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이게 뭐예요?”
연우가 눈살을 살짝 구긴 채 묻자 앞에서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던 세리가 말했다.
“보면 몰라? 계약서잖아.”
“계약서?”
“읽어보고 밑에 사인해.”
그녀의 새침한 목소리가 넓은 카페 공간에 맴돌았다. 연우가 손을 뻗어 세리가 내려놨던 종이를 가져갔다. 하얀 배경 위에 제목으로 보이는 글자는 강조라도 하듯이 진하게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약혼(동거) 계약서
1. 계약 기간은 총 2년으로 한다.
2. (갑) 도세리는 (을) 차연우의 연애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
3. 외박은 금한다. (외부 시선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4. 서로의 사생활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5. (을) 차연우는 전적으로 (갑) 도세리를 따른다.
6. 필요에 따라 조항을 추가할 수 있다.
7. 조항 추가는 (갑) 도세리만 가능하다.
8. 섹스 금지.
연우가 계약서를 다 읽고 나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세리가 가방에서 볼펜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아무렇게나 던져줬다.
“빨리 사인해.”
“어디에요?”
“그냥 대충 이름 써. 여기 오기 전에 워드로 급하게 써온 거라 이름 칸 만드는 걸 잊어버렸어.”
여러모로 참 허술한 계약서였다. 이런 게 과연 법적 효력이나 있을까? 뭐, 형식상 적는 것이니 세리가 그런 구체적인 것까지 생각해 왔을 리 없었다. 연우는 그녀가 던졌던 볼펜을 주워들어 대충 이름을 적고, 옆에 사인했다.
“설명은 따로 안 해주는 거예요?”
“어제 전화로 다 말했잖아.”
“그래도 계약서를 만들어 와서 사인까지 하게 했으면 짧게라도 설명은 해줘야죠.”
세리가 귀찮은 얼굴로 이마를 짚더니 몸을 숙여 테이블에 놓인 계약서 종이를 가져갔다.
“어차피 약혼까지 한 마당에 동거가 뭐 대수니? 나는 집을 나오고 싶어서 너한테 제안한 거고, 너는 수락한 거잖아. 내가 2년 뒤에 완전히 헤어져 주겠다는 조건으로.”
“제안보다는 강요 아닌가요? 애초부터 저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요.”
“당연하지. 내가 너보다 나이도 4살이나 많고, 회사 서열도 높으니까.”
그녀가 말한 서열이란 자신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한성 그룹을 이야기했다. 한국에 있는 내로라한 기업들 사이에서도 한성은 독보적으로 정상을 내달리고 있는 회사였다. 반면에 연우가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도산 그룹은 밑바닥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꾸준히 성장해온 기업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회사를 들먹이며 연우를 낮게 평가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로부터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학업과 병행하며 열심히 평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연우와 달리 세리는 백수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는 새침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차 회장님께는 날 놓친다는 게 손해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넌 이득 아니야? 어차피 너도 이 결혼을 안 내켜 했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연우는 헛웃음을 치며 그녀를 쳐다봤다. 본인이 세리에게 이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렇게 당당히 내뱉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결혼은 아버지가 정해주는 사람과 해야 하죠.”
“아니, 안 할 수 있어. 정확히 말하면 내가 헤어져 줄 수 있다는 거야. 나 역시 이 결혼을 원하지 않거든. 난 혼자 살고 싶어. 되도록 평생 말이야. 그러니까 널 돕겠다는 거야. 현아랑 잘 되게 도와줄게.”
“그건 누나한테 무슨 이득인데요?”
“대답해야 하니? 미안한데 싫어. 비밀이거든.”
세리가 가방에 계약서 종이를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몸만 들어와. 짐도 많이 필요 없을 거야.”
“알았어요.”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세리는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카페 밖을 나섰다. 바로 앞에 검은색 세단이 비상 깜빡이를 켜고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석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세리가 감췄던 비밀이 아마 저기에 있을 터였다.
“알 만하네.”
