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난데없는 천둥 번개

“야! 임연이 씨 너무하는 거 아냐? 내일까지 마스터 파일을 넘겨주기로 했으면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기는 건 곤란하잖아!”

이런 반응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언제 약속 어긴 적 있었어?”

안경 너머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못된 말만 골라 하는 남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연이의 반발심을 자극했다.

“그래서 이번 한 번만이라고 양해를 구하고 있잖아.”

한마디도 지지 않고 날카롭게 대꾸하는 연이가 못마땅한 건 자온도 마찬가지였다.

“양해를 구하는 사람의 모습 같아 보이지는 않은데?”

“그럼 뭐 무릎이라도 꿇을까? 감자온 대표님, 한 번쯤은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잖아. 하루면 돼, 딱 하루라고!”

절대 지지 않겠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받아쳤다.

“이유나 좀 알자. 너답지 않게 구는 이유가 뭐야?”

자온이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으며 미간 아래 콧등을 손가락으로 쥐고 내가 얼마나 피곤한지 보기라도 하라는 듯 꾹꾹 눌렀다.

“아니 뭐 그러니까 내일이 공휴일이기도 하고… 내일 하루만 볼 수 있는 문화재가 있어서 궁금하기도 하고.”

의기양양한 태도와 달리 대답하는 모습은 영 궁색 맞아 보였다.

얘기를 듣던 자온의 눈썹이 점점 치켜 올라갔다.

“일에 빠지면 끝날 때까지 등 떠밀어도 꼼짝도 않던 애가 언제부터 공휴일을 챙겨 쉬었다고 그런 이해 불가한 변명을 하실까?”

빈정대는 자온의 말투에 화가 솟구쳤다.

“꼭 봐야 할 그림이 있어서 그런다고! 안 돼?”

“내일 꼭 봐야 하는 그림이면… 불화?”

자온의 한쪽 입꼬리가 오름과 동시에 코웃음을 터트렸다.

“훗… 그런 걸 언제든지 보겠다고 나랑 일하는 거 아니었나, 임연이 씨?”

감자온은 문화 분야 다큐멘터리는 기가 막히게 잘 찍고 잘 만들어서 서른둘의 나이에도 기고만장할 수 있는 그런 재수 없는 자식이었고 몇 년째 연이는 조형 언어에 심취해 있어서 그의 연줄이 더없이 필요했다.

“원한다면 다른 날 사찰에 촬영 요청해서 볼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우선 내일 시사는 좀 맞추자.”

“그러게 처음부터 하루 이틀 여유 잡아 달라고 요청했을 때 내 말 들어줬으면 좋았잖아!”

‘치사한 식빵 새끼! 아쉬운 놈이 우물 파는 거니까 진정하자 임연이 진정하자, 진정하자, 후….’

“네가 말만 하면 국립 박물관도 활짝 열어 준다는 거 아는데 나는 언제든지 보는 거 말고 내일만 볼 수 있는 걸 보고 싶다고. 다큐멘터리 감독 백그라운드 그런 거 없이 편하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대한민국 다큐계에서 무시 못 하는 천하의 감자온인데 하루 정도는 미뤄 줄 수 있잖아.”

이 정도로 비굴하게 엉긴다면 한 번쯤 져주는 것도 앞으로를 위해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자온이 검지로 머리를 긁적였다.

“딱 한 번이야, 다시는 이런 일로 곤란하게 하지 마. 임연이 씨 공사 구분합시다!”

‘이씨!’

드럽고 치사하고 아니 꼬아서 원… 억울하면 돈 벌라는 선배들의 말은 언제나 명언이었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맘껏 기뻐해 주는 것이 예의겠지.

“우와! 감자온 대표님 완전! 리얼! 엄청! 무지! 땡큐! 너도 잘 쉬고 모레 보자.”

폴짝폴짝 뛰어오르기까지 하며 아이처럼 기뻐하던 연이가 손을 흔들며 뛰어나갔다.

“오버하기는… 과해, 너무 과해.”

던져 뒀던 안경을 다시 끼고 편집에 집중하는 자온의 모습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연이가 힐끔 쳐다봤다.

“쳇! 재수탱이 자식. 일하는 거 보면 소름 끼치도록 냉정한 놈이 어째서 감정 조절을 못 하는지….”

