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꽃

사인교 안은 널찍하여 난주가 몸을 웅크리면 누울 수도 있었다. 바깥바람을 막기 위해 사방으로 자줏빛 비단장막을 드리웠고 바닥엔 푸른 비단에 진홍색 모란을 수놓은 방석을 두 개나 깔았다. 윤기가 흐르는 담비가죽과 자개로 장식한 손거울도 놓여 있었다.

관아의 찬모가 주전부리로 챙겨 준 약과와 강정과 육포와 대추 등을 담은 팔각찬합이 있었고 구석엔 작은 청자요강이 보였다.

가마 안의 모든 것은 조선에서 가장 귀하고 비싼 물건들이었으나, 가마 안의 여인은 조선에서 가장 천시받는 기녀의 딸이었다. 기녀의 딸은 기녀가 되어야 했고 기녀가 될 딸을 낳으며 몸을 팔다 죽었다.

황송하게도 나라에서는 가장 치욕스럽고 비천한 인생을 살게 하는 대신 왕실과 대가의 여인이나 입을 수 있는 비단옷을 걸치게 해주었다.

사흘 내내 도망갈 틈을 찾았으나 그녀를 감시하는 자들의 수만 늘어났다. 거기다 아픈 어미까지 있어서 난주는 야반도주를 포기했다.

가마 멀미로 계속 속이 울렁거렸고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난주는 꼿꼿하게 앉아 고통을 견뎠다. 피하지 못했고 도망가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주는 벌이었다.

가마의 창문 밖으로 봄기운이 막 들기 시작한 산과 들이 보였으나 난주의 가슴은 여전히 눈 덮인 산비탈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그 겨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마꾼들의 덩치도 좋았으나 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중무장을 한 네 명의 사내가 말을 탄 채 그녀의 가마를 호위하고 있었다. 바위 같은 체구의 사내들이 풍기는 땀내와 쇳내에 난주는 이마를 찌푸렸다.

태어나 가장 많은 금은주옥과 가장 비싸고 화려한 비단을 몸에 걸쳤으나 난주는 지금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했다.

바람결에 물비린내가 났고 가마꾼들의 걸음이 느려졌다.

호위 무사 중에 가장 덩치가 크고 팔의 흉터도 큰 자가 다가와 고했다.

“아씨, 곧 임진강을 건너야 합니다. 가마에 그대로 계십시오.”

임진강을 건너면 파주였고 파주에서 한양까지는 하룻길이라 들었다.

나룻배를 통째로 빌렸는지 배에 탄 사람들은 난주 일행뿐이었다.

배 안에서도 난주는 가마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호위 무사들이 빙 둘러서서 가마를 지켰다. 마치 그녀가 강물에 뛰어들까 봐 가마 안에 꼭꼭 가두어 두라 엄명을 받은 듯했다.

가마멀미에 뱃멀미까지 겹쳐서 난주는 청자요강의 뚜껑을 열고 토했다. 아침을 안 먹어 쓴 물만 나왔으나 자꾸 구역질이 치밀었다. 나중엔 매운 눈물이 났다.

멀리서 들리는 뱃사공의 노래가 구슬펐다.

***

그녀의 가슴골에선 늘 농익은 복숭아향이 풍겼다. 겨드랑이에서 나는 향기는 더 진하고 달콤했다.

승준은 오늘도 향기로운 난주의 꿈에서 깨어나기 싫었다. 눈 쌓인 암자의 오두막에서 그녀를 품었던 사흘의 밤낮이 꿈에서라도 다시 이어지길 바랐다.

“도련님은 스물셋이 되도록 왜 장가를 안 갔어요?”

“바빠서 못 갔다.”

“피이, 거짓말.”

“신부의 얼굴도 안 보고 첫날밤에 옷고름부터 푸는 사내가 되긴 싫었어.”

“그래서요?”

“그래서 아주 커다란 말을 타고 한양 도성의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며 어여쁜 규수를 찾아다녔지.”

