻고 나올게. 편하게 있어.”
율은 이현을 보지도 않고 자신의 말만 하고 욕실로 들어왔다. 거울에 있는 물기까지 닦았는지 붉어진 자신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깔끔하기는… 후….”
샤워를 하는 일이 매일 하는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샤워기 아래서 한참을 서 있던 율은 이현이 했던 것처럼 욕실 정리까지 하고 문을 열었다.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
“…여자들은 오래 걸려.”
“드라이기 있던데 말리고 나오지.”
“어?”
“여기 서. 내가 말려 줄게.”
이현의 머리는 일반 남자들의 머리보다 훨씬 짧았다. 그래서 드라이기를 쓰지 않아도 금방 말랐다. 하지만 율의 머리는 어깨를 넘는 길이기에 자연 건조로는 오래 걸렸다. 율은 이현의 손에 이끌려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키가 큰 이현이 뒤에 있으니 욕실이 평소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집에서 밥은 먹어?”
“거의 학교에서 먹지.”
“냉장고에 반찬도 하나도 없고 물이랑 맥주만 있더라.”
“…엄마가 해준 반찬 어제 다 먹었어.”
율은 이현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사실 거울에 비친 이현의 눈을 바로 볼 수가 없어 감아 버렸다. 그런데 눈을 감고 있으니 이현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집중이 되지 않을 때,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아니 그냥 아무 때나 이현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했었는데 이제 듣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울컥했다.
“그만해. 거의 다 말랐어.”
“알겠어.”
드라이기를 정리해 있던 곳에 놓아두고 율은 욕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바로 이현의 손에 이끌려 침실로 들어갔다.
“고율!”
“……?”
“내일부터 읍.”
율은 이현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 이현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이현과의 입맞춤이 처음은 아니었다. 가벼운 뽀뽀는 몇 번 있었다. 그래서 먼저 다가갔는데 이현의 뜨거운 입술에 순간 놀랐다.
“어?”
키 차이가 나는 탓에 겨우 닿았던 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율은 침대에 눕혀졌다. 그리고 이현도 따라 침대로 올라오더니 뜨거운 눈빛으로 율을 바라봤다.
“이제 시작이다?”
이현의 뜨거운 입술이 다시 닿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더 뜨겁고 강렬했다. 율의 입술 사이로 이현의 뜨거운 입김이 스며들었다. 급하지만 부드러운 키스에 율은 정신을 놓을 것 같았지만 다음을 생각하니 몸은 긴장이 되었다.
“긴장하지 마.”
*
“……?”
밝은 빛 때문에 눈이 떠졌다. 창밖을 보니 이른 아침은 아닌 것 같았다. 율은 침대에서 내려와 정리하고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고 아일랜드 식탁에 있던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물을 마셨다.
[자고 있어서 그냥 가. 힘든 것 같은데 오늘은 좀 쉬어.]
이현에게 온 톡을 보고 율의 얼굴은 밝아졌다. 어제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힘들어서 그런 것으로 알고 있어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율은 물병에 남은 물을 다 마시고 핸드폰을 들었다.
“받네?”
-왜, 안 받을 줄 알겠어?
“응. 언제 갔어?”
-한두 시간 된 것 같은데.
“어제는 미안….”
-그러게, 감당도 못 할 거면서 건들기는….
율은 이현의 말에 어제 일이 떠올렸다. 열정적인 키스를 하던 이현은 끝내기 아쉬운지 자잘한 키스를 몇 번 더 하더니 율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율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힘들면 그냥 울어.’
‘흑….’
‘내가 옆에 있을게.’
‘…계속?’
매번 마음을 다잡지만, 한순간 무너질 때가 있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는데 생각나는 사람이 이현밖에 없었고 연락을 한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았던 것인지 이현은 율의 마음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 아침에 운동 가기 전까지 있을게.’
‘흑… 미안해.’
‘괜찮아.’
이현의 토닥거림에 율은 한참을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우는 동안 이현이 우리 계속 보자는 말을 해 더 크게 울었던 기억이 나 좀 민망했지만 그 말 때문에 안심이 되어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아침은?”
-내 아침 걱정하지 말고 너나 챙겨 먹어. 나야 챙겨 주는 사람 많은데 뭘.
“알겠어. 먹을게.”
-사진 찍어서 보내.
“푸흡, 알겠어.”
끊어진 핸드폰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율은 배달앱을 열었다. 이현의 말 때문이 아니라 진짜 너무 배가 고파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 배달 시간도 오래 걸리네.”
율은 앱을 종료했다. 그리고 욕실에 들어가 양치와 세수를 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배달앱을 보고 있으니 다 먹고 싶었다. 이것저것 선택하다 보면 냉장고만 가득 차고 다 먹지 못할 것 같아 가까운 식당으로 가려고 했다.
[이거 먹을 거야.]
[맛있겠네. 다 먹어.]
[배고파서 다 먹을 거야.]
[사진 보내.]
지나는 길에 보이는 동태찌개집에 들어온 율이었다. 일요일이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혼자 온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율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에도 혼자 먹는 게 익숙해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에만 집중했다. 정말 배가 고파 반찬까지 거의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사진!’
율은 이현에게 보낼 사진을 찍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이현에게 톡을 보내 놓고 집 주변을 걸으며 오랜만에 쉬는 일요일을 즐겼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