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벽이 어스름하게 올 때쯤, 피곤함에 지친 명이의 손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하아. 피곤하다. 이렇게 많은 일을 시키실 줄이야.”

손을 주물럭거리며 잠시 성문 위의 바닥에 주저앉은 사이 협문이 열리고 서가 올라왔다.

“오셨어요?”

“고생했구나. 이제 교대 군졸이 올 테니 너는 들어가 쉬어라.”

“예. 그럼 정오에 다시 오겠습니다. 어머니 기다리시겠다.”

협문으로 내려가는 명이의 팔을 잡으며 서가 물었다.

“어디로 가려고?”

“예? 집에요.”

“좌포청 옆 가택으로?”

“그럼요. 거기가 집인데요.”

얼굴이 살짝 붉히며 서가 중얼거렸다.

“아니, 정오면 다시 나와야 하는데 그렇게 멀리 가면 가고 오고하면서 시간 다 갈 텐데.”

명이가 서를 보고 같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왕자님도 쉬셔야지요. 저 있으면 방해 되실 거예요.”

“아니, 두 채가 있지 않느냐. 안채도 있고, 사랑채도 있고. 안채에서 자면 방해 안 할 테니까 자러 가도 된다.”

우물거리는 서를 보고 명이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 그럼. 먼저 동궁전으로 들어가서 쉬어도 괜찮을까요?”

서가 화색 도는 얼굴로 대답했다.

“으응! 나는 신경 쓰지 말거라. 더 정리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니 나는 나대로 사랑채로 바로 들어가련다.”

명이는 바로 인사하고 나와 동궁전으로 들어갔다.

“어후. 심장이 발발 떨려. 왜 이러지? 방 찾아 들어오신다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명이가 안채의 대청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쓰지 않아 먼지가 수북한 대청을 보고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뒤로 돌아가 부엌으로 갔다. 걸레를 들고 나와 대충 대청을 훔치니 반짝이는 나무의 결이 금세 살아났다.

“이제 됐다.”

걸레를 치우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말 아무도 쓰지 않은 듯 먼지 냄새가 살짝 났다.

“정말, 아무도 들이지 않으셨구나.”

병풍 뒤로 돌아가 다락을 열고 이불을 꺼내고는, 대청으로 들고나와 조용히 먼지를 털었다.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다시 다락에 넣고 방 안의 먼지를 닦고 나니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번 와서 잘 걸 이리 야단은. 참. 나.”

명이는 눈을 비비며 한쪽으로 걸레를 치우고 그대로 요 위에 엎어졌다. 방 안으로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잠시 후 동궁전으로 들어온 서는 달아오른 얼굴에 진땀을 닦으며 조용히 사랑채로 들어가려다 담 없이 옆에 덩그러니 서 있는 안채의 디딤돌을 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먹으로 막았다. 조용히 안 채 앞으로가 디딤돌에 놓여 있는 명이의 신을 한참 보던 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너무 기쁘구나.”

마음이 너무 설레어 사랑채로 가지 못하고 안채의 대청으로 올라가 방문에 귀를 댔다. 쌔근거리는 명이의 숨소리가 작고 작게 문틈을 타고 흘러나왔다. 서는 웃으며 일어났다.

“오늘은 반나절 재웠으니까 다음엔 하루 재울 수 있을 거야. 저녁에 한번 놀러 온다고 약조했으니.”

대청을 내려가며 서는 조용히 사랑채로 건너갔다. 대청에 목화를 벗어 두고 아쉬운 듯, 고개를 삐죽 내밀며 안채의 디딤돌을 바라봤다.

“같이 나란히 벗어두는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서는 방으로 들어가 베개를 베고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바로 건너에 명이가 자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방안으로 들어오는 햇살도 눈부시지 않았다. 오직 명이의 얼굴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이고! 이거 잠이 올까?”

서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다 다시 누웠다.

