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 뵙습니다, 박 대감님.”

주건의 시선이 마당으로 쏠렸다. 다른 모든 이들의 시선 역시 마당으로 쏠렸다. 인명대군이 언제 왔는지 조용히 서 있었다. 나매가 같이 와 있었다.

“인명군 나리. 오셨습니까.”

체건이 일어났다. 대청에 있던 모두가 일어났다. 인명군이라는 이름에 박 대감 역시 일어나고 있었지만,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저는 박 대감님을 알고 있습니다만, 대감님께서 저를 보시는 것은 처음이시지요?”

사람 좋게 웃으며 인명군이 대청으로 올라섰다.

“무언가 좋은 소식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제가 온 때가 기쁨을 그르친 건 아닌지요. 일단 축하하네, 포도대장.”

음식을 다 치운 후, 방에서 나와 앉아 있는 번희를 번갈아 보며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인명군과 나매가 자리를 같이하자 모두 자리에 앉았다. 체건이 옆의 번희 손을 잡고 말을 시작했다.

“저의 청에 모두 자리를 같이해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지금 이렇게 모두 모이시게 된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피동현의 비녀 이야기로 시작된 체건의 말은 밤이 깊고 새벽이 되도록 이어졌다. 인명군이 박 대감을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어머니가 자리를 지키도록 해 드리는 게 영의정을 견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말씀, 맞게 알아들었습니까?”

이양건 대감이 대답했다.

“그렇지요, 마마. 그 일을 여기 박 대감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홍 내관 또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전마마의 안위는 누가 지켜 드리지요?”

인명군의 말에 나매가 물었다.

“여전히 세자께서 계시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중전마마께선 안전할 것입니다. 문제는 영의정 대감이 일을 얼마나 키우느냐에 따라 흔들릴 수 있긴 하지요. 그래서 영의정이 더 크게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누르거나 막는 것이 중전마마의 안위에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매의 혜안에 박 대감이 감탄했다.

“이렇게 사리에 밝은데 어이 그대는 상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여인 된 몸으로 조선에서 일을 하며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이 있었다면 상단을 꾸렸겠지만, 저는 돈이 없는 양반집 여식이었기에 궁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박 대감이 아깝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참으로 아깝군. 하긴, 우리 타내도 후궁으로 들어갔다면 사랑받고 살긴 했겠지만 무슨 즐거움이 있었을까 싶네. 지금 생각하니, 다만 가문의 영광뿐인 게지.”

푸르스름한 여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체건이 말했다.

“이번 일은 십 팔 년 전의 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그들의 탐욕으로 부모를 잃은 사람도 있고”

모두의 시선이 번희를 향했다.

“또한 딸을 잃으신 분도 계십니다.”

박 대감을 향해 위로의 눈빛을 보냈다. 인명군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나매는 그런 인명군을 보며 안쓰러워했다. 홍 내관 역시 촉촉한 눈으로 박 대감을 봤다.

“상관도 없는 사람을 그는 해치려 했고”

주건이 분한 얼굴로 보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판의금부사가 보금을 바라보았다. 영의정을 생각하니 괘씸한 마음이 올라왔다.

“검계를 보내 내 딸을 해치려 하지요.”

이양건 대감이 판의금부사의 등을 토닥였다. 장건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아픔으로 인연이 되었지만, 전하의 십팔 년 숙원인 외척 제거는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경연날,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도록 힘내 주십시오.”

체건의 말을 끝나면서 더 밝은 새벽의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름의 매미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오늘도 나는 금오를 만나러 갈 거야. 너도 같이 가자.”

“어쩌면 좋아요, 아씨. 저는 마님 심부름을 가야 해요. 내일 가시면 안돼요?”

“오늘도 금오가 나온다고 했단 말이야. 내가 안 가면 실망하지 않겠어?”

아침부터 심부름 가는 여종을 붙잡고 같이 가자고 실랑이하던 미치는 결국 혼자 가기로 결심했다.

