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집착과 사랑의 한 끗 차이

수현이 가족을 만나러 나간 뒤, 윤봄은 집중해서 그림을 그렸다. 잠시 쉴 겸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자 전화가 왔다. 어차피 상대는 뻔했으므로 후다닥 받았다.

“응!”

- 뭐 하고 있었어.

“좀 쉬려고. 커피 마실까 했지.”

- 지금까지 작업했어?

“응. 팔꿈치, 손목, 손가락, 목, 허리, 어깨 안 아픈 데가 없어.”

칭얼거리는 윤봄의 투정을 듣고 수현이 낮게 웃었다.

- 나도 다 왔어. 5분이면 가.

“저녁을 벌써 다 먹은 거야? 엄청 빠르네.”

- 네가 눈에 밟혀서 밥이 안 넘어가더라.

“밥은 먹고 다녀야지, 이 사람아.”

- 우리 집에 가 있어. 비밀번호 065409야.

“그렇게 비밀번호 뿌려도 돼? 내가 이것저것 훔쳐 가면 어떡하려고.”

- 너라면 환영이야.

윤봄은 짧은 반바지에 박시한 티셔츠로 갈아입고 수현의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 앞에는 등기가 왔다는 우체국 안내지가 붙어 있었다. 무심하게 훑어보고 문 안쪽으로 옮겨 붙였다.

수현이 없는 그의 집은 생각보다 적막이 흘렀다. 아무도 없으니 당연한 것이었는데 조금 더 서늘했다.

“긴 바지 입을 걸 그랬나.”

다리에 들어차는 쌀쌀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으로 확인한 방문객은 수현이었다. 본인 집인데 왜 굳이 벨을 누르는 걸까?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너야?”

“응, 나야. 문 열어 줘.”

“비밀번호 까먹었어?”

“아니. 문 열어 줘.”

알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하던 수현이었으므로 이유를 묻지 않고 문을 열자, 그가 분홍색 튤립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다녀왔어, 봄아.”

“우와! 너무 예뻐! 고마워. 진짜 예쁘다.”

수현은 윤봄을 껴안고 잠시 충전의 시간을 가진 뒤, 더 스윗에서 종류별로 챙겨온 디저트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한가득 쌓인 디저트를 보며 윤봄이 입을 쩍 벌렸다.

“이걸 누가 다 먹으라고?”

“걱정하지 말고 먹어. 유통기한 넉넉하니까 내일 또 먹으면 되지.”

“그래도 아깝잖아.”

“네가 남긴 건 내가 먹을게.”

“자네가 무슨 잔반 처리반도 아니고…….”

“네가 먹다 남긴 거면 나한텐 포상이지.”

느긋하게 TV를 보며 디저트를 먹고, 뜨거운 키스도 두 번 했다. 마감이 코앞이라 더 놀고 싶은 걸 참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내일 또 볼 수 있으니까.

수현은 전화 달라는 미숙의 문자가 뒤늦게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온 데다, 다른 여자 타령을 했으니 종인은 화가 단단히 났을 것이다.

종인이 미숙을 얼마나 쪼아댔을지 알만했으나 동정하지는 않았다. 벗어날 용기가 없어 그 길을 택한 것은 미숙이었다.

- 아들, 집이야?

“네.”

- 네 아버지 화 많이 나셨어. 주말에 집에 좀 들러.

“바빠요.”

- 잠깐 들러. 할 얘기도 있고…….

“지금 하세요.”

-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구나.

“저 약혼 안 해요.”

- 얼굴 보고 얘기해, 아들.

“그래도 마찬가지예요. 알아 두세요.”

미숙의 노골적인 한숨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목을 조이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답답해서 티셔츠를 벗었다. 보이지 않는 줄이 목을 감고 있는 것 같다.

윤봄은 아침 먹으러 오라는 수현의 전화를 받고 움직였다. 이러니 마치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아 설레었다.

동욱도 잠잠하고, 수현과는 깨가 쏟아지고, 일도 순조롭게 흘러가서 몹시 즐거웠다. 요즘처럼 모든 게 잘 풀린 적이 있었던가. 걸음걸이가 여느 때보다 가벼웠다.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가자 안에서 흘러나오는 진한 냄새에 홀려 주방으로 향했다. “뭐해? 이거 그 할머니네 잔치국수 냄새 같은데?”

“맞아.”

“진짜 그거야?”

“똑같지는 않을 거야. 내가 한 건 멸치국수에 가까워.”

“수현이 너 이 녀석.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속마음이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육수의 간을 보던 수현이 씩 웃었다.

“못 하는 게 있긴 하지.”

“뭔데?”

“널 보고 참는 거.”

“언제는 잘 참는다며.”

“내가 좀 이랬다저랬다 하는 편이야.”

“언제는 한결같다며.”

“기억이 안 나는걸.”

“어휴. 말을 말자.”

수현이 최뻔뻔의 가면을 썼으므로 말장난하는 것을 관뒀다.

