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흔한 집안 이야기

규현을 다시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서 오세….”

“오랜만이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하늘은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며 들어온 규현이 이 공간에 있다는 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늘아….”

규현의 부름이 아닌 이 공간에 항상 같이 있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안녕하세요. 하늘이랑 서울에서 같이 공부했던 진규현입니다.”

하늘이 할아버지에게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규현은 할아버지 앞으로 가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하늘을 한 번 보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래. 우리 하늘이 대학 친구라고. 대학 때 친구는 처음이네.”

다정하게 규현의 손을 잡고 쓰다듬는 할아버지 모습에 하늘은 두 사람을 갈라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짧게 끝날 수 있는 이 만남이 길어질 테니까.

“할아버지, 나 나갔다가 올게. 우리 나가서 얘기하자.”

그렇게 말을 하고는 규현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잡고 바로 나가지 못했다.

“잠시만, 할아버님. 제가 이 근처에 집을 알아보고 있거든요.”

“아! 그래서 왔구만. 우선 여기 앉아. 윤하늘? 차 좀.”

하늘은 ‘하늘부동산’ 간판이 걸린 작은 상가 안에 할아버지와 규현이 상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차를 준비하러 안쪽에 마련한 탕비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몸은 탕비실에 있지만, 귀는 두 사람의 대화를 신경 쓰고 있었다.

“자아. 그럼 이야기 좀 들어볼까?”

“제가 일 때문에 일주일에 한두 번 내려오는데 그때마다 호텔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자주 내려올 것 같아서요. 비용 면에서 호텔보다는 원룸 월세가….”

포트에 담긴 물이 끓어오르며 내는 요란한 소리 때문에 뒤의 말은 듣지 못했지만, 대충은 알 수 있었다. 하늘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유자청을 컵에 담고 물을 부었다.

“할아버지, 나 먼저 올라갈게… 요.”

“어. 나는 좀 늦는다고 해.”

“…네.”

하늘은 규현을 한 번 보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크게 한숨을 쉬고 부동산이 있는 건물 3층으로 올라갔다.

이 건물은 3층짜리 상가주택으로 1층에는 ‘하늘부동산’과 ‘동네 카페’라는 간판이 붙은 카페가 있다. 2층에는 카페 주인 부부가 사는 투룸 하나와 대학원생 부부가 사는 투룸이 있다. 그리고 3층은 하늘의 가족이 살았다. 하늘은 현관문을 잡고 또 한숨을 쉬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나중에 드신대.”

하늘이 3층에 올라온 것은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늘부동산의 점심시간은 일반 직장과는 달리 2시부터였다. 점심시간에 전화상담이나 방문 상담이 있기에 2시로 정한 것이었다. 규현이 오기 전에 3층에 올라오기 위해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규현을 보고 놀랐고 두 사람이 진지하게 집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어 피하듯 3층으로 올라온 것이었다.

“왜? 손님 오셨어?”

“…응.”

“왜? 이상한 손님이야?”

“…아니.”

한 박자씩 늦은 하늘의 대답에 할머니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살폈지만 하늘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왜? 맛이 없어 보여?”

“…어?”

“닭볶음탕이라면 배가 불러도 볶음밥까지 해달라고 하는 애가 멍하게 있잖아.”

“아….”

그제야 식탁 중앙에 놓인 닭볶음탕 냄비에 눈이 갔다. 그리고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할머니도 보였다.

“사실은… 아래 온 손님이 내가 아는 사람이야.”

“그래? 그럼 같이 올라오지. 아, 점심은 먹었겠구나.”

“그 정도로 친한 사람은 아니고….”

오늘따라 말끝이 흐려지는 하늘은 눈치가 100단, 아니 1000단은 넘는 할머니를 속이기 힘들다고 바로 느꼈다.

“할머니, 사실은 좀 친했는데 내가 여기 오면서 연락을 안 했거든. 그래서 지금은 친하다고 말하기가 좀 그래서 그래.”

“얼마나 사귀었는데?”

‘이런!’

남자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너무나 확신에 찬 할머니의 눈빛과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하늘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게, 대학 들어가고 바로 시작. 그리고 여기 오기 전… 끝.”

“음… 일 년 반을 만났네. 그런데 7년 가까이 지났는데 찾아왔다?”

“아니, 찾아온 건 아닐… 걸?”

하늘은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규현이 알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알고 찾아왔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 할아버지가 공인중개사신데 중개소 이름이 하늘부동산이야. 원래는 다른 이름인데 나 태어나고 바꾸셨대. 우리 할아버지가 나를 어… 너무 예뻐하시거든. 헤헤.’

