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결혼 계약
“윤사랑 너 결혼 언제 할 거야?”
설날이 지나고 한 살 더 먹으면서부터 엄마의 결혼 성화가 심해져 갔다. 사랑은 귀를 막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엄마, 요새는 비혼이랑 비연애 비출산이 흔한 시대야.”
“다른 집 딸들은 턱턱 청첩장도 보내오고 훤칠하고 번듯한 남자들이랑 결혼한다고 그러는데 너는 왜 그러니. 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래.”
“결혼하기가 싫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내 주변에 남자가 있기를 해?”
사랑은 이 한마디가 나중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전혀 몰랐다.
“야! 윤사랑!”
“몰라 몰라. 나 출근할 거야. 오늘 야근해서 늦게 들어오니까 엄마 먼저 저녁 먹어.”
“그래. 남자가 없다 이거지? 너 이번 주 일요일 날 스케줄 비워놔.”
“왜?”
“맞선 봐.”
“…뭘 보라고?”
창창한 스물아홉의 나이에 맞선을 보라니. 애초에 결혼을 왜 해야 해? 그냥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거지. 딱히 외롭기를 하나. 그렇다고 사랑을 하고 싶기를 하나. 멋모를 중학교 시절에 마지막 연애를 하고 지금 거의 몇 년째 솔로인 상태이지만 별다른 불만은 없다. 회사도 잘 다니고 있고 집안 사정도 어릴 때보다 좋아져서 나쁘지 않은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작년부터 왜 그렇게 결혼을 강요하는 거지?’
사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에 들어가서 서류를 정리하면서 사랑은 미래 계획을 세워본다.
‘만약에 혼자 살게 된다면 멋있게 살아야지. 쇼핑도 하고, 가고 싶은 곳도 가고, 책도 읽고, 커리어도 차근차근 쌓으면서 여유를 즐길 거야.’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사랑 대리님.”
“응? 왜 불러요. 미나 씨?”
“이번에도 사랑 대리님 영업 실적이 제일 높아요.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뭐, 당연한 결과였다.
“멋져요! 전 꼭 대리님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신입사원 미나 씨를 보니 병아리 같아 웃음이 나왔다.
“열심히 해봐요.”
지금까지 인생은 늘 탄탄대로였다. 학창 시절에는 전교 일등을 해서 쉽게 명문대학교를 갔으며 대기업 영업직으로까지 입사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중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넘쳐났다. 얼굴도 나쁘지 않고 연봉도 괜찮아 만족할 만한 삶 아닌가? 하지만, 엄마는 사랑의 인생이 만족스럽지 않다.
[윤사랑. 이번 주 일요일 날 세시에 종 울리는 커피숍, 거기서 맞선 봐. 올해 안에 너 시집 보내는 게 내 목표야. - 엄마.]
‘…으….’
사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또 시간 낭비를 하겠구나.
‘어떻게 해야 엄마가 포기할까….’
[지잉-]
그때 문자가 왔다. 또 엄마가 보냈나 싶어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다행히도 문자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었다.
[뭐하냐.]
진원의 문자에 굳어 있던 사랑의 얼굴이 웃는 얼굴로 바뀐다.
***
커피숍.
사랑은 캐러멜 마끼아또에 휘핑크림을 올리고 시럽을 세 번 쭉쭉 넣었다. 반대로 진원은차가운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켰다.
“왜 보자고 한 건데?”
사랑은 막상 불러놓고 아무 말 없이 커피만 마시자 결국 답답해진 진원이 짧게 물었다.
“야. 나 집안에서 결혼하라고 난리도 아니야. 진짜 작년에도 맞선을 서른 번 봤는데 올해는 아예 백 군데를 볼 예정 인가봐. 어렸을 때만 해도 분명히 엄마가 굳이 결혼은 안 하고 혼자 살아도 된다고 하셨거든? 인생을 즐기라 하셨단 말이야. 그런데 나이 먹으니까 생각이 바뀌신 건지 강요당하는데 지겨워죽겠어.”
“….”
진원은 사랑의 말을 다 듣고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랑은 말을 이어간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아무 남자나 붙잡고 결혼한 다음에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야. 그럼 더 뭐라 하지는 못하시겠지.”
사랑이 참새처럼 쫑알쫑알거린다.
“아무 남자랑 하지 말고 나랑 해.”
“뭘…?”
“결혼.”
“푸웁… 콜록… 콜록….”
사랑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마시고 있던 캐러멜 마끼아또를 뿜어버린다.
“이혼은 일 년 뒤에 해줄게. 괜찮은 조건 아닌가?”
“아, 장난치지 좀 마.”
“진심이니까 진지하게 생각해봐. 안 그래도 요새 우리 집에서도 결혼하라고 난리거든.”
“됐어. 너랑 하느니 지나가는 돌덩이랑 하지.”
진원은 고등학생 때부터 봤던 친구다.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인데 진원과 결혼해서 같이 사는 걸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윤사랑. 넌 내가 남자로 안 보여?”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뭐… 어렸을 때부터 본 사이잖아. 가족보다 익숙하다고.”
“근데 오늘은 안 바빠? 요새 매일 바쁘다고 애들 연락도 잘 안 받았잖아.”
“바빠. 이것만 마시고 들어가야 해.”
