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오래된 인연
TV에선 연일 희찬의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숨겨 둔 아이의 성별부터 나이까지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했다. 팬클럽은 허위 사실 유포로 매체들을 고소한다며 방송국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안녕하십니까. 연예 와이드에서 전해 드리는 속보입니다. 연일 문제가 끊이지 않는 HC 엔터테인먼트에 또다시 잡음이 생기고 있습니다. 대표 배우인 서희찬 씨가 숨겨 둔 자녀가 있다는 사실이 인터넷 연예 포털을 통해 전해졌는데요, 새로운 대표를 맡은 박주호 씨는 내일 오후 4시 공식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전해 왔습니다. 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뚝. TV를 끈 은석이 주호와 희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네 아들이 있나?”
주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회장님 그게.”
희찬이 주호에게 눈짓을 했다.
“예.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허허.”
기막힌 상황에 은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주주들에게 했던 약속 기억하나?”
“물론입니다.”
“이 상태라면 HC 엔터 문 닫아야 할 판 아닌가? 전 대표는 재판을 앞두고 있고, 가장 큰 수익원인 배우 서희찬은 바닥으로 고꾸라지게 생겼는데 말이야.”
주먹을 쥔 희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겁니다, 회장님.”
“어떻게? 난 공수표를 아주 싫어해. 내가 쉽게 자네를 도우니까 만만해 보이는 게지? 뱉은 말 못 지키는 놈을 내가 어떻게 다루는지 서동식 대표한테 못 들었나?”
“알고 있습니다.”
희찬은 잘 알고 있었다. 기은석이 얼마나 괴물 같은 사람인지. 동식은 진짜 조심해야 할 사람은 차 대표가 아니라 기은석이라고 귀띔했었다. 기은석에게 찍히면 도망갈 구멍이 없을 거라고. 호걸이기는 하나 그는 잔인할 정도로 냉정한 인물이었다.
“아이는 누가 키우고 있지?”
“어머니가 돌보고 계십니다.”
“자네 호적에 올라있고?”
“어머니 호적에 올라 있습니다.”
은석이 날카로운 얼굴로 희찬을 응시했다.
“그럼 문제 될 거 없지 않은가, 자넨 아이가 없는 거야. 허위 기사로 피해를 본 연예인일 뿐이지. 그렇게 마무리하지.”
희찬이 잠시 침묵했다.
“아니요.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럴 순 없다?”
건조한 은석의 목소리가 서재를 메웠다.
“네. 전 국민 앞에서 아이를 부정할 순 없습니다. 그렇게 상처받도록 둘 순 없습니다.”
은석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애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제까지 왜 아이 존재를 숨긴 거지?”
잠자코 있던 주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회장님 그건 사정이,”
“조용히 해. 박주호.”
희찬이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주호를 막았다.
“제 잘못입니다…. 아이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불찰입니다.”
희찬은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점이 은석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다.
“그래 한 번 더 믿어 보지.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지 지켜보겠어. 하지만 기억하게 난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그리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말이야. 자네뿐 아니라 서동식 대표의 신의까지 걸려 있다는 걸 명심하고.”
동식의 이야기가 나오자 담담하던 희찬이 살짝 동요했다. 동식은 이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저 잘못 엮였을 뿐. 한순간에 동식과 은석의 사이까지 멀어지게 만들 수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겠습니다.”
“지켜보지.”
희찬과 주호가 인사를 하고 바삐 일어섰다. 이제부터 또다시 상황을 수습하려면 꽤나 바빠질 테니까. 은석은 서재 유리창에서 넓은 정원을 빠져나가는 희찬과 주호를 보고 있었다.
“흠, 참 아까운 눈빛이야… 볼수록 탐나는구만, 서동식이가 사람 볼 줄 아는구만.”
정원을 빠져나가는 희찬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은석에게 큰소리를 치긴 했으나 아이가 다치지 않게 상황을 수습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모두가 아이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게 뻔했다.
“형 내일 6시 30분이에요.”
“그래.”
“형이 어떤 선택을 하든 난 괜찮아요. 설령 가을이랑 지금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혼자서 저 기은석을 상대하겠다고?”
