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 비서가 떠난 후, 조수석에 앉은 다령이 웃었다.

“왜 웃어?”

“아니, 이 비서님 너무 귀여우셔서요.”

“지금, 다른 남자 생각하면서 그렇게 웃는 겁니까?”

“이 비서님한테도 질투하세요?”

“질투라는 건 열등감이 있는 상대한테 하는 게 질투인 거 모르나 보네. 하.”

“왜요? 이 비서님이면 괜찮죠.”

다령의 놀림에 도후가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이 재미있어서 더 놀릴까 고민하던 그때, 도후가 물었다.

“그래도 뽀뽀는 나랑 하고 싶고?”

“…!”

그, 그놈의 뽀뽀! 뽀뽀!

“어차피 나 운전하려면 그쪽이 입 맞춰줘야 하는데? 혹시 또 쓰러지면 어떡해, 운전하다가.”

“치사하게. 걱정을 유발한다 이거죠?”

장난기 머금고 웃던 도후가 한 번 씨익 웃어 보이더니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한밤중, 장난기 가득했던 차 안은 두 남녀의 진한 숨소리로 가득 찼다.

“들어갈게요. 운전 괜찮죠?”

다령을 데려다준 도후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입 맞췄으니 안심하라는 듯.

“조심히 가요.”

“응. 그리고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말 해줘.”

“속상할 텐데.”

“나중에 알게 되면 그게 더 속상한 거야.”

그런데, 할 말을 다 하고도 도후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나 싶던 그가 하는 말.

“이번 창립행사 때 나랑 같이 가.”

“…….”

“같이 가고 싶어.”

창립행사면 언젠가 희성이 다령에게 한 번 언급했던 행사였다.

이 순간에 박 여사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부모님한테 보란 듯이 그쪽을 보여주고 싶어.”

*

“이 비서님?”

“…….”

“비서님.”

“왜요, 왜! 저 운전에 집중하고 있잖아요!”

다음 날, 도후는 이 비서의 눈치를 살피며 그를 깔짝깔짝 불러댔다.

역시나 입술이 댓 발 나온 이 비서는 짜증을 냈다.

“내일! 내일 오후에 출근해요!”

“진짜요?”

“당연.”

다행히 이 비서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아, 그리고 혹시….”

“네.”

“어제 들은 얘기 있어요…? 다령 씨랑 제 얘기.”

“아, 뽀뽀요? 신경 쓰지 마세요. 커플들이 다 그렇죠, 뭐.”

이 비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도후는 창피함에 차창에 머리를 박았다.

하필, 이 비서가 그 순간을 다 듣고 있었다. 아, 창피해.

“그런데 강다령 씨랑 싸우신 거 아니었어요? 언제 또 화해….”

“다음 주 추석인 거 알죠? 기획 상품들 판매 현황 나중에 들고 와주시죠.”

“창피하세요? 그럴 거 없다니까요?”

“제가 지금 창피해서 이런 것 같으세요? 추석이 코앞이니까 이러죠. 직원들한테 돌릴 선물 세트는 어떻게 됐습니까?”

*

“여기 있습니다.”

“둘이 사귀는 사이… 맞아? 얘는 왜 이렇게 자고 있어?”

도후의 경고에도 박 여사는 아들의 사생활에 계속 집착했다.

사귀는 사이라면서 도후는 왜 자고만 있어?

박 여사가 도후와 다령이 카페 데이트를 하는 사진을 보며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많이 피곤하셨거나요.”

“아무리 피곤해도 잠만 잔다고? 데이튼데? 일단 알겠습니다. 가보세요.”

자신의 아들이지만,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혹시 연기하는 건가.”

내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일부러?

잠시 도후와 다령의 사이를 의심했던 박 여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누가 봐도 연기가 아니니.

그러다 다령의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겨우 이딴 애를.”

*

“흠….”

퇴근 후, 노트북을 보는 다령의 표정이 심각했다.