진원이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다. 째깍째깍 시간은 잘도 간다.
“헉… 진짜? 오늘 괜히 보자고 했나봐. 그럴 줄 알았으면 나중에 보는 건데… 괜찮아?”
“어. 너 보러 온 거니까.”
진원의 눈이 사랑을 향했다.
“…응?”
“네가 부르면 내가 뭘 하고 있든 올 거야.”
“왜? 친구라서?”
사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싶으니까.”
진원은 지금 이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회사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사랑의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었다. 사랑이 먼저 연락을 하는 일이 잘 없어 사랑에게 연락이 왔을 땐 살짝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이상하게 사랑을 보면 피로가 풀렸다. 사랑이 재잘거리는 것도, 가볍게 웃는 것도, 당황하는 것도 모두 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내 말 듣고 있어? 강진원?”
사랑은 말을 이어갔지만, 갑자기 불쑥 누군가가 나타나서 대화를 길게 할 수는 없었다.
“대표님. 이제 들어오셔야 합니다. 회장님이 대표님 찾아오라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전화도 안 받고 제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기나 합니까?”
“내가 알아서 가.”
정비서의 재촉 때문에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진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진원아. 잘 가. 오늘 얘기 들어줘서 고마웠어.”
진원은 사랑에게 인사를 하려다 멈칫하고 입을 연다.
“윤사랑. 내가 필요하면 불러.”
“응. 고마워.”
사랑이 환하게 웃자 그 순간 진원은 눈에 사랑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이 부셨다. 사랑이 커피숍을 나갈 때까지도 진원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대표님. 그렇게 사랑 아가씨가 좋으세요?”
“글쎄.”
**
사랑이 옷장에서 분주하게 원피스를 찾고 있다.
‘벌써 맞선을 봐야 하는 일요일이라니.’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른 건지 전혀 모르겠다. 어색한 마음만 없으면 아무거나 걸쳐 입고 가고 싶지만 그건 또 예의가 아니니까.
‘휴.’
결국 사랑은 분홍원피스를 입고 정말 가기 싫은 맞선장소로 향한다.
“사랑 씨. 제 말을 집중해서 들어주세요.”
하지만 곧 후회하고 만다.
“전 아기는 여자가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사랑 씨가 저랑 결혼하려면 지금 다니는 직장을 포기하고 내조만 해주세요. 또 저희 집이 예전에 양반집이었기 때문에 제사도 지내야 하는데, 한 일곱 번만 지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럼 그동안 그… 대하 씨는 무엇을 하시죠…?”
“저는 사랑 씨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하죠. 그리고 제사는 원래 여자들이 지내는 거지만 도와달라고 하면 조금은 도와드리도록 할게요. 참, 그리고 또 저희 집안은 여자는 술을 마시면 안 돼요.”
“….”
머리가 점점 복잡해진다.
“아들은 셋 정도만 낳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저희 엄마가 아들을 좋아하거든요. 뭐 요새는 딸이 대세라고는 하는데… 집안에 아들 이 있으면 큰 힘이 되잖아요. 그리고 또 목소리가 크지 않고, 조신하게 내조 잘 하는 아내였으면 좋겠어요.”
사랑은 애써 굳어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저랑은 전혀 반대인 아내를 찾고 있네요.”
“괜찮아요. 사랑 씨도 노력하면 되죠. 전 사랑 씨 마음에 드는데 이따 같이 드라이브라도 가실래요? 제가 태워 드릴게요.”
“싫어요.”
“왜요?”
아무렇지 않게 묻는 대하를 보자니 인내심의 한계가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왜긴 왜에요. 이기적인 댁이랑 1분 1초도 같이 있고 싶지 않네요. 각자 헤어지도록 하죠.”
“사랑 씨. 갑자기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예요? 요샌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시집도 못 가는 세상이에요.”
“시끄러워요. 같잖은 소리 좀 집어치워요. 오지랖도 태평양이지.”
“…지금 뭐라고….”
“시끄럽다고 했어요!”
사랑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대하는 뭐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한마디만 더 했다간 정말 작살이 날 것 같아서 별 말 못하고 가방을 챙겨서 도망가 버린다.
“뭐 저런 성격 더러운 여자가 다 있어?”
“네 성격이 더 더러워! 이 자식아!”
사랑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분명 엄마가 맞선은 어떻게 되었냐고 또 닦달을 할 텐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나랑 해. 결혼.’
맞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위장 결혼했다가 이혼하면 될 거 아냐? 그럼 엄마도 더 뭐라고 못하시겠지. 진원과 대화를 해보려고 자리를 일어났는데 일어나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선 일찍 끝났네.”
진원이 앞에 서 있었다. 사랑이 혹시나 꿈이나 싶어서 눈을 감았다 떴지만, 진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기,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맞선을 지켜본 건가. 설마…
“거래처랑 여기서 업무미팅이 있었어.”
휴,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나 보다. 안 그래도 진원을 만나려고 했는데 마침 눈앞에 있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 렇구나… 있잖아. 나 할 말이 있는데… 전에, 네가 말했던 거 있잖아, 우리 둘이 결혼하는 거 말이야. 생각해보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나랑 결혼할래?”
“해.”
사랑은 긴장을 하며 말했지만 일 초 만에 진원의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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