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제가 기획한 프로모션은 연말을 맞이해 소중한 가족들과 잊지 못할 추억을 기억하도록 ‘원더풀 룸서비스’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pt 자료를 넘기며 여유 있게 말하는 모습은 새로웠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로 진지하게 발표를 이어나갔다.
“연말 분위기에 어울리는 다양한 음식과 칵테일을 준비하여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이벤트입니다. 사진은 즉석에서 받을 수 있도록 폴라로이드카메라와 포토 프린터 등을 이용할 예정입니다.”
연우의 발표가 끝나자 직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준비를 철저히 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막힘없이 답변해 보였다. 감탄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가장 앞에서 연우를 지켜보던 그의 아버지 재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설명을 들었다.
세리는 홀로 생각했다. 만약에 자신이 저 자리에 선다면 그처럼 어려움 하나 없이 멋지게 잘 해낼 수 있을까? 답변은 금방 나왔다. 당연히 못 할 것이다. 애초부터 저런 자리는 서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희석은 언제나 그녀가 실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덕분에 세리는 도전하는 것에 언제나 큰 망설임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가 나오면 남들보다 더 커다란 절망을 느꼈다. 한 번 넘어지면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회복이 더뎠다. 그러니 연우의 모습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회의는 마무리가 되었고, 직원들은 하나둘씩 세미나실을 빠져나갔다.
“세리 누나.”
모든 직원이 빠져나가고, 서류를 정리한 연우가 뒤늦게 세리를 향해 걸어왔다.
“원래 야근만 없으면 퇴근 시간이 얼핏 맞아서 같이 나가려고 했는데, 힘들 것 같아요.”
그의 말은 결국 저녁 늦게까지 야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괜찮아. 차도 가져왔는걸.”
“그럼 주차장까지만 데려다줄게요.”
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와 함께 세미나실을 나왔다. 호텔 복도를 걸어가자 그를 본 직원들이 하나같이 인사를 하는 바람에 세리도 졸지에 눈인사를 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그녀에게 커피를 가져다준 남직원의 말대로 연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빛이 났다. 그만큼 이 안에서 입지를 다졌다는 뜻일 것이다. 직원들의 인정은 결국 연우가 호텔에서 자리를 잡는 것도 머지않았다는 뜻이었다.
“발표 괜찮았어요?”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문이 닫히자 단둘이 남았다. 지하 1층을 누르자 바닥이 윙- 소리를 내며 밑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솔한 답변을 내놓았다.
“응, 멋졌어. 엄청나게 섹시하더라.”
그녀의 말에 연우는 고개를 돌려 세리를 쳐다봤다. 그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조용한 시선에 적막한 공기만 감돌았다. 앞을 바라보고 있던 세리가 고개를 돌려 연우를 응시했다. 빤한 시선이 충돌했다.
“왜 그래?”
세리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그의 시선이 맑은 웃음을 지어냈다.
“누나는 가끔 지나치게 솔직해요.”
연우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처럼 형식적인 답변이 들려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식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의외를 대답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세리는 항상 그랬다. 연우가 평상시처럼 요리를 바칠 때도 감정을 표현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형식적인 대답이라면 연우도 마찬가지로 뻔한 말로 받아치면 되었을 텐데.
“하지만 정말로 잘했는걸. 나는 네가 차 회장님께 혼나지 않으려고, 날 데려간 줄 알았어. 얼마나 pt 준비를 안 했으면 저러나, 하고.”
그녀의 이어진 목소리에 연우의 얼굴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세리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기대를 안 하고 봐서 그런가? 엄청나게 잘해서 놀랐어.”
“글쎄요. 앞에 문장은 빼도 될 것 같은데.”
그들이 말장난을 치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금방 지하에 도착했다.
“굳이 같이 내릴 필요 없어. 바로 올라가.”
세리가 먼저 내리며 연우에게 말했다. 그녀와 함께 내리려던 그의 발짓이 멈칫거렸다. 자신에게 손을 작게 흔드는 세리를 보며 연우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도록 버튼을 누른 채였다.
“뭐해? 안 가니?”
아무리 기다려도 올라갈 생각을 안 하는 연우를 보며 세리가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기어코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누나 가는 것만 보고 올라갈게요.”
“뭐 하러 그래. 너 바쁘다며?”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정도 시간은 있어요.”
세리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자신보다 앞서가는 연우를 붙잡았다.
“그쪽 아니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이끌고 자신의 차가 있는 데로 걸어갔다. 세리의 손에 끌려가는 연우의 시선이 그녀가 붙잡은 자신의 팔에 닿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와 그의 피부를 매만졌다.
연우는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보통이라면 곧장 돌아섰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은 이유를 무시하고 싶었다.
**
“도세리!”
카페에 홀로 앉아있는 그녀를 누군가 뒤에서 격하게 껴안았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숨이 턱 막혀 세리는 자신의 목에 둘린 팔을 두들겼다.
“아, 미안.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그제야 어깨에 두른 팔을 빼내고, 세리의 앞에 털썩 주저앉는 자세가 꽤 발랄했다. 노랗게 염색된 머리가 찰랑거렸다. 세리를 바라보며 또 한 번 웃음을 짓는 얼굴이 짓궂은 성격을 드러냈다.
하나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발 좀 평범하게 등장할 순 없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겨우 첫 마디가 그거니?”
“한 달 뒤에 온다면서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그거야 너 보고 싶어서 후딱 들어왔지!”