도후가 제안한 창립 행사 이야기에 그녀의 신경은 온통 그날 입을 드레스에 쏠렸다.

이런 자리에 참석해본 적이 있어야지.

“하… 어렵네.”

다령은 과하지도 않으면서, 저렴한 것도 아니면서, 예쁜 드레스를 찾다가 노트북을 접었다.

“그나저나… 내가 참석해도 되나.”

모든 걸 각오하고 도후의 파트너로 참석해야겠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도후 부모님의 눈초리.

복잡한 마음에 다령은 결국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집 앞인데 나와.]

그러다 도후에게 온 문자를 확인하곤, 잽싸게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았다.

“와, 오늘 화장한 건 맞아? 왜 이래?”

다령은 미션을 받았다.

오래 걸리는 화장도 아니면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메이크업하기 미션을.

“본부장님.”

다령을 발견한 도후가 앞서 나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입가엔 미소를 머금고.

“아직 옷 안 갈아입었네?”

“그냥 이것저것 하느라요. 그런데 회사에서 온 거예요?”

“응. 밀린 업무들 좀 보느라.”

“본부장님도 칼퇴근 안 하시는데 인턴이 이 시간에 집에 있네요.”

“원래 자리가 높을수록 중요한 일을 하지. 그것도 많이.”

돈을 많이 받는 자리일수록, 중요한 일이 많은 법이었다.

다령은 도후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격하게 공감해주니 민망하네. 재수 없었나…?”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본부장님 말.”

“그럼 이 비서님은 이제 보내드릴까?”

이제야 다령은 운전석에 앉은 이 비서를 쳐다보았다.

“이 비서님 보내도 괜찮겠어요? 또 갑자기 쓰러지면?”

“뽀뽀해 줄 거잖아.”

“어제, 오늘 그놈의 뽀뽀, 뽀뽀. 진짜! 왜 그래요?”

“뽀뽀 안 할 거였어? 그럼 말고. 이 비서님이랑 셋이 저녁 먹고 헤어지면 되겠네, 그럼.”

도후의 밀당에 다령이 제대로 졌다.

이 남자가 좋아할 게 뻔한데 원하는 대로 답을 해줘야 해, 말아야 해.

“수고하셨어요,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그러는 사이 도후가 이 비서에게 퇴근할 것을 알렸다.

“그런데 저 가면 다령 씨가 운전하는 거예요? 다령 씨 앞에서 또 쓰러지면 어쩌시려….”

“거참,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가보세요, 이만.”

“그럼.”

차에서 내린 이 비서가 걱정했지만, 도후가 이 비서의 걱정을 싹둑 잘랐다.

그리고 이 비서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난 후, 다령이 황당하다는 듯 도후에게 다가왔다.

“전 아직 대답 안 했는데요?”

“때론 침묵도 대답이 될 수 있죠.”

“자기가 더 원한 거였으면서.”

*

“내일 시간 좀 내요.”

“왜요?”

“행사에 입고 갈 옷 보러 가게.”

안 그래도 옷 걱정하고 있었는데.

도후의 배려 덕에 다령의 걱정이 사라졌다.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모든 건 그쪽이 생각하는 그 이상일 거니까.”

“아.”

도후는 전에 만났던 남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령 역시, 이 비현실적인 남자가 아직도 생생하게 와 닿지 않았다.

만약 옷을 보러 간다면… 드라마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건가?

막 남자 주인공 앞에서 옷들을 입어보는 그런 상황이?

다령이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들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다령아.”

“네?”

“어색해?”

“아, 아니요!”

처음이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다정하게 부른 건.

도후의 얼굴에서 약간의 긴장감이 엿보였다.

“그쪽, 강다령 씨, 그렇게 부르는 거 웃긴 거 같아서.”

“웃긴 건 아니었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너도 나한테 본부장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소리야. 네가 나한테 말 놓는 거까진 바라진 않아도 본부장님은 싫어.”