“아니지. 자야 오후 근무를 또 나가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숨만 씩씩거리다 다시 눈을 떴다.

“아! 정말 나 왜 이러지? 자야 하는데! 잠을 자야 오후에 다시 명이하고 근무하지.”

하지만 어느덧, 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슬 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냥 얼굴만 살짝 보고 오는 것뿐이니라. 그래. 잠자는 얼굴 한번 보는 것뿐이야. 그것뿐이야.”

서는 조용히 문을 열고 자신의 목화를 신었다. 안채까진 고작 다섯 걸음. 서는 크게 걸어 세 걸음 만에 안채의 디딤돌에 발을 올렸다.

“얼굴만, 얼굴만.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나는!”

서는 대청으로 올라가며 그제야 먼지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하아. 우리 명이가 이렇구나. 정말.”

조용히 걸어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방안은 온통 명이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반짝이는 햇살이 명이의 얼굴에 쏟아지고 있었다. 잠시 더운 듯, 명이가 잠든 채로 앞섬을 쥐고 흔드니 옷고름이 풀어졌다. 풀어진 앞섬을 보고 서는 그만 숨을 멈췄다.

“흡!”

손으로 입을 막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방문을 닫았다. 조용히 닫는 다는 것이 당황한 나머지 꽤 큰 소리를 내 버렸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명이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으응? 누가, 아니, 왕자님 오셨나?”

명이가 깬 줄 모르고 서는 다시 방문을 열었다. 그러다, 일어나 앉은 명이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당황한 서가 문을 닫으려다 움직이지 않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명이에게 홀린 듯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그리고 등 뒤로 문을 조용히 닫았다.

“왕자님?”

“난. 그냥 잘 자는지 얼굴만 보려고 했다.”

그러다 명이는 자신의 앞섬이 서늘한 것을 깨닫고 내려다봤다.

“어머! 어떻게 해!”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옷고름을 다시 매는 명이에게 서가 조용히 물었다.

“나갈까?”

두 손으로 앞섬을 꼭 누른 명이가 목까지 빨개져 서를 올려보았다. 서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간 햇빛에 탄 검은 피부 아래로 윤곽이 뚜렷한 턱 선과 목선이 사내다운 모습을 한 반면, 맑고 반짝이는 눈빛은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명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는 명이를 향해 서가 한 걸음씩 다가갔다. 마침내 이부자리 가장자리에 발끝이 닿으니 서는 조용히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놀란 명이가 같이 무릎 꿇으며 말했다.

“왕자님. 어이해서 무릎을 꿇으시고 그러세요!”

“아무 짓 안 할 테니 한 번만 입 맞추게 해다오.”

나직한 목소리로 서가 간곡히 말했다. 명이가 서의 얼굴을 바라보니 사내들의 욕정이 담긴 눈빛이 아닌, 아름다운 꽃을 보는 듯한 감탄의 빛이 서려 있었다.

“제가 뭐라고. 왕자님께서 이렇게 허락을 구하시는지요. 저는 천것입니다.”

“너는 나의 명이다. 첫 여인이고, 마지막 여인이길 바라는.”

명이는 서의 대답에 울컥했다.

“어찌 그리 말씀을 하십니까. 잘못하면 시집오란 소리로 착각할 것 같습니다.”

“오라면 와 줄 수는 있는 것이냐?”

“예?”

명이가 놀란 눈으로 서를 마주 보니 점점 더 가까이 오는 얼굴을 피하지도 못하고 서의 입술을 맞이했다. 뜨겁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에 명이의 심장은 더욱 심히 뛰었다. 서가 무릎을 피며 명이에게 돌진하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 그만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쿵!

“아!”

“저런! 미안하다! 미안하다!”

명이의 몸 위에서 뒷머리를 매만지며 서가 울 것 같이 미안해했다. 명이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왕자님. 성문 지키실 땐 범 같으신데, 어쩐지 지금은 아이 같으세요.”

“으응? 그런가?”

