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샛별이 엄마로만, 13부>

그날의 모임 사건 이후, 나는 웬만하면 그를 마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역시도 지금까지 늘 그랬듯 아침 일찍 나가고, 밤늦게야 집에 퇴근하곤 했기에 우리에게 있어서 그날의 일을 다시 얘기할 수 있는 접점은 다행히도 없었다.

“참, 성혁이 너는 이번에 여름 휴가가 어떻게 되니?”

아침 식사 중에 어머님께서 그 사람에게 물으셨다. 이제 어느덧 본격적으로 더워 더워하는 시즌이 되었다. 샛별이도 곧 있으면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아직 일이 많아서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어머님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그 사람이 내심 반가운 답변을 내놓는다. 이번만큼은 속으로 나는 바쁜 그가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 그와 함께 휴가까지 가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가족들이 먼저다.”

식사 도중에 아버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의를 주셨다. 그리고는 밥을 먹고 있는 귀여운 샛별이를 눈으로 가리키시며 말씀을 이으신다.

“저 녀석이 물놀이 물놀이 노래를 부르는데, 바쁘더라도 하루 이틀 시간 내서 강원도 별장이라도 다녀와라. 내가 영철이에게 얘기해 놓으마.”

조금 전까지 다행스러웠던 마음이 아버님의 충고 말씀에 갑자기 납을 얹어 놓은 듯 답답해지고 말았다.

“정말요, 할아버지? 아빠, 나 물놀이 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응?”

밥을 먹던 아이는 ‘물놀이’라는 단어에 과하게 흥분하기 시작한다.

“샛별이 매주 수영 레슨 다니잖아.”

나는 애써 바쁜 그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리고 휴가를 웬만하면 함께 가지 않으려고 잔머리를 굴려 핑곗거리를 찾아내고는 속으로 환호했다.

“에이. 그건 물놀이가 아닌걸? 튜브 타고 싶은데, 못쓰게 한단 말이에요. 나 플라밍고 튜브 타고 싶은데….”

얼마 전 마트에서 본 핑크 플라밍고 핑크가 원수구나.

“이따 회사 가서 스케줄 확인해보고 일정 조정해 볼게요.”

그 사람의 덤덤한 말에 나는 벌써부터 걱정이 시작된다. 얼마 전 자신의 침실에서 나가려던 나의 앞을 말없이 가로막아 서던 사람. 일방적인 키스 후 알 수 없는 사과를 남긴 사람. 갑자기 몸이 편안한 탓일까. 요즘 들어 불쑥불쑥 더 많이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이유 없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저 남자의 마음은 뭘까 궁금하면서도 그 마음에 종횡무진 방향을 잃고 끌려다닐까 봐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

‘따르릉!’

화장실 청소 중에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고무장갑을 벗고 받기도 번거롭지만, 안 받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일단은 받고 보자는 심산으로 얼른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고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끊어질까 봐 서두르느라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받아버렸다.

“네. 헉헉….”

내가 들어도 헐떡거리는 숨이 수화기 너머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 뭐 하는 중인데 그렇게 숨이 찹니까?

“아….”

나는 그제야 전화를 귀에서 떼어내 뒤늦게 발신자를 확인해 본다.

‘샛별 아버님.’

다시 귀에 전화기를 가져와 왜 숨이 이토록 찬 지에 관해 설명해야만 했다.

“휴… 화장실 청소 중이었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여전히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숨을 최대한 참으며 나는 간신히 그에게 용건을 물었다.

- 아주머니 안 계세요?

그가 의아한 듯 물어온다.

“네? 아래층에 계시는데… 바꿔 드려요?”

머저리. 내가 물어보고 나서도 어이가 없다. 그와 말을 하다 보면 갑자기 머릿속 회로가 뒤엉켜 버리거나 회로가 끊겨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아니, 왜 근데 아리 씨가 화장실 청소를 합니까?

조금 화난 듯 날카로워진 그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2층은 늘 제가 청소했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 아니. 아주머니가 계시는데, 뭐 하러 힘들게 청소해요?

아, 이 문제가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선 로펌 대표 사모님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이 붙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고무장갑 끼고 화장실 청소를 하며 헉헉거리는 모양새가 딱히 그의 눈에는 좋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나 나름의 주관과 철칙이 있었다.

“아주머니는 어머님, 아버님을 위해 고용된 분이지 저를 위해 고용되신 분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도 딱히 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저보다 나이 많으신 분을 2층 구석구석까지 부려 먹어요? 운동 삼아 하는 중이니까 괜찮아요. 근데 무슨 일이세요?”

나는 내 생각을 상대방이 더 반박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어필하고서 다시 한번 그를 향해 전화를 건 용건을 물었다.

- 흠… 그래도 힘들 땐 아주머니께 부탁해요. 무리하지 말고….

다정하고 부드럽게 휘감기는 목소리. 걱정해주는 듯한 그 사람을 향해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한다.

- 휴가 말입니다….

“아. 네.”

그의 목소리에 넋이 잠시 나가버렸던 나는 들려오는 ‘휴가’란 단어에 다시 긴장 모드가 된다. 제발 바빠서 안 되겠다, 아리 씨가 샛별이랑 어디라도 잠깐 다녀오라는 이야기였으면 싶었다.

- 이번 주 토요일이랑 일요일, 주말에 1박 2일로 짧게 다녀오죠.

‘빠직!’

기대했던 답과는 확연히 온도 차가 있는 대답에 잠시 당황했다.

