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2년, 파리의 주교궁. ' 대주교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는 일렁이는 촛불의 불빛 속에서 건너다보이는 서책, [리베르 폰티피칼리스(Liber Pontificalis)]의 사본을 응시했다. 그것은 한때 교황 니콜라우스 1세의 신임을 받았던 사서이며 전임 사제 추기경이었던 아나스타시우스가 역대 교황들의 업적을 집대성한 연보서였고, 바르톨로메우스는 이를 토대로 필사본을 만들어 성당에 비치했다. 다만 기록을 그대로 쓴 것이 아니라, 수정하고 추가한 항목이 있었다. ' [요하네스 안글리쿠스(Johannes Anglicus : 853~855)]' 항목을 추가한 사실만큼은, 조금도 후회한 적 없었다. 겉모습과는 다른 인물,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855년에 세상을 떠난 요하네스 8세는 비록 그 치세는 짧았으나 훌륭한 교황이었다. 바르톨로메우스의 아버지도 생전에는 안글로룸 스콜라에서 교수 마스터였던 요하네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스승을 극찬했었다. 그러나 스승의 정체가 남장한 여자라는 것이 드러나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아버지의 입은 영영 닫히고 말았다. ' 바르톨로메우스, 아니 발레리아나(Valeriana)는 한때 요하네스가 세웠던 여성 학교인 성녀 카테리나 학교에 들어갔던 적도 있었다. 결혼 적령기가 되어 혼담이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기숙사를 벗어나 본가에 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학교가 일시적으로 폐쇄되는 바람에,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요하네스 8세에 관련된 것들을 모두 탄압하는 정책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 학교에 대한 폐쇄 정책은, 이내 풀렸다.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부터, 그의 내면에는 큰 변화가 일었다. 여자의 모습 그대로 살게 된다면, 더 이상 학문과 신앙이 자유로이 매진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생각 끝에, 그는 발레리아나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40년간 남장을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문득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기에, 바르톨로메우스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이미 요하네스 8세의 기록을 복원시킨 사실이 교황청에 알려졌기에, 조만간 체포하러 올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순식간이라 할 만큼 빠르게 비밀이 새어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바르톨로메우스는 기록에 동참했던 젊은 사제 클라우드를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 처음부터, 혼자 시작하려던 일이었다. 필사본을 만들 때도 여러 서기들이 보조하려고 나섰지만, 그는 모두 물리쳤었다. 그들 중에서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은 사람이 바로 클라우드였다.' “한 개인의 인생은 언제든 위장될 수 있사오나, 그로 인한 업적과 진실한 흔적을 사멸시키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대죄! 설령 그것이 과오라 하여도, 후세에는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클라우드는 그렇게 외친 뒤, 두터운 사제복을 벗어 내리고 셔츠의 앞섶을 젖혔다. 붕대로 조여서 눌린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도 없지, 그 또한 겉모습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이를 확인한 바르톨로메우스는, 한동안 충격에 휩싸여 말을 잇지 못했다. ' “클라우드!”' “동참하게 해주십시오, 다만 숨어서 하는 것은 지금이 마지막이기를, 후세에는 떳떳한 일이길 진심으로 바라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