“찾으셨어요?”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난주의 눈에 질투가 어리자 승준은 미소를 감추었다.

“뒤태가 어여쁜 규수를 찾긴 했는데 앞태가 영 아니더구나.”

“거짓말.”

“옆태가 고운 규수는 성질머리가 사나웠고 앞태가 고운 규수는 이미 정혼자가 있더라.”

“그래서요?”

“그래서 임을 찾으러 물어물어 봉산 땅까지 왔지.”

“치이, 오긴 뭘 와요. 눈길에 미끄러진 도련님을 제가 보쌈한 거죠.”

“보쌈? 하하하! 처녀가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그러면 안 되나요? 도련님?”

“하늘같은 서방님을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래? 우리 이쁜 색시, 이불 보쌈을 해볼까?”

승준이 난주를 덮치듯 끌어안자 그녀가 밀쳐내며 귀여운 앙탈을 부렸다.

“아유, 징그러워.”

“좋으면서?”

“싫어요.”

좁은 방 안에서 숨바꼭질 끝에 난주를 끌어안은 승준은 바삐 그녀의 옷고름을 풀었다.

곧 치마 말기에 숨어 있던 부푼 가슴이 승준의 입술을 끌어당겼다.

“아이, 그만해요.”

“많이 아파?”

“응, 너무 쓰려요.”

“처음이라 그래.”

승준의 입술은 그녀의 목덜미를 지나 쇄골로 내려갔고 점점 더 아래로 향했다.

난주가 허리를 비틀며 간지럽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다가 참지 못하고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제 조금씩 승준의 심술과 공략에 고통보다 쾌감을 느끼기 시작한 난주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승준은 또 욕심을 부렸다.

그는 집요하게 난주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핥으며 그녀를 숨막히게 했다. 마침내 난주가 항복하며 아랫도리에 힘을 빼는 순간 승준은 그녀를 뜨겁게 품었다.

난주는 파들파들 떨며 승준에게 매달렸다. 그녀가 조금씩 움찔거릴 때마다 승준은 쾌감에 겨워 미칠 것 같았다.

승준의 움직임이 맹렬해질수록 난주는 그의 목에 매달려 가쁜 숨을 토해냈고 그를 열락의 절정으로 이끌어갔다.

쾌감을 견디지 못한 난주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를 깨물었다.

“나으리…….”

“서방님이라니까.”

난주의 몸속엔 뜨거운 바다가 숨어 있었다. 그녀를 안으면 뜨거운 파도에 몸을 실은 듯 쾌감이 온몸을 감싸며 넘실거렸다.

“사랑해. 난주야.”

“서방님.”

뜨거운 두 입술이 서로의 숨결을 탐하며 떨어질 줄 몰랐다.

밖에는 함박눈이 내렸고 방 안은 두 사람의 뜨거운 열기로 새벽까지 한겨울 추위를 잊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후에도 승준은 밤마다 난주의 꿈을 꾸며 그녀와 함께할 날을 고대했다.

꿈에도 백련암에서처럼 고운 함박눈이 내렸다.

난주와 달콤하고 숨가쁜 격정의 순간이 흐른 후 승준은 난주를 안고 단꿈에 젖었다.

어느 새 속치마만 두른 난주가 끝없이 펼쳐진 눈밭을 맨발로 달려가고 있었다.

가는 발목이 부러질 듯 휘청거려 승준의 애를 태웠다.

“난주야…… 가지 마…… 난주야…… 위험해.”

승준은 꿈속에서도 난주의 뾰로통한 입술을 깨물고 싶어 목이 탔다. 그녀의 입술과 가는 목과 어깨와 겨드랑이를 당장 만질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다.

난주와 첫밤을 보낸 새벽에 승준은 난주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약속했다.

“석 달, 아니 두 달만 기다려. 부모님의 허락이 떨어지면 가마를 보낼게.”

“서방님은 안 오세요?”

“그때는 조, 아니 집안의 일이 좀 바쁠 것 같으니 집사랑 하인들을 보낼게. 서운해?”