“임연이 나랑 결혼하자! 결혼까지는 힘들다 싶으면 연애라도 좀 하자! 딸꾹! 너 자꾸 비싸게 구는 이유가 뭔데! 딸꾹!”

“미쳤네, 미쳤어. 우리가 결혼하면 근친상간과 다를 게 없다고!”

그리고 술김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저급한 키스….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라 표정을 구기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0년 전만 해도 시크한 자온의 매력에 연애고 사랑이고 가능했을 테지만 지랄 맞음으로 변모한 시크를 장착한 지금의 감자온과 연애를 한다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결혼은 개뿔…. 으, 언젠가 저 핫감자 놈을 짓이겨 주리라!’

감자온 말처럼 원한다면 편하게 볼 수 있는 것을 이렇게까지 무리를 해서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뭔지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격렬히 가기를 원한다는 것!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기억마저도 사라진 듯 기분이 좋아 핸드폰으로 고속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오케이! 출발 확정도 되었겠다, 이제 예매를 해야지. 서울에서 네 시간이면 오전 5시에 출발한다고 해도 9시는 돼야 도착할 텐데….”

KTX를 이용하고 싶었지만 팔공산역을 경유하지 않아 인근 지역에 내려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고 그럴 바에는 한 번에 갈 수 있는 고속버스가 낫겠다 싶었다.

“뭐야, 오전 5시 40분이 첫차라고? 구석구석 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디링.

예매 결제까지 완료했을 때 택배 배송 문자가 도착했다. 금세 화색이 도는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딱지야?”

“뭐… 생긴 게 좀 비슷하긴 하다.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택배로 도착한 상자를 열고 연이와 난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 같은 돈 185만 원에 낙찰받은 손바닥만 한 만다라가 납작한 유리 케이스에 들어 있었다. 한가운데 찍힌 인장을 중심으로 정교한 패턴이 돋보이는 원과 정사각형, 그리고 사면에 사천왕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유리 케이스를 살짝 비틀자 만다라의 실제 모습이 나타났다.

“이 도깨비 얼굴들이 부처와 보살, 우주의 진리라고?”

“도깨비 아니고 사천왕이라니까!”

“내 눈엔 그게 그거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실눈을 뜨고 그림을 뜯어보는 난희 말처럼 부처와 보살을 배치한 그림으로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규칙이 어긋나 보였다.

“요만한 종잇조각을 200만 원 가까이 주고 샀다고? 임연이 너 호갱님 맞네!”

연이의 손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손바닥만 한 만다라를 난희가 빼앗아 들었다.

“야, 조심조심! 300년이 넘었을지도 모르는 그림이라고!”

“300년이 넘은 그림이면 전해지는 기록 같은 게 있어야지 확인되지도 않은 그림을 한두 푼도 아니고….”

팔을 휘두르자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튀어 오르다 뒤집혔다.

“야, 김난희 미쳤어! 이건 만다라라고! 우주의 진리가 이 속에 모두 담겼다니까!”

놀란 연이가 떨리는 손으로 만다라를 들어 올려 조심스레 먼지를 털어냈다.

“영락없는 딱지구만 만다라는 무슨. 이 정도가 우주의 진리라면 내가 우주의 생성을 그려줄게 임연이. 네 친구 그림 그리는 사람인 거 잊었니?”

연이를 바라보는 난희의 눈빛은 흡사 아이를 야단치는 엄마의 눈동자 같았다.

“이걸 사려고 며칠을 그 고생을 한 거야? 쯧쯧, 암튼 난 좀 실망이야. 나 씻는다.”

연이의 심장에 비수를 꽂고 난희는 욕실로 들어갔다. 제작된 지 300년쯤 된 만다라를 던졌다는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지만 난희가 했던 말 중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더 속이 상했다.

작가 미상이지만 19세기 만다라로 추정된다는 매물이 경매로 나왔을 때 입찰가가 271만 원이었다. 사진으로 확인을 하면서 보통의 만다라와 달라 보여서 더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욕심이 났었지만 그래도 연이에게 271만 원은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다행히 유찰을 거듭하던 만다라의 경매가가 100만 원대로 떨어졌을 때 연이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반드시 사야만 했다. 난희 말처럼 이걸 가지기 위해 일주일을 하루걸러 밤을 새워 가며 연이가 그렇게 싫어하던 장르의 그래픽 작업을 기꺼이 했었다.