“시간이… 되시겠어요?”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라고 거듭 권유하고 싶어 되물었다.

- 네. 별일은 없을 거 같아요.

“….”

나는 이 짧은 순간에도 머리를 굴려본다. 어머님과 아버님께도 함께 가시자고 해야겠다. 그러면 조금은 그와 있을 시간을, 그와 단둘이 마주하는 상황을 줄일 수 있을지 모른다.

- 듣고 있습니까?

그의 물음에 잠시 딴생각을 하던 정신이 다시 돌아와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대답한다.

“네? 네, 네.”

- 무슨 생각을 매일 그렇게 골똘히 합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내가 요즘 들어 자신을 떠올리며 수십만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이 남자도 알고 있다는 뜻일까. 그런 걸까. 나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그러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아닌데요?”

- ‘피식!’

내가 평소 좋아하는 그의 작은 웃음이 수화기를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마치 내 앞에서 지금 웃고 있다는 착각이 들어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미 내 마음을 간파하고 있다는 듯. 너의 말이 지금 진실이 아니라는 듯 웃어오는 이 남자가 문득 그립다. 정말 조금씩 미쳐가나 보다.

- 거기 관리해주시는 분들께 미리 말씀드렸어요. 알아서 음식이랑 잠자리는 다 준비해 주시니까 많이 준비는 하지 말고 가볍게 쉬었다 오면 돼요.

“네에.”

별다른 걸 준비할 게 없다는 건 그나마 반가웠다.

- 어제… 지난번 만났던 친구 녀석들이랑 한잔했어요.

아, 그랬구나. 술을 마셔도 늘 깔끔한 사람이어서 냄새조차 맡을 수 없었기에 나는 몰랐다.

“네.”

- 제가 먼저 지나쳤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자기들도 아리 씨한테 사과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와이프들도 반성 많이 했다고요.

다행이다. 괜히 나 때문에 그동안 유지되어 온 친구 사이가 잘못될까 봐 솔직히 속으로 계속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다행이에요. 잘됐네요.”

나는 진실한 나의 속마음을 그에게 전했다.

- 동욱이 녀석 와이프가 아리 씨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어 한대요. 그래서 어제 아리 씨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 주었어요. 괜찮죠?

좋지 않은 일로 통화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지만, 그래도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면 상관없다.

“네. 괜찮아요.”

- 그래요. 아마 지혜 씨가 전화할 거예요. 아까 아침에 얘기해주려고 했는데, 요즘 아리 씨가 하도 나만 보면 도망치고 숨기 바빠서 말할 틈을 찾지 못했어요.

웃음기가 묻어나는 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한다. 그도 알고 있었구나. 내가 일부러 그를 마주하지 않고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애써 부정해야 한다. 나는 그날 일을, 그와의 키스를 모른 척하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그냥 하나의 연극처럼, 해프닝으로 덮어두기로 결심했으니까.

“아닌데요?”

- ‘피식!’

그가 다시 웃는다. 오늘따라 자꾸만 웃는 그가 더없이 부담스럽다.

- 그럼, 이따 집에서 봐요.

‘쿵!’

한 번도 듣지 못한 낯선 인사였다. 왜 이 남자의 별말 아닌 이 말에 심장이 열 길 물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걸까. 나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느라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대답은 해야 했다.

“아, 네.”

- 청소 대충 하고 쉬어요.

‘헉!’

조금 전 인사로도 황송할 판국에 나를 걱정하는 애정 어린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별것 아닌 짧은 통화에도 갖가지 감정이 묻어난다. 그가 무엇을 하던 중인지, 밥은 먹었는지 등등이 갑자기 궁금해져 온다. 하지만 다 쓸데없는 물음들일 뿐이다. 어차피 대놓고 묻지도 못할 것을.

“네.”

문득 전화로 표정 없이 전달되는 목소리가 아니라 그가 내 앞에서 갖가지 표정으로 변화하며 이런 다정한 말들을 기꺼이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터무니없이 든다.

‘뚝!’

그와의 통화가 끊겼다. 전화를 끊는데, 희한하게도 오늘따라 뭔가가 아쉽다.

“뭐야, 이 남자!”

화장실을 청소하는 중에 걸려온 그의 전화 한 통으로 오전 내내 그에게 제대로 휘둘린 듯한 나의 감정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

“따르릉!”

그날 오후, 점심을 먹고 잠시 2층 거실에서 책을 보는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얼른 탁자 위에 놓았던 휴대전화를 들어 발신자를 확인해본다. 모르는 번호다. 평소 발신자가 없거나 모르는 번호는 절대로 받지 않았다. 하지만, 오전에 그 사람이 전화로 한 이야기가 있어서 나는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송아리 씨 휴대전화인가요?

조심스러우면서도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그런데요. 누구세요?”

일부러 반쯤은 알고 있음에도 예의상 묻기로 한다.

- 아, 저 차지혜예요.

알고 있다. 나는 놀랐다는 연기를 하려 한다.

“네? 아… 안녕하세요?”

- 네. 잘… 지내시죠?

그렇게 예의상 서로 안부를 묻고 잠시 짧은 침묵이 어색하게 자리했다.

- 아리 씨. 죄송해요. 이 말 하려고 전화 드렸어요.

희한하게도 지혜 씨의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사과에 그동안 꽉 막혔던 가슴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듯하다. 얼음이 가득한 사이다를 마신 기분이다.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