머쓱해 하며 명이 옆에 누운 서는 자신의 팔로 베개를 해 주며 말했다.

“자자. 오후에 근무 나가야 하니까.”

긴장이 풀어지니 서는 눈꺼풀이 무거웠다. 명이도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곧 두 사람은 딱 붙은 채 곤한 잠에 떨어졌다. 햇살이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서가 잠꼬대로 중얼거렸다.

“숙직은 아무나 못 한다.”

****

해가 뜨자 유아는 독칠로부터 조사서를 받아 말에 올랐다.

“수고했네. 그대는 천천히 좌포청으로 올라오라 하셨네.”

“하이고, 그럼 잠이나 실컷 자고 올라가렵니다.”

독칠이 집청으로 사라지고 나서 유아는 적량이 같이 조용히 관아를 떠났다.

“천풍이라는 자가 우릴 따라 한양으로 올라 까요?”

“이미 시작된 일이다. 그리고 언제나 조정에 반대하는 이들은 있어왔지 명분만 달랐을 뿐이지. 여기에 있든지 한양에 있든지 상관없이 하나의 거대한 조직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구나.”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머뭇거리는 적량을 보고 유아가 물었다.

“아까부터 뭘 그리 우물쭈물하느냐?”

“정말, 세자저하께서 대장을 내보내실까요?”

“걱정되느냐?”

“실은 좌익이 허첨 대장은 오랫동안 전하를 보필하셨던 분이라 걱정되진 않는데, 우익위는 오랫동안 비어 있다 대장님 오시니까 좋습니다. 며칠 되진 않았어도 정말 대장님 믿고 따르고 싶은데요. 왜 자꾸 저하께서 그러시는지.”

그저 웃는 유아의 모습에 적량은 한숨을 쉬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실력으로는 대장님 쫓아올 사람 없는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자꾸나. 아마 우릴 쫓는다면 너를 세자저하로 알고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

“으힉! 그럴 순 없지요! 끼럇!”

적량이 말을 몰아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자 유아도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시원한 벌판에 말발굽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

“세자저하. 우익위 당도했습니다.”

영춘헌의 뜰에서 유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곁의 적량은 속이 울렁거리는지 끊임없이 올라오는 토악질을 참는 중이었다.

“어우. 대장님하고 다시는 같이 말 안 달릴래요. 꾸웩! 소문만 들었지, 정말. 하아. 영의정 대감님이 무섭습니다.”

타탁! 문이 성급히 열렸다. 꽤나 큰 소리에 주변에 있던 내관과 궁녀들이 흠칫 놀라 문이 열린 방에 시선이 쏠렸다. 도가 퀭한 눈으로 대청을 뛰어나와 뜰로 내려왔다. 내려오긴 서둘러 내려와 놓고는 유아 앞에서 영 폼을 못 잡고 서성였다. 유아가 물었다.

“저하. 올라오는 사이 이상한 기척이나 미행은 없었습니다. 보고드릴 사항은 이것이 모두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우웁!”

얼굴이 창백한 적량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듯 도는 유아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세자저하?”

“어어! 그래. 가서 쉬어라.”

“예.”

“아니, 우익위 말고 적량만. 우익위는 나하고 잠시 할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적량이 가고 나자 유아가 말했다.

“독칠의 검안서를 보고하고 나서 우익위를 나가겠습니다.”

“아니. 그대로 해도 좋다. 내가 허락하겠다.”

유아가 잠시 도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하루사이에 왜 마음을 바꾸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도가 진지한 표정으로 주변의 궁녀와 내관을 물렸다. 조용한 영춘헌의 뜰에서 도의 굵고 나직한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 나왔다.

“너의 남자가 되고 싶구나. 방법은 모르지만, 너의 뜻을 존중하는 게 첫걸음일 것 같아서.”

작은 바람 한 점이 둘 사이를 지나갔다. 유아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일 년간 세자저하의 곁에 머물게 된 것을 허락받았으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