“아, 아뇨……. 한양에서 곧 만날 텐데요.”

말은 그리해도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두 눈은 승준을 믿지 않았다. 이럴 때 난주는 꽤 약았다.

그의 품에 안길 때 아무런 조건을 걸지 않았듯 그의 품을 떠날 때도 미련이 없어 보였다.

그것이 승준의 애를 더 태웠다.

난주는 승준을 첫 남자로 선택했고 승준은 난주의 첫 남자가 되었는데 곧 난주의 버림을 받을 것 같았다.

‘난주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난주에게 아직 승준의 집안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한양의 부유한 양반가 도령으로만 얘기해 주었다. 조부가 영의정이고 부친은 병조판서고 사촌 누이가 왕비라 하면 난주는 겁이 나서 당장 도망갈 것이다.

기생의 딸로 자라서인지 난주는 눈치가 빠르고 영리했다.

처음부터 난주가 승준과 수하들의 차림새를 알아보고 잘사는 양반가 도령임을 눈치채어 경계하고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난주야, 원래 목숨을 구해 주면 그 사람도 책임져야 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낸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눈밭에서 나를 건졌잖아? 앞으로 나를 책임져라. 평생.”

“내놓을 보따리도 없네요.”

난주가 곱게 눈을 흘기며 돌아앉았다. 그린 듯 고운 옆태가 또 승준을 홀렸다.

반듯한 이마 아래 마늘쪽 같은 콧날이 선명했고 도톰한 입술이 좀 나와 있어 그의 입술을 끌어당겼다.

승준은 난주의 가느다란 발목을 잡고 어루만지며 물었다.

“막 부담되지?”

난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 하나면 과거 뒷바라지도 하겠지만 저렇게 덩치 큰 수하가 둘이나 되는데…….”

“고개 주막에 정말 덩치 큰 천 서방도 있어. 밥도 술도 남들 두 배는 먹어.”

“그럼 셋이나 데리고 다녀요?”

“우리 집 부자야. 부자가 싫어?”

“예. 기생들을 제일 천하고 우습게 대하는 사람이 한양의 부잣집 도령들이거든요.”

“난 절대 아니거든.”

“사람은 한두 번 겪어서 몰라요.”

승준은 난주의 손을 잡고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과거에 합격하면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돼.”

“벌써 이렇게 수하들 데리고 여기저기 유람을 다니는데 공부는 언제 하고 어떻게 과거에 합격해요?”

“책보따리 싸서 사찰로 들어가 석 달쯤 공부에 전념하면 초시엔 무난히 합격할 수 있을 거야.”

“초시가 애들 장난이에요? 남들은 10년을 공부해도 떨어지더라.”

“그거야 그놈들 머리가 굳어서 그렇지. 난 말랑말랑해. 만져 봐.”

승준은 난주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 무거워요.”

“목 부러지겠다. 어서 무릎을 내놓아라.”

일어서려는 난주를 싸안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드러누웠다.

“봉산에서 임자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임자’라는 소리에 난주가 기분이 좋은지 웃음소리를 냈다.

“내가 초시에 붙으면 뭘 해줄래?”

“음, 맛난 걸 해드릴게요. 뭐가 드시고 싶어요?”

“당신이 잘하는 걸로 뭐든 해줘.”

“저 음식 잘해요. 약과랑 타래과랑 깨강정이랑 다 만들어 드릴게요.”

“갑자기 잡채가 먹고 싶다.”

“그것도 만들어 줄게요. 또요?”

“지금은…… 요게 먹고 싶네.”

승준은 누운 채 난주의 볼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매실차를 마신 난주의 입술에서 매화 향이 났다.

승준은 그녀의 입술로 헤엄쳐 들어가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서둘러 다시 난주의 옷고름을 풀었고 새벽빛에 드러난 알몸이 부끄러워 난주는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난주야…….”

난주의 달콤한 향기가 승준의 코끝을 간질이는데 투박한 손이 그의 발목을 잡고 흔들었다.

승준은 짜증이 확 몰려와 이불을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