지나가는 말로 규현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규현에게 대전이라고 말한 기억은 없었다.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알고 온 것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규현이 놀라지 않았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할머니이….”

하늘이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할머니는 급하게 나가셨다.

“망했다. 하아….”

*

하늘이 문을 닫고 나가고 나서 할아버지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규현은 바로 알아차렸다.

“우리는 주택만 주로 하고 있으니 원룸은 건너가서 알아보는 게 나을 것 같네.”

“그럼 월세 가능한 주택, 아니 전세도 상관없습니다.”

규현은 할아버지의 조금 전보다 차가워진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만 바라보았다.

“여보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리고 두 남자는 문 쪽을 바라봤다.

“어머! 하늘이 치인구?”

“아, 안녕하세요. 하늘이랑 대학에서 같이 공부한 진규현입니다.”

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지만, 할머니는 규현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래. 하늘이가 친구가 손님으로 왔다고 신경 쓰길래. 같이 점심이나….”

“여보!”

‘쓰읍.’

엄한 할아버지의 부름,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그 눈빛을 피하는 할아버지. 이 짧은 순간 규현은 두 분의 서열을 파악했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빠르게 파악했다.

“사실 어젯밤에 내려와서 일하느라 지금까지 식사를 못 하기는 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어머, 실례는 무슨. 여보도 같이 가세요. 닭볶음탕 했어요.”

“…닭볶음탕?”

규현은 어제저녁에 내려와 서류 작업을 밤늦게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아침 일찍 현장을 둘러보고 오전에 일을 마무리했다. 그랬던 이유는 단 하나, 최대한 빨리 이곳에 오고 싶어서였다. 그러니 당연히 배가 고팠다. 배고픈 상태에서 닭볶음탕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침이 고였다. 그리고 순간 갈등하는 할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다.

“할아버님, 제가 가도 될까요?”

“흐음, 같이 가지. 문단속하고 올라갈 테니 먼저 올라가.”

“알겠어요, 여보. 자, 가요.”

*

“맵지 않아요? 윤 씨들은 매운 걸 엄청 좋아해서 좀 맵게 했는데.”

“아니요. 너무 맛있습니다.”

식탁에는 네 사람이 앉아 있지만, 대화는 할머니와 규현만 하고 있었다. 하늘과 할아버지 둘 다 조용히 닭볶음탕에 집중했다. 원래라면 식탁 중앙에 있는 누가 봐도 4인분인 닭볶음탕을 두 사람이 알콩달콩 2인분씩 나누어 먹으면 되었는데 예상치 못한 한 사람이 늘어 두 사람은 불안했다.

“여보, 밥 볶을까요?”

“어? 그럼 좋지.”

할아버지와 하늘은 놀란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사실 최근 할아버지의 뱃살 문제로 밥 양이 한 공기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볶음밥이라니. 할아버지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배가 부르면 관대해지고 그것을 할머니가 48년 동안 ‘잘’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진짜 그 사람이 찾아왔다고?”

“찾아왔다라… 그런가?”

“와우… 이거 실화냐? 7년 동안 널 찾아다니다 드디어 찾은 거야?”

“이가람! 소설 쓰지 말고 술이나 마셔.”

하늘은 규현이 점심을 먹고 간 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침 어릴 적부터 친구인 가람에게 연락이 왔고 두 사람은 술 약속을 잡았다. 술 한 잔을 마신 후 가람에게 규현을 만난 이야기를 하니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 했어?”

“얘기? 그냥 밥 먹고 할아버지한테 집 부탁하고 갔어.”

“엥? 끝?”

“끝!”

진짜 규현은 배웅하는 할아버지에게 집을 부탁하고 인사를 했다. 하늘에게는 따로 인사의 말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서운하네.’

“음… 대게 소설에서 보면 이런 경우 남주는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지. 그러면 여주는 서운해하고.”

“여주라니 고맙다만, 우리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란다. 가람아.”

“소설이지. 사실 나는 내가 작가라면 너희 집 이야기 드라마로 쓰고 싶… 은 게 아니고.”

“…일반적이진 않지. 그렇다고 드라마로 쓸 만큼 재밌지는 않다.”

***

윤태석과 김순희는 한 동네 사는 사이였다. 순희의 오빠와 태석이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으니 서로의 어린 시절을 다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남자와 여자로 느끼기 시작한 것은 태석이 군대에 있을 때였다. 순희가 오빠의 부탁을 받고 위문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시작이 되어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휴가 때마다 만났다. 그리고 태석이 일자리를 잡자마자 둘은 결혼을 했다. 태석이 24살, 순희가 20살 때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지훈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