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어쩌다 계약 연애 3권 (완결)


#9. 결혼해, 당장!

희주는 민준과 함께 그의 본가로 향했다.

그동안 병원에 다니느라 힘들었을 희주에게 제대로 된 보양식을 먹이고 싶다며 홍 여사가 집으로 초대했다.

가는 내내 긴장감에 입이 바짝 타 들어가던 희주는 차에서 내려 마주한 본가 모습에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두 눈만 깜빡거릴 뿐 잠시 생각 회로가 정지된 듯 보였다.

이, 이렇게 잘 사는 집 아들이었어?

오갈 데 없다더니 순 거짓말!

성인 남자 키를 훨씬 웃도는 높은 담장을 뚫고 드러난 그의 본가는 마치 작은 성 같았다.

휘황찬란하게 보란 듯 꾸며 놓은 영민의 본가를 방문했을 때와는 그 느낌조차 달랐다.

민준이 인터폰을 누르자 삐- 소리를 내며 짙은 갈색 대문이 열렸다.

“희주 씨. 들어가요.”

“네⋯.”

조금 기가 죽은 그녀가 민준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잘 가꾸어진 널따란 정원은 한눈에 보기에도 화려한 분수를 품고 있었다.

아무래도 유명 잡지에서나 보아 온 외국의 거대한 별장 같은 모습에 그녀는 연신 마른 침을 삼키며 두리번거렸다.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 정원수들을 지나 드디어 현관문 앞에 다다랐다.

무슨 정신으로 걸어왔는지 모를 만큼 떨고 있던 그녀를 앞서 걷던 민준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흠뻑 빠질 치명적인 미소를 지었다.

“떨려요?”

“네. 집이 너무 커요.”

진심이 불쑥 나와버린 그녀에게 그가 피식하고 웃으며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하! 어쩌죠. 여긴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곳인데.”

희주가 그에게 뭐라 입을 달싹이기도 전, 벌컥 현관문이 열리더니 홍 여사와 서연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주 양! 어서 와.”

“언니! 왔어요?”

“네⋯. 안녕하셨어요, 어머니.”

희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서연을 제치고 나온 홍 여사가 불쑥 그녀 손을 잡았다.

“어머! 이제 나 어머니라고 불러주는 거야?”

그녀 손을 잡고 집 안으로 이끄는 들뜬 홍 여사의 모습에 민준과 서연은 서로를 쳐다보며 동시에 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집 안에 들어온 희주는 정신을 차릴 틈 없이 거실에서 민준의 아버지를 마주했다.

어?

이 분은….

정갈하게 모든 것이 정돈된 집안에서 그녀를 맞은 이는 다름 아닌 태영 그룹의 회장 강현태였다.

“어. 아, 안녕하세요. 서희주입니다.”

홍 여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 희주가 먼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자,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이어 그의 이미지와 꼭 닮은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어서 와요. 민준이 애비되는 사람이오.”

정말 그가 맞는 건지 헷갈린 희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서 찬찬히 생각에 잠겼다.

태영그룹 회장과 닮은 것이라 잠시 착각한 건가 싶었지만, 이내 심상치 않은 집 안의 분위기에 그가 바로 국내 재계를 쥐락펴락하는 기업의 회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민준도 서연도 그와 꽤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때요, 여보. 우리 민준이가 푹 빠질 만하죠?”

“네. 당신 말이 맞네요.”

얼어버린 희주 곁으로 살갑게 다가온 홍 여사가 빙긋이 미소지었다.

희주를 바라보는 현태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진 않았지만, 홍 여사만큼 대단한 호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저 왔습니다.”

민준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현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래. 어서 오너라. 얼굴 좋아 보이는구나. 이리로 와서 앉거라. 희주 양도 와서 앉아요.”

“네⋯⋯.”

그의 손짓에 민준이 희주를 데리고 거실 소파로 향했다.