한빈과 함께 차를 타고 사라지는 그녀를 가만히 보던 연우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핸드폰으로 진동이 이어졌다. 액정에 뜬 이름에 연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현아 누나.”
연우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웃음 띤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의 기분을 대신하듯 문에 달려 있던 종이 달랑달랑, 기분 좋은 소리를 내었다.
[연우야, 지금 세리랑 있어?]
그러나 정작 그녀는 엉뚱한 사람을 찾았다.
“아니요. 방금 헤어졌어요.”
[그래? 내가 전화를 해도 안 받아서……. 혹시 어디 간다는 말은 안 했니?]
현아의 물음에 그는 잠시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바람이 연우의 머리칼을 스쳐 갔다. 고요한 정적을 못 이기고, 현아가 다시금 입을 열려는 찰나에 그가 말했다.
[한빈이 형 만나러 갔어요. 아마 전화도, 그래서 안 받은 거겠죠.]
그의 말에 전화 건너편에서는 잠시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런 현아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연우가 한숨을 작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전화해 볼게요.”
[아니야. 내가 한빈 오빠한테 전화해볼게.]
현아는 그 말을 끝으로, 짧은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연우는 잠시 동안 고요한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느릿한 동작으로 핸드폰을 쥔 손을 내려뜨리고는 이내 무감한 발짓을 떼어냈다.
**
“이렇게 근사한 데서 밥 먹을 줄은 몰랐는데.”
세리가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을 눈으로 쭉 훑으며 말했다. 한빈이 자연스러운 손짓으로 웨이터를 불렀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C 코스 요리로 주문할게요. 카프레제 부라타, 한우 채끝 스테이크요.”
“식전주는 어떤 거로 도와드릴까요?”
“세리 너 뭐 마실래? 오렌지 주스 시킬까?”
세리가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를 대충 눈으로 훑다가 말했다.
“화이트와인.”
“화이트와인이랑 오렌지주스로 주세요.”
그의 반듯한 목소리에 웨이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세리가 손에 턱을 괸 채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오빠도 와인 마시지.”
“차 가져왔잖아.”
“기사 부르면 되잖아?”
“아냐, 안 마실래.”
한빈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세리가 입을 살짝 내밀었다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창가를 응시하던 그가 세리를 보고 웃었다.
“나랑 밥 먹으니까 좋아?”
“응, 이렇게 분위기 좋은 데서 먹으니까 꼭 데이트 같잖아.”
“도 회장님이 아시면 기겁하실걸?”
“아빠는 뭐, 원래 다 마음에 안 들지. 굳이 오빠 일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의자에 등을 기대어 핸드폰을 꺼냈다. 다리를 꼰 채 흐트러진 모습이 그녀의 도도한 자태를 강조시켰다. 한빈은 물끄러미 세리를 응시하다가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얘는 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한 거야?”
그녀의 심통 난 목소리를 뒤이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한빈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세리가 얼른 고개를 숙여 먼저 그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와, 윤현아 완전 무서워. 내가 오빠랑 있는 거 어떻게 알았지?”
“네가 안 받아서 나한테 했나 봐.”
“줘봐, 내가 받을게.”
세리가 자연스레 한빈의 핸드폰을 받아 갔다.
[오빠, 혹시 세리랑 있어?]
현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퍼지자 세리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같이 있으면 어쩌려고?”
[……혹시, 세리니?]
“그래, 네 친구 도세리야. 한빈 오빠랑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네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연우한테 했지.]
“차연우? 나 걔한테 오빠 만나러 간다고 말 안 했는데?”
[그건 연우한테 물어봐.]
세리는 오른쪽으로 꼬았던 다리를 허공에 몇 번 흔들어댔다.
“그래서 얼마나 급한 일이어서 부재중을 6통이나 남겨 놨어?”
[나 부탁할 게 있어서. 너도 알다시피 내가 친구가 별로 없잖아.]
“네가 친구가 없긴. 나만큼 잘난 친구가 없는 거겠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주변에 긴 머리인 사람이 없어.]