“어쩔 수 없지. 혼자 가야지, 뭐.”

“요즘 도성이 시끄럽다고 하던데요. 조심 하세요, 아씨.”

대문을 나서는 여종이 미치를 향해 말하고는 곧장 사라졌다.

“갈 거야. 오늘도 정오. 좋았어.”

기대감에 하루 종일 마당을 서성이다 참지 못하고 얼른 쓰개치마를 쥐고 안채를 나가는 미치의 소리에 안방 문이 열렸다.

“쟤가 도대체 어제도 늦더니, 오늘은 어디 가는 거야? 설마, 사내라도 사귀었나?”

미치의 어미는 급히 문을 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긴. 친구라도 있어야 불러서 집 안에 머물라고 하지. 아무도 못 만나게 하시니 애가 저 성격에 갑갑해서 어떻게 붙어 있겠어.”

미치의 어미는 미치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다 사랑채에서 낯선 사내 하나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혹시 유씨가 왔나?”

만억과 유씨가 온 줄 알고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미치의 어미가 몸을 대문 안으로 숨겼다.

“호위 무사들을 다 빼앗기고 나니 악만 남는구나. 그래도 네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영의정이 사내의 등을 툭툭 치니 사내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제가 없는 사이에 그 큰일을 당하셨다니 괜히 자리를 비웠나 싶습니다. 이제 염려 마십시오. 이번에 제대로 끝내고 오겠습니다.”

“부탁하네.”

검을 한 번 더 꽉 쥔 사내의 손엔, 가운데 손가락 두 개가 없었다. 영의정은 뒤돌아서다 안채의 소대문이 열린 것을 보았다.

“미치가 아침부터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이군. 이렇게 산만서야 어디 어염집 조강지처나 하겠나.”

영의정이 못마땅하게 말하며 안채 쪽으로 다가갔다.

“계금아. 있느냐?”

미치의 어미가 문에서 가능한 먼 담 쪽으로 몸을 옮기고 대답했다.

“예에! 나리! 화단에서 꽃 보고 있사옵니다!”

****

주막의 마당 한가운데 대청에는 밤새 같이 술을 마신 최 종사관과 김 종사관, 그리고 박 종사관이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리슬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예쁜 날 두고 땀내 나는 사내들끼리 엉겨 자다니. 이게 뭐야! 일어나세요, 서방님! 해가 중천이예요!”

눈을 비비며 일어난 박 종사관이 툴툴거렸다.

“서방님이 뭐야, 서방님이.”

그때 한 사내가 주막으로 들어왔다.

“손님이다. 얼른 일어나세요! 두 분을 빨리 가시고, 서방님은 뭐 드실건지 좀 물어보세요!”

최 종사관과 김 종사관이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자리를 비켰다. 그들이 일어난 자리에 앉은 사내는 곁으로 다가온 박 종사관에게 말했다.

“여기 국밥 하나 주시오. 술 한 병도 부탁하오.”

“예, 예!”

대답을 하고 돌아서던 박 종사관이 멈칫했다 다시 움직였다. 김 종사관과 최 종사관이 주막을 나서며 손을 흔들었다. 박 종사관은 같이 손을 흔들고 리슬에게 국밥을 하나 푸라고 시켰다. 상을 받아 나르며 박 종사관이 리슬과 눈을 마주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 들어온 녀석, 이상한 말이나 행동 보면 바로 나한테 이야기해. 알았지?”

“어머~흥미진진해라. 이번에도 뭐 하나 걸리면 또 사례금 받는 거예요?”

“그래. 사례금 얼른 모아서 남은 여생 부자로 살아. 몸 고생 하지 말고.”

상을 가져다준 박 종사관은 아까 봤던 사내의 손을 눈치채지 않게 슬며시 다시 봤다.

‘가운데 손가락이 두 개가 없군. 그런데도 그 손으로 검을 잡고 다닌 다라. 검으로 먹고사는 놈이로군.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

“그럼 다녀올게.”