평온하지만 두근거리는 일상이다. 지금도 분에 넘치게 행복해서 이대로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때 분위기를 깨고 우체국 직원이 방문했다. 서류 봉투를 받아 든 수현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윤봄도 들여다보고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게 뭐야.”

“글쎄. 가정 법원에서 왔네.”

“가정 법원에서 올 게 뭐가 있지?”

수현이 대답 대신 서류를 꺼냈다. 윤봄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뒤덮여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나 혼자 보고 올게.”

서재로 들어온 수현의 눈빛이 돌변하여 차게 식었다. 조소를 머금은 채 서류를 훑었다.

동욱은 변호사까지 선임해서 소장을 보내왔다. 약혼녀인 윤봄과 수현이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큰 충격과 고통을 받았으므로, 동욱에게 위자료 3천만 원과 변호사 선임 비용을 지불하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제출한 증거에는 수현과 윤봄의 화기애애한 사진과, 동욱 앞에서 양다리임을 인정했던 녹취록이 있었다. 녹취록은 앞뒤 내용을 다 자른 짜깁기였다.

서늘한 표정을 갈무리하고 서재를 나서자 윤봄이 불안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진짜 괜찮아? 무슨 일인데? 내가 알면 안 되는 거겠지……?”

조심스레 묻는 윤봄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별일 아니야. 네가 알아 둬야 할 일이라 걱정되네.”

“왜?”

“네가 상처받을까 봐.”

윤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김동욱이야?”

“응.”

“걔가 너를 고소한 거야?”

“내가 이겨.”

“나 때문에 또…… 이상한 일을 겪네. 나 아니었으면 이런 일 안 겪었을 텐데.”

매번 그녀 때문에 안 좋은 일에 휘말리는 것 같아 면목 없었다. 이러다가 ‘나 때문에’라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 붙을 것 같다. 미안함과 분함이 뒤섞여 심장이 요동쳤다. 당장 쫓아가서 동욱의 뺨이라도 올려붙이고 싶었다.

김동욱. 이런 일을 벌여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어 주먹이 하얘질 정도로 세게 쥐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윤봄이 목을 가다듬고 씩씩하게 물었다.

“그 서류, 나도 봐도 돼?”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가 봐야 네가 이길 수 있을 거야. 말했잖아. 내가 너 지켜 준다고.”

분노로 일그러진 눈동자 속에는 당찬 포부도 담겨 있었다. 아직 수현이 ‘내 남자’라고 완전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만, 제 명예를 전부 버려서라도 수현만은 지킬 것이다.

“내 여자 친구가 제일 멋지네. 든든하고.”

윤봄은 서류를 훑어보면서 바람 빠진 한숨과 웃음을 동시에 토해냈다.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동욱과 윤봄이 사랑하는 연인이었다고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이것만 본다면 동욱의 손을 들어줄 것 같았다.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다.

“변호사 선임비는 내가 낼게.”

“나 능력 있다고 칭찬하더니 못 믿어?”

“믿어. 믿는데…….”

“처음부터 멋대로 도운 것도 나고, 애인이라고 말한 것도 나야. 그럼 나 때문이지.”

“그렇지만…….”

“그만 자책해. 당찬 여자 친구 둬서 기분 좋은데, 나를 의지해 줘. 너 좀 돕게.”

“짜증 나. 미친놈…….”

동욱을 향한 욕이 울음 섞인 목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잘 헤어졌어. 고생했다.”

수현은 윤봄을 보내고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질겼다. 그녀를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잘라내면 그만이다. 그것이 팔이라면 기꺼이 잘라 주지.

수현에게 저만 믿으라며 가슴을 탕탕 쳤지만, 그와 떨어지자마자 붕괴되려는 멘탈을 부여잡으려 애썼다.

“미친 김동욱! 미친놈! 미친놈! 이…… 욕도 아까운 새끼!”

결국 참지 못하고 분노의 톡을 보냈다.

[그만 좀 하라고! 미친놈아! 시간이 남아도냐?]

한참 뒤에야 동욱에게서 답장이 왔다.

[너야말로 그만하고 정신 차려라. 네가 그 새끼랑 정리하고 돌아오라고만 하는 것뿐이다.]

핸드폰을 던질 뻔했다. 말이 안 통한다는 걸 알면서 대화를 시도한 그녀가 바보였다.

[내 주변 사람들 그만 건드려. 한 번만 더 건드리면 내가 너 죽이고, 나도 죽을 거다.]

숱한 스토킹을 당해도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었는데, 동욱은 너무도 치졸해서 화가 났다.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자, 윤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아 노기 띤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누나, 동욱이 형이랑 헤어진 거 아니었어? 그래서 수현이 형이랑 사귀는 거 맞지.

“그건 왜.”

- 조금 전에 동욱이 형한테 만나자고 전화 왔었거든. 나 기숙사 올라왔잖아.

