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봄날, 너와 나
봄이다. 코끝을 타고 들어오는 향긋한 꽃내음이 마음을 들뜨게 해준다.
윤봄은 자신의 이름과 꼭 닮은 봄을 몹시도 좋아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날의 하늘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그간 집에 처박혀 외주 일만 했다가 오랜만에 예쁘게 차려입은 모습을 애인인 동욱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외출했다.
그들은 3년 차에 접어든 연인으로, 연애 초반의 두근거림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정인지 애정인지 모를 상태로 결혼하게 된다면 전우애가 피어오르리라.
그래서 오늘은 둘 사이에 진득하게 눌러앉은 권태를 없애고자 데이트할 생각이었다.
아직까지 자고 있을 그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근처에 다다라 골목을 돌자마자 고막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이이익!
“……!”
빛을 처음 본 야생 짐승처럼 굳었다.
그녀를 들이받을 뻔했던 수현의 차도 굉음을 내며 멈췄다. 꽉 잡은 핸들 가죽이 벗겨질 지경이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린다. 맙소사, 지금 사람을 칠 뻔했다!
헐레벌떡 안전띠를 풀고 윤봄에게 달려갔다. 수현은 저보다 한참 작은 윤봄의 앳된 외모를 보고 그녀를 대학생이라고 오해했다.
“이봐요, 학생. 괜찮아요? 다친 데 없어요?”
예의상 하는 질문이었으나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뺑소니로 몰릴 수 있어 수현으로서는 꼭 해야 하는 절차였다.
“저기요. 정신 차리라고요.”
퍼뜩 정신을 차린 윤봄의 동공이 커졌다.
“아…… 죄, 죄송합니다아……!”
되는대로 말을 내뱉으며 긴장으로 굳었던 다리를 움직이자 힘이 풀려 ‘어어’ 할 틈도 없이 몸이 기울었다. 오랜만에 힐도 신고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입었는데 볼썽사납게 길바닥 위에 구르게 생겼다. 분명 얼굴부터 떨어질 테고, 그럼 못해도 코피 정도는 날 텐데. 넘어지는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을 하며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잡았다. 마침 옆에는 수현이 있어서 그의 옷자락을 잡고 버티자 함께 기울었다. 이후 꼼짝없이 바닥 위에 뒹굴 두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기우와는 달리 수현이 쯧, 혀를 차고 윤봄의 팔뚝을 잡아당기자 깃털처럼 날아서 얼굴로 수현의 명치를 정확히 가격했다.
윤봄은 “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수현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명치의 통증으로 미간을 구긴 채 윤봄을 쳐다보고는, 이내 입을 벌리고 말았다. 윤봄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윤봄도 코피가 흐르는 걸 직감하고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서로 다친 데 없는 것 같으니까 각자 갈 길 가면 되겠네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혹시 모르니 연락처는 교환하죠.”
“신고 안 해요. 번호판 같은 건 봐도 까먹어서.”
윤봄은 휴지로 콧구멍을 틀어막은 채 수현을 쳐다보고는, 입을 헤 벌리며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하얗다못해 서늘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수현은 얼핏 봐도 상당한 미남이었다. 매끄럽게 흐르는 얼굴선은 단아하기까지 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전신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그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칼로 잰 듯 직각으로 곧게 뻗은 어깨선이었다.
그녀는, 어깨 성애자였다. 확고한 취향을 갖고 있지만 현실과 타협한 뒤로 묻어 두었으나 눈앞에 펼쳐진 사내의 몸이 실로 경이로워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어…… 어깨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마구잡이로 뒤엉킨 머릿속이 안정되자 경악하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늘 처음 본 남자한테 대뜸 어깨 타령을 하다니, 그녀를 얼마나 해괴한 변태로 볼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뒷수습할 용기가 나지 않아 새빨개진 얼굴로 줄행랑을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 실례했습니다아!”
쏜살같이 사라지는 윤봄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어깨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라는 말은 칭찬에 익숙한 그에게도 생소했다.
차에 타서도 자꾸만 윤봄이 떠올랐다. 찰나에 온갖 모습을 봐서인지 활기찬 생동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온몸으로 무지갯빛의 찬란함을 내뿜고 있는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득불 우겨서라도 연락처를 받아낼 걸 그랬다. 몇 번 만나보면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음을 알고 흥미를 잃었을 텐데, 요동치는 마음을 강제로 가라앉히려니 속에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오랜만에 심장이 뜨거워졌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그랬나.”
나직하게 중얼거린 혼잣말이 퍽 우스워서 실소를 흘렸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스물일곱 살의 그는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홀려 제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고 우왕좌왕 애끓는 청춘이 아니었다. 윤봄도 어느 날의 소소한 에피소드로 치부되어 곧 사라질 것이다.
‘으아아아아! 이 미친 변태 윤보오오오옴! 돌았어, 돌았어, 돌았어, 진짜 돌았어!’
