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월의 늦은 저녁, 거리의 공기는 차가웠다. 새카만 거리 위로 뒤섞이는 창백한 숨. 급박한 마음을 대변하듯 반복적으로 뱉어내는 도진의 숨이 깊이 없이 짤막했다.

통유리 너머의 어둠 속 침침하게나마 이름 모를 실루엣들이 보였다. 종잡을 수 없는 인기척에 의지하고 있는 빛의 중독자들. 갑작스러운 도시의 정전이었다.

째깍. 째깍. 어둠이 덮친 도시, 눈먼 움직임들이 잦아드는 와중에도 시계 초침 소리는 멈추지 않고 울려댔다.

소음처럼 들려오는 시계 초침 소리에 도진의 심장은 쉽게 짓눌렸다. 그는 묵직하게 고동쳐대는 심장을 감당하지 못한 채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파비앙….”

그때였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이상야릇한 목소리.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멈칫,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곤 숨을 죽인 채 바싹 굳은 시선 끝의 낯선 여자를 경계했다.

“느끼게 해주세요….”

어둠 속 목소리는 또다시 들려왔다. 고개를 한껏 올린 채 다가와 있는 여자의 숨이 뜨거웠다.

“당신….”

여자의 숨이 멎는 순간이었다.

“느끼고 싶어.”

그와 동시에, 도진의 입술 위로 스며드는 낯선 촉감. 촉촉하고 부드러운, 낯선 입술이었다.

다시금 빛이 들기까지 시간은 길게 흐르지 않았다. 아니, 아직 흐르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팟- 도시를 물들일 빛이 드는 소리. 빛으로 물든 거리 위, 비로소 여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미치광이 같은 산발 머리에 반쯤 풀린 두 눈. 난데없이 나타나 도진의 입술을 물들여버리는 이 여자. 미친 여자가 분명했다.

#1. 영업비밀

am 8:50.

“원장님 나오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선 도진이 데스크를 지나자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건네던 간호사들의 시선이 홀린 듯 멈춰 섰다.

새카만 머리칼과 대비되는 희고 고운 피부, 그 위에 수놓인 남자다운 눈매와 베일 듯한 콧날. 커다란 키에 새카만 정장까지 빼입은 그는 마치 잘빠진 흑마 같았다.

사실 어떠한 옷을 입어도 어울리지 않을 몸이 아니겠냐마는 간호사들의 시선은 절로 그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들이 무색하게도 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이며 곧장 원장실로 들어갔다.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는 명패, 자리를 벗어난 마우스 패드. 원장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들이었다. 그는 익숙한 듯 제자리를 벗어난 모든 것들을 책상 선에 맞춰 반듯하게 각을 잡았다.

찰캉. 메탈시계가 차여진 손목을 가볍게 털며 기울이자 마찰음이 울렸다. 정확히 8시 55분. 늘 정확하게 흐르는 그의 시간. 그는 그제야 만족한 듯 두 눈썹을 지그시 까딱였다.

am:9:00.

9시 정각이 되었다. 똑똑. 닫힌 문 너머에서 전해지는 정각알림과도 같은 소리였다.

“네.”

도진이 답하자 원장실 문은 조심스럽게 열렸다. 백 실장은 환자의 검사지를 품에 안은 채 원장실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힘없이 느릿한 걸음걸이, 지쳐 보이는 눈꺼풀, 그 밑으로 움푹 꺼진 두 뺨. 백 실장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선 여자는 도진의 앞에 겨우 앉아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어대길 반복했다.

그러다 금세 고개를 푹 떨군 여자의 여윈 허벅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도진은 손에 쥐고 있던 검사지를 내려놓더니 여자에게 휴지를 건넸다.

여자의 울음이 멎어가는 동안 그는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여자의 울음은 서서히 멎어갔다.

“정수진 씨.”

여자를 부르는 도진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머지않아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냈고 차갑고 날카로운 도진의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의 눈은 철저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견뎌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릴 때마다 퉁퉁 부은 여자의 눈이 화끈거렸다. 마침내 여자는 마른 입술을 겨우 움직여가며 입을 열었다.