그녀의 뜬금없는 소리에 세리의 눈살이 살짝 구겨졌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을 앞으로 움직였다. 언제부터였는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한빈의 눈동자와 정면에서 부딪혔다.
그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어색하게 옆으로 피했다. 세리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눈웃음치며 다리 한쪽을 올려 과감하게 뻗었다. 그가 움찔 놀라며 그녀를 돌아봤다. 세리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더니, 동그란 구두 앞부리가 한빈의 다리를 쭉 훑어 올라 무릎에서 멈췄다.
“대체 무슨 부탁인데?”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현아를 향했지만, 눈동자는 여유 있게 한빈을 쳐다봤다.
[나 이번 주에 디자이너 승격시험 있는 거 알지?]
현아의 초조해 보이는 음성에 세리는 장난치던 걸 멈추고 앞으로 내밀었던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곤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너 모델 구했다며?”
[응, 그랬는데 그 언니가 갑자기 일 있어서 안 된대.]
“아니, 며칠도 안 남았는데 파투를 내?”
세리가 전화기를 고쳐 잡고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짜증을 냈다. 그녀는 한빈의 짙은 시선이 자신을 집요하게 쫓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통화를 이었다.
[나한테 남은 건 너밖에 없어. 부탁 좀 할게.]
“안 돼. 나 머리 자르기 싫단 말이야.”
[너한테 최대한 맞춰줄게. 나 이번 시험 꼭 통과해야 해. 세리야. 나 한 번만 살려주라. 응?]
“다른 애는 없어? 너 친구 많잖아.”
[이번 시험 과제가 롱 레이어 커트인데 머리숱이 많고, 길어야 예뻐. 이목구비도 좋아야 하고. 시험이라 어쩔 수가 없네.]
세리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현아는 세리의 답이 들려오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전화기 건너편으로 일정한 숨소리가 오갔다. 어느새 검은색 테이블 위로 한빈이 주문했던 코스 요리가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알았어. 해줄게.”
하얀색 커다란 접시 위에 오백 원짜리 크기의 고깃덩어리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가 별수 없다는 듯 내뱉었다. 앞에서 한빈이 먼저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고마워, 세리야. 내가 진짜 이 은혜는 안 잊을게.]
“알았어. 좀 끊어. 너 때문에 한빈 오빠랑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누고 있잖아.”
[오빠한테 세리 맛있는 거 많이 사주라고 문자 보내놔야지.]
“야, 너 오빠한테 연락하면 모델 안 해줄 거야.”
세리가 질투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현아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까매진 액정을 가만히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던 세리가 한빈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가 쥐고 있던 핸드폰을 가져갔다.
“현아가 모델 해 달래?”
한빈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에 구했던 모델이 파투 냈나 봐.”
“너 머리 손대는 거 싫어하잖아. 그냥 싫다고 하지.”
“윤현아 부탁인데 내가 어떻게 거절해.”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앞에 놓인 스테이크에 나이프와 포크를 가져다 댔다. 그런 세리를 말없이 응시하던 한빈이 나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넌 유독 현아한테만 마음이 약한 것 같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니까.”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조명에 비친 수려한 외모가 여실히 드러났다.
“다른 친구들한테는 안 그러잖아.”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 아니야?”
“뭐?”
한빈의 잘난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자 세리가 방긋 웃었다.
“오빠도 유독 현아한테만 약하잖아.”
“…….”
“아, 현아한테만은 아닌가? 내 주변에 있는 여자애들은 당연하게 오빠랑 전부 다 붙어먹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친구들이랑 도저히 친해질 수가 없어. 그나마 현아는 내가 끝까지 붙들고 있는 유일한 애고.”
그의 반듯한 눈동자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접시 위를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세리의 약지 손가락에는 언뜻 보아도 꽤 비쌀 것 같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것은 약혼반지라기엔 지나치게 화려했다.
뭐든 어중간한 것을 질색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별로 이상한 것도 아니었지만, 한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