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안식처

“아… 심심해….”

입원실 안,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하정의 얼굴이 멍했다. 병실 동기라도 있었으면 조금 덜 심심했을 테지만 도진이 특실을 잡아준 탓이었다.

“같이 수다 떨 사람도 없고….”

하정은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 6시가 되어있었다.

“도대체 언제 온다는 거야.”

그녀는 저녁에 온다는 말만 남겨둔 채 사라져버린 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똑똑-

그때, 입원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설도진 씨?”

반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건 옥분과 영달, 그리고 세라였다.

“딸!”

영달의 양손엔 옥분이 싸 온 음식들이 한가득 있었다.

“엄마 아빠, 나 입원한 거 어떻게 알았어?”

“세라한테 들었어 이것아. 또 말 안 하지 아주.”

옥분은 하정을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정성스레 싸 온 음식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병원 밥은 영 입에 안 맞지?”

어쩐지 들떠 보이는 옥분의 목소리. 그러나 그녀를 보고 있는 하정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냥 하얗게 질렸다.

“…엄마.”

이윽고 옥분을 부르는 하정은 잔뜩 긴장한 채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옥분은 보따리를 풀다 말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덩달아 긴장한 채였다.

“…응?”

짧게 고개를 까딱이며 되묻는 옥분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고 그녀를 보고 있는 하정의 동공은 여전히 질려있었다. 그렇게 점점 더 확장되어가는 긴장감. 하정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 맹장 수술한 거야. 어차피 못 먹어….”

순간, 옥분의 손이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공간을 메우는 정적. 옥분은 이내 머쓱한 듯 주섬주섬 보따리를 다시 싸고는 질끈 묶었다.

“그나저나, 세라한테 뭘 이렇게 시켜. 안 그래도 바쁜 애한테.”

민망해진 옥분은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성공적인 화제 전환이었다. 하정은 세라가 들고 있는 가방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카페에 아르바이트생 있는데 뭐~ 어차피 저녁 때 되면 손님들 쫙 빠지기도 하고. 그치 세라야?”

“네가 사장해라 아주?”

툴툴대듯 볼멘소리를 해도 그녀가 챙겨온 가방엔 하정의 짐이 야무지게 담겨 있었다. 가방을 받아 든 하정은 양 눈썹을 까딱이며 감사인사를 대신했다.

“근데, 방이 뭐 이렇게 좋아?”

들어오자마자 음식 보따리부터 풀어댔던 옥분은 그제야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누가 봐도 ‘여기는 특실이다.’ 하고 광고를 하는 수준이었다. 옥분은 대뜸 하정을 쏘아 보았다.

“돈이 남아나지 아주?”

“아, 무슨 소리야, 아니야~.”

“아니긴, 고작 맹장 하나 터져놓고 뭐 하러 이런 특실을 잡아?”

“…아 그냥! 오랜만에 제대로 한 번 쉬어 보려고.”

차마 도진이 잡아 준 병실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정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자 옥분은 못이기는 척 고개를 내젓더니 음식 보따리를 푸르기 시작했다.

“으휴, 쉴 때는 밥을 잘 먹어야 돼. 영양보충을 해야 사람이 기운이 펄펄 난다고.”

“…엄마, 나 못 먹는다니까.”

하정이 금식을 해야 한다는 걸 그 사이 까먹은 모양이었다. 옥분은 다시 보따리를 질끈 묶더니 머쓱한 웃음을 터트렸다.

* * *

강모병원 5층 B병동 로비.

“으으….”

한 손엔 아메리카노를 든 채 뻐근해진 고개를 뒤로 젖히는 민하의 입에서 가벼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수술 끝났어?”

데스크 앞에서 환자의 차트를 살펴보던 동료 의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죽다 살아났어. 오늘 하루 너무 빡셌어.”

“퇴근하고 술 한잔?”

그녀에게는 술 한잔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고 의도한 장난이었다.

“…간다.”

얄미운 장난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민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를 돌았다.

“하암-.”

병동 복도를 지나는 그녀의 발걸음은 여전히 지쳐있었다. 환자들이 가득한 일반병실 복도와는 달리 한없이 고요한 특실 복도의 공기. 고요한 공기에 졸음이 밀려오는지 하품을 토해내는 그녀의 입이 커다랗게 찢어졌다.

“특실에 누가 입원했나? 입원하는 경우는 드문데.”

어쩐 일인지 특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걸을수록 한데 모인 말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501호. 말소리의 출처였다. 민하는 501호 앞에 걸음을 멈춰 세운 뒤 병실 문에 달린 조그마한 창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저 여자.”

하정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한데 모여 이야기꽃을 피워대고 있는 그들은 꽤 즐거워 보였다.