“…살고 싶을 뿐이었어요. 단지 남들처럼 살고 싶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왜 그것조차 어려운 건지. 자꾸 눈물만 흘러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또다시 감정이 북받쳐 오른 여자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여자는 젖은 휴지조각을 힘껏 구기며 도진을 올려보았다. 여자는 이미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선생님.”

공간을 가득 메운 처절한 울음소리. 처참히 무너진 여자의 모습에도 도진은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있는 그의 침착함은 매정할 정도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정수진 씨. 여기에는 지금 비가 옵니다. 빗속에는 상실, 불안, 우울이라는 불순물들이 섞여 있어요. 정수진 씨 어깨 위에 걸쳐진 외투는 비를 맞으면서 계속 젖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무거워요.”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였다. 여자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면서도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정수진 씨는 지금 비를 피하라고 해도 피하지 못해요. 그저 버티는 수밖에. 차라리 내가 우산을 씌워줄게요. 대신 우산을 씌워주면 정수진 씨는 우산을 받아야 합니다. 그 힘으로 정수진 씨는 더 이상 비를 맞지 않아야 해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처음엔 많이 낯설 겁니다. 지금까지 계속 비를 맞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걸 견뎌내느라 고생이 많았던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스스로에게 잘 견디고 있다고 얘기해 줘야 합니다. 정수진 씨의 수많은 감정들이 우울을 선택했듯, 이제 위로를 선택해 줘요. 스스로에게, 우산 좀 씌워 줍시다.”

진료를 마친 환자가 떠난 원장실. 홀로 남는 유일한 시간이자 억눌렀던 감정을 잠시나마 허용하는 시간이었다.

“하.”

빈약한 숨을 뱉어내자 도진의 고개는 힘없이 떨어졌다.

익숙한 것이었다. 일상 곳곳에 머무르며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우울. 또 그것을 견뎌내고 있는 인간의 나약함과 그들을 치유해주는 대가로 감당해야 하는 타인의 슬픔. 불행하게도 그것은, 기름진 불씨처럼 쉽게 옮겨 붙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에게 있어 감정이란 나약함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기쁨, 슬픔, 두려움. 그리고 이 모든 걸 한계 없이 포괄하는 가장 나약한 감정. 사랑. 삶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가 사는 방식이었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는 것, 완벽한 삶을 위해 모든 감정을 버려둔 채로 살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 환자의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잠깐을 제외하고는 그는 철저하게 감정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약한 것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다음 진료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도진은 이내 예약 차트를 훑어보았다.

그때였다.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진동음. ‘아버지’라는 발신자. 설강우의 전화였다.

-예. 아버지.

-퇴근하고 시간 비워둬라. 박 원장님 댁이랑 저녁 식사 약속 잡았으니 늦지 않게 나오고. 위치는 문자로 보내마.

설강우의 전화는 늘 통보 식이었다.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설강우의 목소리에 도진은 침묵했다.

뚝. 전화는 곧바로 끊어졌다. 그리고 뒤이어 울리는 묵직한 진동. 설강우의 문자였다.

* * *

“파비앙… 파비앙….”

꼴딱 밤을 새운 것 같이 퀭한 두 눈과 기다란 곱슬머리. 홀로 중얼거리며 거리 위를 거니는 하정의 트레이닝 바지는 무릎이 죄다 늘어난 채였다.

파비앙을 찾아 길거리를 배회한 지 어느덧 두 시간째, 애먼 남자들을 붙들고 그들에게서 파비앙의 존재를 발견하려 애를 썼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애를 쓰는 이유, 그녀에게 필요한 건 바로 ‘빙의’였다.

하정에게는 무려 4년의 무명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2년 전, 마침내 찾아온 천금 같은 행운 ‘사랑의 연가’. 그녀를 베스트셀러 소설가 반열에 오르게 해준 작품이었다.

‘사랑의 연가’로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은 이유를 꼽자면 단연 생동감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사랑의 연가’ 속 여주인공에 빙의해 남자 주인공을 찾아 사랑을 느꼈었으니까. 일종의 영업비밀과도 같았다.