윤봄은 뇌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뱉은 말에 당황한 나머지 도망쳐 버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처음 보는 남자한테 어깨 타령을 할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창피함을 그러모아 수현의 면상에 던진 것 같다.
“진짜 돌았나 봐. 그깟 어깨가 뭐라고. 사방팔방 널린 게 어깨인데, 아오씨.”
투덜거림과 함께 동욱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별생각 없이 드나들었던 곳인데 괜히 낯설다.
“돌아갈까…….”
답장이 없는 걸로 보아 동욱은 자고 있을 테니 발길을 되돌려 가버리면 그만이다. 숱한 핑곗거리를 만들다가 한숨을 쉬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정신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되돌아왔다.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응시하며 투덜거렸다.
“오늘은 나 좀 예뻤는데 기분은 구리네. 다 잡쳤어.”
나이에 맞지 않은 외모와 말투를 가졌다는 것은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평균보다 더 작은 체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호 본능을 일으켰지만, 실상은 다혈질에 입도 거친 편이었다. 그럼에도 허당기 다분해서 남녀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 동욱과 사귀게 된 것도 대학 동기였던 그의 적극적인 구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판 모르는 타인보다 낯설다. 의견 충돌이 잦아지고 싸우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이 두꺼워졌다. 근래에는 연락도, 만남도 없이 서로의 존재를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기까지 했다.
불만이 있으면 바로 풀어야 하는 윤봄과, 참고 침묵을 고수하는 동욱은 서로 정반대이기 때문에 잘 맞았고, 그래서 이렇게 됐다. 언제 식어도 이상하지 않을 미지근한 사이.
저번 주에 싸운 뒤로 풀지 않아 일주일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간 폐인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아서 오늘은 일부러 공들여 꾸몄다. 그녀의 외모를 칭송하던 동욱이었으니 그런 제 모습을 봐서라도 풀어 줬으면 해서. 그래서 굳게 닫혀 있는 그의 입술이 열리기를.
동욱을 깨우기 위해 침실로 향했다. 이불을 돌돌 만 채 코를 골고 있는 그를 보니 맥이 풀렸다. 깨울까. 갈까. 기다릴까. 멀거니 서서 고민하다가 거실로 나왔다. 쿠션감 좋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넣고 TV를 켰다. 생활 소음이 들려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세 시간이 흘렀고, 그제야 침실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흘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오후 네 시다. 한껏 꾸미느라 아침은 당연히 걸렀고, 그와 브런치를 즐길 생각에 점심도 걸렀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배가 꼬르륵 요동쳤다. 의식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배고파졌다.
동욱이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단조롭게 물었다.
“언제 왔어?”
“아까.”
“깨우지.”
“됐어. 뭘 깨워, 또.”
무미건조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생수를 병째 마시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갑자기 울컥 짜증이 솟구쳤다. 이대로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았다. 끓어오르는 짜증을 가라앉힐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나 취직했어.”
회사 생활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큰 마음 먹고 퇴사 후 일러스트 쪽으로 전향했다. 하나 동욱의 기나긴 설득 끝에, 소위 말하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자 다시금 회사로 돌아간 것이다. 함께 밥 먹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축하받고 싶었는데 흥이 식었다.
동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디?”
“큰 데는 아니야. 경력 끊겨서 많이 쳐주지 못한다고 해서. 신입으로 가기엔 나이도 있고…….”
“연봉은?”
“몰라. 알아서 주겠지.”
“왜 몰라. 아무리 공백 있었어도 경력이면 적어도 3,500은 쳐줘야지.”
“이력서 100군데 넣었는데 그중에 연락 온 데가 세 군데 뿐이었어.”
“너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들 그 정도는 해.”
동욱은 본인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계속 질문을 던졌다. 윤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받아쳤다.
“너 지금 나 취조하냐.”
“난 네 남자 친구인데 이런 것도 못 물어봐?”
“네가 내 남자 친구면, 네가 그토록 원하던 회사를 들어갔으니 축하한다고 말해야 하는 게 먼저 아니야?”
“당연히 축하하지.”
“야, 장난해? 내가 언제 엎드려 절 받기 해달랬어?”
“아니야. 진짜 기뻐서 축하하는 거야.”
“넌 늘 그런 식이야. 내가 공모전에서 상을 타도, 자격증을 따도, 토익 점수가 올라도, 취직을 해도 늘 그랬다고.”
“내가 뭘.”
“공모전에서 상 탔을 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다음엔 대상 타야 하니까 빨리 다음 공모전 준비하라며? 축하는커녕 대상 못 탔다고 타박한 거잖아.”
“아닌 거 알잖아. 그만큼 네가 대단해서였고, 다음번에 도전하면 그때는 대상 탈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한 거였어.”
“네 마음이 그러면 뭐 하냐고! 나한텐 다그치는 거로밖에 안 느껴지는데!”