어깨를 살포시 감싸는 민준의 손길이 따뜻했지만, 희주는 여전히 그가 강현태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조금 혼란스러웠다.

“자. 들어요. 퇴근 시간에 오느라 힘들진 않았을지 모르겠네.”

홍 여사와 서연까지 모두 자리에 앉자 도우미 아주머니가 다가와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다.

처음이라 낮선 희주가 살포시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모습에 서연이 살갑게 말을 붙였다.

“언니. 긴장했어요? 괜찮아요. 그냥 우리집이다 생각해요.”

“고마워요, 서연씨.”

“그래, 희주 양. 편하게 생각해.”

“네.”

희주가 빙긋이 웃음을 짓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현태가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직은 천천히 그녀를 두고 볼 생각이었다.

“얼마 전에 아버지께서 편찮으셨다 들었는데 이젠 좀 나아지셨어요?”

“네. 이제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초면인데 그럴 수야 있나.”

긴장했던 탓인지 희주는 그제야 그가 제게 편히 말을 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초면인 탓도 있겠지만, 아직은 홍 여사나 서연처럼 자연스럽게 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태영 그룹 회장인 그가 가장 민준의 짝을 신중히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내 커다란 불안감이 몰려왔다.

민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걸 이곳에 온 뒤로 스스로 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가 현태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마 처음부터 그를 마음에 두지 않았을 텐데….

상처 받는 건 한번이면 족하다는 생각에 조금 의기소침해 있을 때였다.

“그냥 내 며느리라 생각하세요, 아버지.”

희주의 두려움도 모른 채 민준이 거침없이 말을 뱉었다.

“허. 이 녀석 보게. 뭐가 그리 급해.”

현태는 민준이 데리고 온 여자라 하여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모름지기 사람의 마음이란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 아니던가.

홍 여사의 안목을 의심하진 않았지만, 그녀도 엄마인지라 아들이 마음 준 여자라는 사실에 잠시 눈이 멀어질 수도 있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민어탕 간 본다는 게. 말씀 나누세요.”

“내가 봐줄게, 엄마.”

홍 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자 서연이 그 뒤를 따랐다.

희주에게 먹일 음식이라 정성스레 직접 만든 그녀는 마지막까지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제 편이라 생각했던 홍 여사와 서연이 사라지자 희주는 더욱 긴장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려는데 민준의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의 이마에 금세 주름이 잡혔다.

“저 잠시만 통화 좀 하고 올게요. 희주 씨 잠시만요.”

“네?”

그가 그대로 일어나 아득히 이어진 거실 복도로 걸어갔다.

하⋯.

이 어색한 공간에 현태와 단 둘이 남겨지자, 희주는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침묵을 깬 현태가 입을 열었다.

“희주 양.”

“네.”

“우리 민준이와 결혼까지 할 생각이에요?”

질문이었지만 희주는 꼭 답이 정해진 물음 같다 느꼈다.

내가 누군지 알고 나서도 민준과 결혼을 마음에 두는 건지 묻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 마음에 들지 않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주면 고맙구요.”

원하는 답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처럼 그녀에게 단단히 시선을 고정시킨 그 때문에 두근거림이 심해졌지만, 느낀 그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사실 오늘 아버 아니, 회장님 만나 뵙기 전까진 민준 씨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제게 너무 고맙고 좋은 사람이거든요.”

“날 보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다는 말인가요?”

“⋯네. 제가 감당할 사람이 아니었네요, 민준 씨는.”

“그럼 이제 그만 만날 생각인 건가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대화에 희주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민준과의 이별이라니….

이렇게 느닷없이 현실이 되어 다가오리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때까지 현태는 줄곧 담담하던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 본 순간부터 저를 알아보았고 그로 인해 스스로 민준과의 미래를 접은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내 아들과 그만두겠다는 여자라….

제 물음에 이토록 솔직하게 말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보기보다 그녀는 당돌했다.

희주의 마음이 궁금해진 그가 다시 한번 침묵을 깨뜨렸다.