“잠을 못 주무셔서 걱정입니다, 서방님.”

주건이 보금을 보며 웃었다.

“하나도 안 피곤해. 이따 저녁에 누이 안고 푹 쉬면 풀리겠지.”

“저녁에요?”

“아이 먼저 갖자고 했잖아? 그럼 당장 오늘이어야지!”

“하지만, 밤새들은 이야기를 생각하면 조금 미뤄야 하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보금의 말에 주건이 당장 정색을 했다.

“보금아. 나는 언제나 나랏일을 하는데, 주로 하는 게 검 쓰고 죄인들 상대하는 일이야.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다음에 맡게 될 의금부 일이 이것보다 안전하거나 더 편하다거나 한다는 보장이 없어. 전쟁이 날 수도 있지. 그래서 한 달 뒤나 오늘이나 나는 똑같애. 하지만.”

주건이 웃었다.

“그게 더 좋다면, 나는 당연히 보금이 말대로.”

둘이 손잡고 나란히 대문으로 걸어갔다. 판의금부사와 장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올게.”

세 명이 말을 타고 출발하자 보금은 대문을 닫으며 붉어진 얼굴로 옆의 박씨를 봤다.

“저,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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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덧에 먹지도 못한 채 한숨도 잠을 안잔 번희는 체건의 품에 안겨 사랑채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늘은 방 밖으로 나오지 말거라. 어머니께서 오신다 하셨느니라.”

“병 걸린 것도 아닌데, 조금 움직이면 안 될까요?”

번희는 자신을 만나러 청해당으로 올 미치가 기억났다. 체건이 강경하게 말했다.

“아니 된다. 마당 정도는 괜찮지만 나가는 것은 참아다오. 어제처럼 배가 아파 주저앉거나 미끄러지면 어찌하느냐? 다칠까 걱정된다.”

보료위에 조심히 번희를 눕히며 체건은 이불을 다락에서 꺼내와 덮어 주었다.

“아이는 네가 안전해야 건강히 태어나는 것 아니겠느냐.”

체건이 번희의 이마를 쓰다듬고는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이런 기쁜 날이 내게 왔는지 꿈만 같구나. 나는 너 하나로도 벅차게 기뻤거늘, 너는 내게 더 행복하라고 아이까지 주는구나.”

체건의 번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일단 자거라. 움직이고 싶으면 조그만 움직이고. 빠르게 걷는 것도 아니 된다. 높은 곳은 아예 쳐다보지도 말거라. 내 틈틈이 보러 오마.”

입맞춤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잔소리를 자장가 삼아 슬슬 번희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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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도 훨씬 되기 전부터 불탄 청해당을 와서 기웃거리는 미치가 신경 쓰여 칠구는 몽우를 파는 것을 멈췄다. 안 그래도 밤새 들어오지 않은 체건과 번희를 염려하고 있었는데, 미치까지 와서 근심을 보태고 있었다. 보따리를 다시 꾸리는 칠구를 보며 미치가 질색했다.

“쥔장! 어이 벌써 장사를 접는가!”

“제가 오늘 일이 좀 있습니다. 그러니 아씨도 얼른 들어가시지요.”

울상이 되어 버린 미치의 얼굴을 보며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급히 미치가 엽전을 꺼내 내밀며 칠구를 잡았다.

“그러지 말고, 내게 책 한권 파시게. 그 남은 책도 다 팔고 가면 아니 되겠나?”

“죄송합니다, 아씨. 차라리 제가 한권 그냥 드리겠습니다.”

몽우를 미치에게 안기며 칠구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칠구를 보며 미치가 멍한 표정을 짓다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칠구의 뒤를 쫓아갔다.

“분명, 쥔장은 금오가 사는 곳을 알거야. 내가 쥔장 사는 곳을 알아두면 나중에라도 연락을 남길 수 있겠지!”

더운 여름날의 더운 햇빛 아래, 쓰개치마를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미치는 칠구를 놓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