동욱이 하이힐에 발을 집어넣는 윤봄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가.”
“약속 있어.”
“그런 말 없었잖아.”
그런 말 할 시간이나 있었나? 일주일만의 첫 대화인데. 윤봄은 속으로 말을 삼키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냥 뭐, 밤에 술 약속이지.”
이번엔 동욱 쪽에서 짜증이 들끓었다. 겨우 일주일만의 재회인데 저와의 약속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가? 동욱이 불퉁하게 말했다.
“넌 꼭 통보하더라.”
윤봄은 긴 한숨을 내쉬고 단어 한 자 한 자에 힘을 주었다.
“이걸 통보라고 받아들이는 네가 이상한 거라고 생각 안 해봤어?”
“오늘 약속 있다는 걸 오늘 말하는 게 통보가 아니라고?”
“그럼 난 매번 약속 잡을 때마다 너한테 허락받아야 돼?”
“누가 허락받으래? 미리 말을 해달라는 거지.”
“이런 걸 어떻게 미리 말해? 오늘 갑자기 잡힌 약속인데.”
서로 다른 생각과 다른 대답의 공방이 이어졌다. 친구로 지낸 기간이 긴 만큼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연애 전에 쉽게 넘길 수 있던 것들이 예민하게 다가와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넌 내 생각은 안 한다는 거잖아.”
“야, 김동욱. 여기서 그런 말이 왜 나와?”
“일주일 만에 만난 거야, 우리. 너 평일에 맨날 밤샘 작업한다고 밤낮 바뀌어서 주말밖에 못 봤어.”
“그래서 나도……!”
아침부터 일어나서 새빠지게 꾸몄다고! 밥도 안 먹고! 기껏 왔더니 퍼질러 자고 있던 게 누군데? 윤봄은 꽉 쥔 주먹 위로 힘줄이 터지도록 화를 눌러 담아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그러는 너도 자고 있었잖아.”
“지금 네 시밖에 안 됐어.”
“그렇지. 해 떨어지려면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지. 여유만만이네.”
“너 원래 밤에 노는 거 좋아하잖아. 좀 늦게 나가면 어때서.”
평행선으로 이어진 생각의 차이를 좁히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이제 정말 그만할 때가 된 건가 보다. 고작 이깟 일로 헤어지냐는 잔소리를 들을 것 같은데 더는 못 하겠다. 복잡하게 어질러진 머릿속에서 가까스로 단어를 골랐다.
“헤어지자.”
미지근했던 감정이 차게 식는 건 찰나였다. 막상 입 밖으로 끄집어내니 별거 아니었다. ‘끝’이라는 종착지는 너무나 쉬웠다.
“안 돼.”
“네가 뭔데 안 된다고 해?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하는 거지.”
“안 돼.”
“자꾸 그 단어만 내뱉을 거면 더 할 말 없는 걸로 알고 갈게.”
“내가 잘할게.”
잡힌 손목이 시큰시큰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진작 잘하지 그랬니.”
“이제부터 잘할 테니까 한 번만 믿어 줘.”
“그 말도 지겹다, 정말.”
“내가 다 미안하니까 화 풀라고.”
“네 사과 받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서 끝내.”
“내가 잘하겠다고 했잖아. 화 풀어….”
“나는 지금 화난 게 아닌데 너 때문에 화가 나고 있거든. 그러니까 놔.”
윤봄의 손을 놓으면 두 번 다시 못 잡을 것 같은 두려움이 동욱을 휘감았다. 그녀가 없으면 그의 미래도 완성되지 않는다. 윤봄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김동욱. 손 놔.”
“…….”
“아프니까 놓으라고.”
“…….”
“대답 안 해?”
“…….”
“또 시작이네. 놓으라고!”
제가 불리하면 어느 때고 침묵하는 동욱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아프다고 했잖아, 이 새끼야!”
생각보다 큰 목소리에 소리를 지른 윤봄도 놀랐다. 흘끔 보니 그도 제법 놀란 것 같다. 틈을 놓치지 않고 냅다 뛰었다. 거칠게 다리를 흔들어 힐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었고 스타킹도 엉망이 되었다.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보도블록 위를 걸을수록 발바닥에 돌멩이 따위가 박혔다. 잘 신지도 않던 힐을 왜 하필 오늘 신어서 이 사단인지.
아직은 어안이 벙벙하다. 처음 보는 동욱의 눈빛도 무서웠고, 3년이란 연애의 종지부를 이렇게 찍은 것도 허무했다. 그와 쌓았던 추억들이 한꺼번에 터져서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단지 아팠다. 발바닥도, 머리도, 심장도, 손목도 전부 다 아파서 바닥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흐윽…….”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동욱의 입맛대로 변할수록 그녀를 향한 애정도 함께 커졌지만, 윤봄은 반대로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서서히 사라진 애정은 존재조차 희미해졌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