“HC 엔터에 서희찬밖에 없는 줄 알아요? 형 없어도 잘 굴러갈 테니까 걱정 마시고.”
“못 들었어? 공수표 날리면 끝장이라고.”
두 사람은 애써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풀었다. 하지만 주호의 말은 진심이었다. 희찬에게 가을이 어떤 아들인지 알기에 그의 선택을 존중할 참이었다.
“가온으로 갈 거죠?”
“아니, 지금 거기로 움직이는 건 위험해. 일단 오피스텔로 가자.”
“기자들 쫙 깔렸을 텐데?”
“누가 내 집으로 간데, 하늘이네 오피스텔로 간다고.”
“알겠어요.”
차에 탄 희찬은 가온을 나오기 전 달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분해 보였지만 상처받은 얼굴. 그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예전부터 그랬다 희찬이 무언가 욕심나는 것이 생기면 곧 부서지듯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았다. 갖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며 살았다. 화려한 스타로 살며 모든 걸 쥘 수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결심이 무너지려는 순간 또다시 그의 것이 될 수 없는 무엇이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희찬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지금은 하나만 생각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는 일.
***
“누나, 우리 아빠는 어디 갔어요?”
제법 별과 친해진 가을이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달이 내준 도넛을 먹고 있었다.
“누구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가셨어, 근데 꼬맹이 너 배 안 불러? 떡볶이를 그렇게 먹고 도넛을 또 먹어?”
가을은 아랑곳 않고 도넛을 한입 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가을이는 한국에 처음 오는 거라고 했지?”
이번엔 하나가 물었다.
아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랑 진짜 오랜만에 만나는 거겠다.”
“네에, 작년에 보고 처음이에요.”
“보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
“아빠가 돈을 벌어야 가을이랑 할머니가 빵도 사먹고 따뜻한 물로 목욕도 할 수 있거든요.”
별과 하나는 아이의 대답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
“누가 가르쳐 줬어. 그런 거?”
“할머니가요.”
“그렇구나. 할머니가 참 조기교육을, 잘 시키셨네 하하.”
가을이 고개를 돌려 거실 마루 식탁에 앉아 있는 달과 제 할머니를 봤다.
“가을아.”
그때, 별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왜요?”
“저기 말이야….”
가을이 동그란 눈으로 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가을이가 도넛을 하나 더 집어 들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엄마는 없어요….”
별이 놀라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헐… 너 내가 그거 물어보는지 어떻게 알았어?”
“다들 궁금해하니까요. 근데 엄마는, 없어요.”
“그렇구나… 미안. 누나가 오지랖이다, 진짜.”
“오지랖이 뭔데요?”
“쓸데없는 관심? 음… 아무튼 별꼴이 반쪽인 그런 거 있어.”
가을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나가 아이 입가에 묻은 도넛을 티슈를 닦아냈다.
“누나도 엄마 아빠가 없거든, 그래서 이런 질문 받으면 기분 정말 별론데, 이번 거는 별이 누나가 잘못했다 그치?”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던 가을도 하나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누나, 아빠도 없어요?”
“응, 그래도 누난 이렇게 친구도 있고, 언니도 있어서 괜찮아. 가을이 너는?”
가을이 고사리 같은 손을 하나의 손 위에 포갰다.
“나도 할머니도 있고 아빠도 있어서 괜찮아요.”
별이 애써 찡한 마음을 감추고 웃어 보였다.
“미안, 미안. 나 진짜 별로다. 사과할게. 가을아 한 번만 봐주라 응? 나 미워하지 말고.”
가을이 별과 하나를 물끄러미 봤다.
“누나들… 맘에 들어요.”
그 말에 구겨졌던 별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짜?”
“네.”
“휴우 다행이다, 고맙다. 하나 친구.”
“별말씀을.”
다행히 낯선 집에 잘 적응하는 가을을 지켜보던 정애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어렸다. 누나들과 어울려 놀던 가을을 지켜보던 정애가 고개를 돌려 한옥 내부를 살폈다. 천천히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훑는 그녀의 시선을 달도 말없이 지켜봤다.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무심코 말을 뱉은 정애가 스스로 놀라 달을 봤다.