“원하는 호칭 있어요?”

“뭘 호칭까지야, 민망하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의 입술은 계속 씰룩거렸다.

분명 원하는 호칭이 있을 거 같은데….

“원하는 호칭 있으면 말하세요. 불러드릴게요.”

“자기 어때?”

“으으으음.”

“령아.”

“귀신 부르는 거 같잖아요. 패스.”

데이트가 끝났지만, 두 사람은 차 안에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애칭 정하기’에 집중하며.

“계속 반대만 하지 말고 너도 아이디어를 좀 내!”

“아이디어가 필요해요? 내가 갑인데? 갑은 원래 결재만 하는 거예요.”

“하, 내 업무가 결재만 하는 거로 보였나 보다?”

“에이! 말꼬리 잡지 말고 얼른 애칭 정해요.”

그의 표정이 꽤 진지했다.

애칭을 정하는데 뭐 이렇게까지 진지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럼 너는 령츄하자.”

“령츄?”

“다령 츄.”

“…푸흡!”

도후가 ‘츄’에 힘을 주며 입술을 내밀다가 다령의 폭소를 보곤 입술을 다시 집어넣었다.

뒤늦게 밀려오는 자괴감.

“싫음 말아.”

“귀여워서 그렇죠. 그럼 전 본부장님한텐 뭐라고 불러요?”

“후… 후츄?”

이미 애칭은 정해져 있었고 민망함과 오글거림이 동시에 밀려왔다.

“후츄가 뭐야, 후츄가. 하하하, 안 어울려.”

“…….”

“전 이제 내릴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 어. 내일 봐.”

결국, 안 어울린다는 말을 끝으로 애칭 정하기가 끝이 났다.

다령이 그냥 내려버리자, 도후는 시무룩해진 표정을 지었다.

나름 용기 낸 건데.

“아! 뽀뽀!”

그러는 사이 운전석 문이 열렸고 그녀의 입술이 다가왔다.

입을 맞춘 후, 그녀가 웃으며 하는 말.

“잘 가요, 후츄.”

*

“후츄, 후… 츄….”

“후추 필요하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이 비서가 진지한 얼굴로 묻자 도후는 급정색을 했다.

오늘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다령과 정한 애칭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요. 아닙니다, 드세요.”

“그런데 데이트하고 싶어 하는 건 알겠는데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뭐가요?”

“본부장님 기면증요. 그러다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이 비서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하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상사가 기면증이 있으니 신경 쓰일 만도 하지.

“걱정마세요. 강다령 씨 있으니까.”

“그래도 운전 같은 건 하지 마세요.”

“그것도 걱정마세요. 강다령 씨가 있. 으. 니. 까.”

‘강다령’ 세 글자가 무슨 치트키라도 되는 걸까.

이 비서는 다령의 이름을 언급하며 광대를 올리는 도후 때문에 기겁하며 몸을 떨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이네.

*

[일 마치고 잠깐만 기다려, 령츄♡]

퇴근 시간, 도후의 ‘령츄♡’가 낯설면서도 좋고, 귀여웠다.

[알았어요, 후츄♡]

다령은 오글거림에 몸서리치긴 했지만, 애정을 담아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아! 수고하셨습니다.”

“응. 다령 씨 요즘 연애해? 유독 기분 좋아 보이네?”

“네? 제가요?”

“응. 요즘 계속 싱글벙글이잖아.”

때마침 지나가던 사무실 선배들이 물었고, 다령은 대답 대신 얼굴을 붉혔다.

“어쭈? 연애하는 거 맞나 본데?”

“적당히 티 낼게요.”

“그래, 적당히 티 내. 우리 사무실 태반이 솔로야.”

“하하, 네.”

선배들이 떠난 후, 다령은 잠시 얼굴 상태를 확인하곤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립니다.]

요즘은 엘리베이터 기계음도 아름답게 들렸다.

자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요즘.

[문이 닫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