* * *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시간을 확인한 옥분은 화들짝 놀라며 집으로 갈 채비를 했다.

“늦었네~ 늦었어~.”

다급하게 겉옷을 챙겨 입으면서도 그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아직 7시 밖에 되지 않은 시간인데. 급하게 옷을 챙겨 입는 그녀의 모습에 하정은 어리둥절했다.

“엄마? 아직 7시밖에 안 됐는데?”

“네 엄마 내일 계모임 아줌마들이랑 제주도 간다고 신났어.”

“빨리 가서 짐 싸야지요오~.”

옥분은 잔뜩 신나 보였다.

“서방 놓고 놀러 가니 좋겠수.”

“좋지 그러엄~.”

영달의 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하정과 세라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도 얼른 가봐. 오늘 와줘서 고마웠어.”

옥분과 영달이 갈 준비를 하자 하정은 세라의 등을 떠밀었다.

“응? 난 아직 안 가도 돼느….”

“얼른 가. 사장이 솔선수범을 해야지 알바생만 놔두고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하정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세라를 보내려는 데에 필사적이었다. 입원실 밖을 흘끔거리는 그녀는 아무래도 도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간다, 딸~.”

“몸조리 잘하고.”

“간다, 공하정.”

하정은 떠밀 듯 그들을 밀어냈다. 그리곤 냉큼 병상에 앉아 몰골을 정리했다. 하필 급하게 나갔을 때 쓰러지게 된 거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생기 없이 바싹 마른 입술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세라한테 화장품도 좀 가져다달라고 할 걸 그랬나.”

하정은 괜스레 입술을 뻐끔거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시간은 7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똑똑. 그 순간 드디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다급하게 매무새를 다듬고는 태연하게 두 손을 모아 앉았다.

“네~.”

“공하정 씨?”

그녀의 목소리 뒤로 곧장 문이 열렸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도진이 아닌 민하였다. 민하는 보란 듯이 의사 가운을 펄럭이며 입원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우리, 전에 마주친 적 있죠?”

민하가 말했다.

‘그때 설도진 씨 집 앞에서 봤던…’

하정의 기억 속에도 선명한 그녀였다. 그래도 이렇게 반갑게 인사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하정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다른 게 아니라 도진 씨한테 연락이 와서요. 아는 분이 입원해 있다고. 잘 좀 보살펴 드리라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 네.”

하지만 그녀의 거짓말을 알 리가 없던 하정은 왠지 시무룩해졌다.

“박민하에요.”

민하는 대뜸 악수를 청했고, 하정은 엉겁결에 그녀의 손을 잡아버렸다. 그러자 민하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도진 씨 지인이면 제 지인이나 마찬가지라서요. 저희 곧….”

그녀는 말을 이어가려다 말고 싱긋 웃어 보였다.

“결혼하거든요.”

‘결혼…? 설도진 씨랑…?’

그녀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하정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이런 마음을 가질 주제도 명분도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해지는 느낌. 하정의 얼굴이 미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더러운 손 안 치워?”

그때였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성큼성큼 다가온 도진은 하정의 손을 낚아챘다.

“감히… 어디다가 손을 대.”

도진은 힘 조절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손안에 쥐어있는 하정의 손이 저릿할 정도로.

결국 버려진 건 민하의 손뿐이었다. 꾹 다문 민하의 새빨간 입술이 미세하게 떨려댔다.

“뭐? 결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는 도진의 이마가 옅게 일그러졌다.

“같잖은 소리 지껄이지 마.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결국엔 당신만 비참해질 거라는 소리야.”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그의 말. 낮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철저하게 감정을 내세우지 않는 탓에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으나 하정의 손을 잡고 있는 그는 여전히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윽… 설도진 씨. 잠깐 손 좀.”

하정의 손은 피가 통하지 않는 지경이었다. 그녀가 신음을 토해내자 놀란 도진은 그제야 그녀의 손을 고쳐 잡았다.

민하는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진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이미 비참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그때였다. 그들의 앞에 설강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아버지?’

도진의 입에서 나오는 아버지라는 소리에 하정은 설강우를 보았다. 다소 나이 든 모습이었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날렵한 이목구비는 도진과 제법 닮아있었다.

설강우의 시선이 하정에게 닿은 순간이었다.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어마 무시한 위압감. 하정이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설강우의 목소리를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정적만이 흐르는 입원실 안, 얼음장 같은 냉기가 가득했다.

몸을 움츠린 채 눈치를 살피던 하정은 슬그머니 도진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 건지. 그는 오히려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당황한 하정은 병상에 앉은 채로 도진을 올려보았다. 설강우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단호해 보였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설강우의 시선이 도진에게로 향했다. 매서운 눈빛이었다. 도진은 긴장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