난희 말처럼 딱지같이 생겼는데 굳이 이처럼 두껍게 제작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뜯어볼까도 싶었지만 아직 원금에 대한 미련 때문에 차마 분해는 못 하겠다. 아직 실망은 이를 수 있으니까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고 만다라를 조심스럽게 다시 유리 케이스에 담아 책상 서랍에 넣었다.

룸메이트이자 20년 절친인 난희가 샤워를 끝낸 긴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싼 채 캔 맥주를 꺼냈다.

“내일 진짜 팔공산 사찰에 갈 거야? 나도 가고 싶다, 진심. 봄꽃이 흐드러졌을 텐데….”

난희가 캔 맥주 하나를 연이에게 건네고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1년 중 하루밖에 볼 수 없는 곳인데 꼭 가봐야지.”

맥주를 홀짝이며 연이가 대꾸했다.

“불화가 그렇게 좋아?”

“내가 몇 번을 말해, 불화가 아니라 그림 속에 담긴 조형 언어가 좋은 거라고! 그림 속 패턴을 읽고 의미를 풀어 가는 과정이 얼마나 소름 끼치게 멋진 경험인지 너는 모를 거야. 무엇보다 우리나라 불화에만 있다고 생각했던 문양들이 미케네 문명에서….”

“알았어 친구야. 너와 함께 그 소름 끼치는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소름 끼치게 아쉽지만 난 내일도 전시회 때문에 소름 끼치게 고된 하루가 될 것 같아서 먼저 잘게.”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난희가 의미 없이 손을 흔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여간 말 잘라먹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에이.”

혼잣말하던 연이가 노트북을 켜고 온라인 옥션에 접속했다.

누군가 낙찰 받았을 사천왕도와 신중도.

“아… 갖고 싶다.”

사천왕도는 남쪽의 증장천왕과 북쪽 다문천왕 아랫부분이 동쪽의 지국천왕과 서쪽 광목천왕에 비해 보관이 좋지 않아 색이 벗겨져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800만 원에 육박하는 가격은 제아무리 하루만 살 것처럼 살아가는 연이라 할지라도 쉽게 욕심낼 수 없었다. 최대한 확대해서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힘, 살아 있는 듯 강렬해 보이는 사신의 눈동자, 오묘한 색의 조화, 그리고 배경 전체에 가득한 영험한 문양들….

‘응?’

그림 우측 아래에 인장처럼 보이는 표식과 함께 그려진 사천왕의 얼굴 모양이 보였다.

“이런 게 있었네. 근데 어째서 이 표식들이 눈에 익은 느낌일까?”

그림 상태가 좋지 않은 남쪽과 북쪽 사천왕도에선 확인할 수 없었지만 서쪽 사천왕도에도 분명 같은 표식이 있었다.

“도장일까, 그림일까?”

불현듯 연이가 노트북을 덮었다.

조금 관심 가지고 보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을 거라는 걸 뻔히 아니까.

“안 돼 안 돼 임연이, 이만 자야 해!”

**

우르릉 쾅쾅.

이 무슨 난데없는 천둥 번개인지!

새벽부터 갑작스레 쏟아지던 거센 빗줄기는 급기야 천둥 번개까지 동원해 연이를 힘들게 했다. 택시를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평소보다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승강장에서 지붕이 없는 짧은 거리를 이동해 버스를 타는 동안 흠뻑 젖어 버렸다.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바람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불어댔다.

정차해 있는 고속버스를 타고 지정된 좌석에 앉자 5년은 늙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하아, 어째 잘 풀려 간다 싶더라니! 일기예보에도 비 소식은 없었는데….’

팔공산은 지도 아래쪽에 위치해 있으니 도착하면 날씨가 맑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져 보았지만.

빌어먹을!

네 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팔공산 터미널에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센 비가 쏟아져 내렸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사찰 주차장에는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불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은해사를 향하고 있었다. 자신처럼 목적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닐 텐데 이 날씨에 저런 정성이라니… 부처님이 감동하셔서 없던 복도 만들어 주실 듯싶었다.

좀 걷다 보니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더니 얄밉게 펼쳐진 푸른 하늘 사이로 햇살이 조심스럽게 비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