하나가 상체를 일으켜 세리의 한쪽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그녀에게 얼결에 뺨을 내어준 세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넌 어째 변한 게 없니?”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 날이 다 된 거라잖아.”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던 하나가 대뜸 고개를 들이밀며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귀여운 네 약혼자랑은 요즘 사이가 어때?”
“항상 똑같지, 뭐.”
어릴 적부터 하나는 유독 연우를 좋아했다. 원체 성격이 표현을 못 하면 속 터져 죽는지라 주변에서 더 말릴 정도로 지나치게 감정을 전달하곤 했다.
한때는 연우를 아등바등 따라다니며 열렬히 구애를 펼쳤던 적도 있었다. 얼마나 끈질기게 따라다녔던지 연우가 하나만 보면 기겁을 하며 도망 다닐 정도였다.
현아와 연우가 붙어있으면 그사이를 격하게 끼어들 정도가 되자 한 번은 연우가 하나를 향해 따라다니지 말라고 소리친 적도 있었다. 언제나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던 연우를 그 정도로 화나게 만든 건 단언컨대 하나가 유일할 것이다.
“연우는 아직도 잘 생겼니? 뭐, 그래 봤자 우리 달링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녀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세리 앞으로 액정을 내밀었다. 핸드폰 배경화면에 찍힌 커플 사진이었다. 하나와 같이 찍는 남자는 찬란한 금발에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외국인이었다.
“얘가 전화로 그렇게 자랑을 했던 남자친구야?”
“응, 귀엽지?”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야?”
“우리보다 6살 어려.”
그녀의 당당한 말투에 세리는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그럼 재작년까지만 해도 미성년자였던 거잖아.”
“지금은 성인이야. 그리고 얘가 먼저 나 따라다녀서 사귄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6살 차이가 나는 애를 만나?”
“뭐, 어때? 남자들은 10살도 더 어린 애들이랑 아무렇지도 않게 사귀잖아. 하물며 결혼까지 하는 마당에 연애가 대수니?”
하나의 까칠한 음성과 함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 번호를 보니 국제전화 표시가 되어있었다. 액정을 본 하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아까도 통화했는데, 또 연락하는 것 좀 봐. 관심은 즐거운데 피곤하다, 피곤해.”
하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핸드폰을 들고 일어났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며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세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쌉싸래한 맛이 목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왔다. 접시 위에 있는 케이크를 포크로 한 입 베어 먹었다. 달콤한 향이 입안을 간질였다.
세리는 시선을 돌려 테이블에 뒤집힌 자신의 핸드폰을 힐끗 쳐다봤다. 한빈에게서 며칠째 연락이 없었다. 그와 만났던 건 지난 핼러윈 파티가 마지막이었다.
‘만약에 한성이 예전처럼 2위에 머물고, 재상이 1위를 유지했다면 어땠을까.’
‘아버지가 나를 조금은, 자유롭게 풀어줬을까?’
그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한성을 미워하게 된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였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지독한 목마름은 그대로 아들에게까지 전달되기 마련이다. 자신이 그동안 멍청하게도 눈치 채지 못했을 뿐.
한빈이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본심을 그녀에게 드러냈다는 자책 때문일까? 세리는 건조한 얼굴로 다시금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여전히 핸드폰은 작은 움직임 하나 없이 고요했다.
“세리야.”
어느새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하나가 그녀의 옆에 서서 말했다.
“나랑 같이 센터 좀 보러 가자.”
세리의 가방을 한 손으로 챙긴 그녀가 대뜸 팔을 잡아끌며 내뱉었다. 얼떨결에 일어선 세리는 하나의 손에 잡혀 어영부영 카페를 나와야 했다.
“너희 아버지가 차려주시기로 했다던 발달센터 말하는 거야?”
“응, 여기서 별로 안 멀어.”
그녀의 말대로 10분 정도 걸어가니 ‘오하나의 아동발달센터’라는 이름이 붙여진 간판이 보였다. 적당히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는 학교와 주택가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심리센터 특성상 눈에 띄는 시내 권은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아무리 시대가 많이 변했다지만, 고정관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 완전 촌스러워.”
하나는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이름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다양한 치료실을 비롯해 아이들이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안정감 있는 컬러의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나 자료 좀 보고 올게. 구경하고 있어.”
홀로 멀거니 서 있는 세리를 두고, 하나는 원장실로 들어갔다. 조금 뒤 공허한 내부에 잔잔한 음악이 깔렸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흐르는 소리였다. 왠지 어색했던 세리의 자세가 그제야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치료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간 곳은 [모래놀이치료실]이라고 적혀있는 곳이었는데, 한가운데 놓인 책상 위로 사각형 박스에 담긴 결 좋은 모래들이 보였다. 괜히 그것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 보였다. 부드러운 모래가 피부를 쓸고 지나갔다.
책장 한 편에는 각종 피규어들이 나열돼 있었다. 종류가 천차만별인 것을 보니 단순한 장식품은 아닌 듯했다. 아직 공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치료실 안에는 나무 냄새가 물씬 풍겼다.
세리가 다음으로 들어간 곳은 [음악치료실]이었다. 이전에 구경했던 방과 달리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비닐도 뜯어내지 않은 책상과 의자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다양한 악기들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더 이상 둘러볼 거리가 없었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던 세리는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벽면에 있는 전자피아노였다. 그것은 비닐도 뜯지 않은 새것이었다. 세리는 뭐에 홀린 듯 앞으로 걸어갔다. 피아노 건반 위로 자연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녀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하얀색 건반을 눌렀다. 소리는 당연하게도 나지 않았다. 세리가 허무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쳐보지 그래?”
치료실 문 앞에 등을 기대 서 있는 하나가 보였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세리를 응시하며 말했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