“마음이 바뀌었다면서.”

“근데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실망이네요, 희주 양.”

그의 말에 그녀는 질끈 두 눈을 감아버렸다.

아마 쉽게 헤어지겠다 하지 못하는 모습에 그는 실망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그 흔한 모습처럼 넌지시 협박을 하려나, 아님 헤어지지 않고는 못 배길 모욕을 주려나.

“민준이를 감당하지도 못하겠다면서 놓아주지도 못한다니. 나는 둘 중에 하나라도 확실한 사람을 원하는데.”

이렇게 헷갈리게 말씀하시면… 저는 주제도 모르고 민준 씨를 감당하고 싶어진다구요!

어차피 솔직해지기로 한 지금 미친 척이라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자, 생각지도 못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혹시 제가 민준 씨 옆에 있고 싶다고 한다면 허락⋯. 해 주실 수 있나요.”

“내 허락이 필요한가요, 두 사람 사이에.”

마치 상관없는 일을 관망하는 듯한 말투라 어떤 식으로 제 마음을 보여야 할지 그녀는 조금 망설여졌다.

그녀가 영민과 결혼을 준비하면서 숱하게 다툰 이유는 대부분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그녀에게 갖은 꼬투리를 잡아 못살게 군 탓에 행복해야 할 두 사람은 결혼을 준비하는 내내 싸움의 연속이었다.

하여, 연애로 끝나지 않을 남녀 사이에 집안으로부터 지지받지 못하는 관계가 얼마나 힘들고 상처뿐인 사이가 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사랑만 주기에도 아까운 다정한 민준에게 제가 겪었던 아픔을 느끼게 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현태의 허락이 꼭 필요한 이유였다.

“민준 씨가 저 때문에 상처받는 건 견딜 수 없으니까요. 처음부터 저는 안 된다고 하시면 힘들지만 더 좋아지기 전에 마음 접겠습니다.”

희주의 단호한 말투에 현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본인이 힘들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어 하는 모습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릇 진심인 법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민준을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이란 걸 그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전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힘든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민준의 곁을 지켜줄 그의 짝을 원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언제나 민준이 지켜내야 할 가벼운 여인이 아닌 믿음직한 동반자를 말이다.

희주가 마음에 드는 사람인지 확인해보려는 의도로 질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대답에 금세 뿌듯해졌다.

생각보다 민준을 아끼는 마음이 가늠하기 힘들 만큼 커 보였으니 말이다.

“근데, 희주 양. 난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를 반대한 적 없는데.”

희주가 그제야 놀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는 민준과 결혼할 생각이냐는 단순한 질문만을 던졌었다.

그의 말을 멋대로 해석해버린 자신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가 이렇게 흘러갔을 뿐이란 생각이 들자, 민망함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괜히 지레 겁먹은 제 마음만 그에게 들켜버린 것 같아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죄송합니다. 혼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버려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딱 이런 거구나 싶은 마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현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나도 이제 그 아버님 소리 들을 수 있는 건가.”

“어머! 여보. 몇 번이나 만났다고 벌써 욕심부려요.”

“하! 아버지도 슬슬 며느리 보실 때가 되신 것 같네요.”

홍 여사와 민준이 동시에 다가오며 가볍게 웃었다.

희주는 그나마 이들이 방금 전 제 모습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위로하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홍 여사 덕분에 희주는 배가 터지도록 저녁을 먹었다.

이게 여자에게 좋다더라, 이건 계절 바뀔 때 먹어줘야 한다더라 갖은 이유를 대며 그녀에게 권하기 바빴다.

“이 사람이 알아서 먹어요, 어머니.”

민준의 만류에도 홍 여사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서연이 재밌다는 듯 지켜보며 웃었고, 현태는 작게 미소지은 채 묵묵히 식사했다.

아직 입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홍 여사의 젓가락이 다시 희주에게 향할 때였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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