“알고 계시는 거죠…?”
달의 말에 정애의 얼굴에 당혹감이 비췄다. 찻잔을 쥔 달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잊어버리셨나 했어요… 여기.”
한참을 가만히 있던 정애가 입을 뗐다.
“네가… 달이지…?”
“네, 맞아요.”
“여기 보자마자 너무 놀랐어… 우리 찬이가 어떻게 여길 오게 된 거니?”
달은 찻잔에 담긴 꽃잎을 손으로 톡 건드렸다.
“우연히요, 급하게 몸을 숨겨야 할 상황이 있었는데 그때 이리로 오게 됐어요.”
“하아. 이게 인연이라는 건가 보구나. 희찬이는 전혀 기억 못 하지?”
“네에. 아무것도요.”
정애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부모님은 잘 계시고?”
“네, 엄마가 많이 아프셔서 두 분 다 시골로 내려가셨어요.”
“그랬구나.”
“저, 아주머니….”
정애가 달의 말을 가로챘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부탁 웃기지만 우리 희찬이가 여길 계속 몰랐으면 좋겠어… 너희 둘 스쳐 가는 인연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달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자신이 모르는 희찬의 사연들이 궁금했지만 달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네, 그럴게요.”
“고맙구나. 아무것도 묻지 않아 줘서… 그렇게 말해 줘서.”
달은 고개를 돌려 웃고 있는 가을을 봤다. 아무리 봐도 아빠를 닮은 구석이 없었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참 곱고 예쁜 사람이었을 거다. 그러니 저렇게 예쁜 아이가 나왔겠지. 두 사람은 왜 헤어진 걸까… 아니면 헤어진 게 아닌 건가.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달은 모든 게 궁금했다. 그때 달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희찬이었다. 달은 정애를 의식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
희찬은 말이 없었다.
“가을인 잘 있어요. 밥도 잘 먹고 웃기도 하고, 어머니도 잘 계시고요.”
[그렇군. 저기…….]
희찬은 설명도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이해를 구하려는 자신이 참 이기적이라 느껴졌다.
“오고 있는 건가요?”
[오늘은 못 갈 거 같아. 따라오는 눈이 많아서.]
“…….”
[하늘이네 오피스텔로 갈 거야.]
“네, 여기는 걱정 마요. 모두 잘 있으니까.”
[내일 갈게.]
“알겠어요.”
[…….]
“끊을게요.”
희찬은 보고 싶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당장 이곳으로 달려와 달에게 다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일 뿐이었다. 달 역시 희찬이 달려와 주기를 바랐다. 당신은 나를 기억 못 하지만 나는 참으로 오랜 시간 여기서 당신을 기다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으로만 삼킬 뿐 끝내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희찬이 오늘 못 온다니?”
“네,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그렇구나. 너한테 미안하다 달아.”
“그런 생각 말고 계세요.”
“나도 이 집에 다시 오게 될지 정말 몰랐어.”
“아저씨는 잘 계신가요?”
달의 질문에 정애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신우. 이 집을 지은 대목수. 희찬의 아빠이자 정애의 남편. 달의 질문에 정애는 가슴속 깊이 묻어 둔 그 이름을 떠올렸다.
“아빠가 아직도 가끔 얘기하세요. 이 집 지을 때요, 정말 좋은 목수를 만나서 집 짓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하셨다고.”
집을 짓는 계기로 만난 두 남자는 금세 친구가 되었고 1년에 몇 번은 꼭 이 집에서 가족 모임을 했었다. 희찬의 가족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
“희찬이 아빠는, 세상에 없어.”
달의 놀란 얼굴을 보며 정애가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세상 뜬 지 꽤 지났어….”
“아… 죄송해요.”
“아니야, 괜찮아.”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당신한테 참 많은 일이 일어났구나. 일곱 살 꼬마 김달이 기억하던 열 살의 서희찬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때, 조심스럽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과 정애는 물론 마당에 있던 별과 하나도 긴장한 채 시선이 문 쪽을 향했다. 달은 빠르게 신발을 신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