하정의 빙의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새로운 작품을 집필할 때마다 남자 주인공을 찾아 사랑을 느끼기 위해 애를 썼고, 그 덕에 그녀는 베스트셀러 작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거야….”

새롭게 집필하고 있는 소설 속 남자 주인공 ‘파비앙’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번엔 유독 남자 주인공의 수준을 높게 잡은 탓이었을까. 파비앙의 조각 같은 외모와 차원이 다른 아우라를 가진 남자는 아무래도 현존하지 않는 듯했다.

딸랑- 앙칼지게 울리는 현관 종을 뒤로한 채 카페 ‘바그다드’ 안으로 들어서는 하정의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공하정, 왔어?”

서쪽의 창가자리. 하정의 지정석과도 같은 자리였다. 그녀는 세라의 인사에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지정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라는 금세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만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여기.”

“땡큐.”

하정은 익숙한 듯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쪽 빨며 빈약한 숨을 진정시켰다.

“파비앙 못 찾았구나?”

하정을 지켜보다 넌지시 물음을 던지는 이 여자의 이름은 홍세라. 하정에게 있어 세라는 유일한 사람이다. 스무 살 때부터 무려 9년간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학 친구이자, 영업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하정의 협소한 인맥 중 유일한 금수저다.

이 근방 일대의 건물 소유권을 꽉 잡고 있는 세라의 아버지는 1년 전,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 세라에게 카페 ‘바그다드’를 차려주었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고, 이 건물의 건물주 역시 그녀의 아버지다.

“…네가 진정한 승자다.”

세라의 얼굴엔 윤기가 흐르다 못해 넘치고 있었다. 세라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하정은 그녀의 낯빛이 부럽다는 듯 작게 중얼댔다. 뭐, 그 덕에 그녀의 집에 공짜로 얹혀살고 있긴 하지만.

“손님 몰린다. 가서 알바생 좀 도와줘.”

“어머, 갑자기 왜 이렇게 몰려. 마시고 있어. 부족하면 말하고.”

갑작스럽게 손님이 몰린 탓에 세라는 황급히 카운터로 돌아갔다. 그러자 홀로 남겨지게 된 하정은 의자 등받이에 눕다시피 몸을 기대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파비앙.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그 순간,

“…뭐야? 정전?”

갑작스러운 정전이었다. 놀란 하정은 허겁지겁 어둠을 둘러보았다. 다른 이들도 그녀와 마찬가지였다. 우왕좌왕하며 어둠을 둘러보고 있는 카페 안의 사람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파비앙도 못 찾았는데 정전까지.”

하지만 하정에겐 정전 따위에 동요할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내 체념한 그녀는 풀썩 등을 기대며 초점 없는 눈으로 통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도시 전체의 정전이었다. 끝도 없이 늘어져 있는 통유리 너머의 어둠.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건… 하정은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며 통유리 너머에 시선을 곤두세웠다.

“어…?”

순간 하정은 두 눈을 의심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 어둠이 무색하리만큼 환한 빛이 피어오르는 저 남자.

“파비앙…?”

파비앙이었다.

* * *

pm 6:50. 도진의 시간은 여전히 정확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원장님.”

원장실 문을 열고 나온 도진은 고개를 까닥이며 데스크 앞을 지났다.

설강우와의 약속시간은 7시 30분. 단 1초의 오차도 없어야만 시간 내로 센트리아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원 밖을 나온 도진은 엘리베이터 내림 버튼은 누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난데없이 꺼져버리는 모든 불빛. 내림 버튼을 아무리 눌러봐도 정전 상태의 엘리베이터는 움직일 리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1분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1층에 도착해 있어야만 하는데. 그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시간은 멈추는 법이 없었으니. 도진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더니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나는 5초. 10초. 20초.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는 그의 시간에 계속해서 오차가 생겨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헉, 헉.”

마침내 1층에 다다르자 피어오르는 그의 숨이 거칠었다. 비로소 건물 밖을 나왔을 때에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었지만, 째깍. 째깍. 그는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눈앞에 불쑥 나타난 미치광이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