“그, 미친놈이…… 너한테까지 전화를 했다고?”

요동치는 심장 부근이 뻐근하게 아프다. 동욱은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건드리고 있었다.

“넌 전화를 왜 받아!”

- 킥보드도 가져갔다고 하고, 집에도 왔었다고 하니까 걱정돼서 그랬지. 누나가 형도 죽이고 누나도 자살하겠다고 했다던데.

동욱을 떠나면 불행해진다는 걸 세뇌라도 시키는 듯이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그는 사랑해서 그랬다고 부르짖었지만 그 속에서 사랑은커녕 인간다운 마음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 자식은 말을 그런 식으로 전달을 하네? 걔가 수현이 고소했더라. 너 이거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 말 안 해. 어차피 나도 방학 돼야 집에 가지. 근데 진짜야? 뭘로 고소했는데? 수현이 형을 고소할 게 있나.

“미친놈이 작정하고 미친 짓을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 후…… 그 형 왜 그러냐, 진짜.

“내가 수현이 만나는 건 어떻게 알았어?”

- 누나가 수현이 형이랑 썸 타는 거 보고, 동욱이 형이랑 헤어진 건 눈치 챘는데, 엄마가 말해주더라고.

“김동욱 상대하지 말고 그냥 차단해.”

- 누나는 괜찮아?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공부 해.”

어제까지만 해도 수현과 함께 지내는 소소한 일상이 포근하고 즐거웠다. 불안하리만치 행복했던 탓일까. 연이어 터지는 폭탄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수현도 지체 않고 변호사를 선임했다.

서른두 살의 동욱은 스물일곱 살의 수현을 뭉개고자 20대는 감당하기 힘든 ‘법’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다만 동욱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수현은 막장 드라마보다 더 심한 것들을 보고 자라서 웬만한 충격에는 면역이 있었고, 이깟 귀찮음과 비용쯤은 거뜬하게 지출할 수 있을 만큼 윤봄을 생각하는 마음이 진했다는 것이다.

윤봄은 주영과 대낮부터 동욱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마무리하려던 차에 수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다렸다는 듯 반색하며 받았다.

“다 끝났어? 잘됐어?”

- 다 했어. 뭐 하고 있었어?

“난 영구랑 술 마시고 있었지. 언제 와?”

- 거의 다 왔어. 집으로 갈까?

“응. 빨리 와.”

-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헤벌쭉 웃는 윤봄을, 주영이 입을 쩍 벌린 채 보고 있었다.

“이야…… 네가 남자한테 이런 말투 쓰는 거 처음 봐. 너 내 친구 윤봄 맞지?”

“내 말투 징그러워?”

“아니, 너무 잘 어울려서 놀랐어. 네 남자친구가 대단하긴 한가 보다. 고슴도치 같던 윤봄을 병아리로 만들다니.”

“그래, 놀리려면 놀려라.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나도 연애하면 너처럼 코맹맹이 소리 낼 수 있게 되는 건가?”

“야. 나 코 안 막혔거든?”

“양쪽이 꽉 막혔던데. 안 막힌 거면 혀가 짧아졌어?”

애교는 낯간지러워서 못하겠다며 남자 같은 말투만 고사하던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수현은 정말로 금방 왔다. 쪼르르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자마자 뛰어들었다.

갑자기 날아든 윤봄의 행동에 놀랄 만도 한데, 수현은 가뿐하게 안아들고 얼굴 곳곳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들의 진한 애정 행각을 보고 주영의 입이 턱이 빠질 정도로 벌어졌다. 솔로인 것도 서러운데 커플이 아주 염장을 지른다. 마침 콜택시도 도착했다고 하니 얼른 이곳을 떠야했다.

주영이 다가오자 수현이 윤봄에게서 떨어졌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수현 씨. 이제 제가 보이시나 봐요.”

찔리라고 쏘아붙였지만 수현은 잔잔한 미소를 띨 뿐이었다. 태연자약한 그의 모습을 보고 주영이 속으로 혀를 차며 문을 열었다.

“콜 도착했대. 나 간다.”

주영이 가고 나서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 소파에 눕기까지, 맞붙은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오늘따라 윤봄은 더욱 애타게 매달렸다. 술이 들어간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숨을 쉬기 위해 잠시 떨어졌다.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안아 줘.”

그녀가 원하는 대로 윤봄을 안아 주었다. 윤봄의 심장이 터질 듯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나의 봄은 괜찮은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수현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살폈다.

반짝반짝 빛나는 윤봄의 입술은 몹시 탐스러웠다. 계속해서 탐해도 갈증이 났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아 이를 물었다.

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윤봄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어.”

너랑.

수현의 눈이 커졌다. 평소의 그였다면 취한 윤봄을 잘 타이른 후 재웠을 것이다. 하나 수현도 그간 많이 참았고, 그만큼 쌓인 데다가, 윤봄이 먼저 원할 줄은 몰랐기에 참을성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