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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체건의 두 손으로 말에서 내려진 번희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대문을 들어가려니 체건이 슬쩍 말을 걸었다.
“손만 닿으면 그리 부끄럽더냐?”
누가 들었을까 놀란 번희가 조마조마한 심장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자신에게 관심 있는 사람들은 없어 보이는 듯했다. 아침부터 진한 농담으로 자신을 긴장시키는 체건이 얄미워 번희는 슬쩍 눈을 흘겼다. 체건은 아무 상관 없이 그저 웃고 있었다.
“나리. 제가 당황하고 부끄러운 하는 것이 즐거우세요?”
남들 듣지 못하게 작게 입을 조물 거리며 말하자, 체건의 시선이 자신의 입술로 쏠리는 것을 느껴 번희는 다시금 얼굴이 후끈해졌다. 잠시 헛기침을 한 체건이 말을 군졸에게 넘기고 등채를 쥐며 조용히 화답했다.
“너니까 내가 즐거운 것 아니겠느냐.”
귓바퀴가 붉어진 체건이 뒷짐을 지고 포도청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번희는 그런 체건의 뒷모습을 보며 홀리듯 대문 앞으로 들어갔다.
“으읍!”
진한 피비린내에 번희는 입을 틀어막았다. 포도청은 잡힌 검계들의 고함과 비명소리가 가득해 마치 전쟁터 같았다. 모두 형장에 몰려 있어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나 많은 피가 흙 속에 파고들었는지 알고도 남을 것 같았다. 체건은 집무실로 향하다 말고 다시 번희에게 돌아와 말했다.
“내, 확실히 말해 두는데, 형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거라.”
체건은 번희를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멀리서 박 종사관이 다리를 절며 다가오고 있었다. 황 의원의 잔소리가 들렸다.
“어허! 박 종사관! 그렇게 다니면 꿰맨 곳이 터지지 않는가!”
급히 걷다 걸음을 멈춘 박 종사관이 번희를 보고 싱긋 웃더니 체건을 향해 넙죽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저 노친네 잔소리 때문에 오늘은 좀 앉아 있어야겠습니다, 나리.”
“그리하게.”
청사로 나오는 황 의원과 뜰에 서 있던 번희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백발의 노인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경건함이 풍겨져 나왔다. 번희는 황 의원을 보고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어요, 어르신. 포도청 다모 번희라 하옵니다.”
인사를 하고 나니 체건이 한없이 다정한 표정으로 번희를 보고 있었다. 번희는 눈으로 황 의원을 가리키며 체건에게 눈치를 줬다. 그제야 체건은 웃음을 지우고 황 의원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여창은 어떠한지요.”
“오늘만 넘기면 되네. 그 사람보다 아기와 부인이 더 걱정이야. 저러다 쓰러지겠네.”
황 의원의 말에 번희는 보금이 밤에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판의금부사 나리의 위험에 결국 화병을 얻어 돌아가셨다지. 여창의 부인에게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포도대장 나리. 제가 그 여인과 아이 곁에 있어도 될까요?”
“그리해 주면 고맙겠구나. 그럼 어르신. 조심히 들어가시지요. 최 종사관, 어르신 모셔다드리고 오게나.”
“예. 가시지요, 의원 나리!”
최 종사관과 함께 나가던 황 의원이 번희를 지나치다 다시 뒤돌아보며 자상한 웃음으로 물었다.
“처자 이름이 번희라고?”
“예, 어르신.”
“아주 귀한 관상이군. 가문을 일으켜 세우겠어. 허허허.”
백발의 노인을 그렇게 번희를 지나쳐 문을 나갔다. 가문을 일으켜 세운다고? 번희는 황 의원의 말을 자신도 모르게 되내었다. 다만 그 집안이 체건의 가문인지, 원래 자신의 가문인지 알 길 없을 뿐이었다. 체건이 집무실 문을 열며 다시금 차가운 표정의 포도대장으로 돌아갔다. 집무실 안엔 김 종사관이 이미 들어가 있었다.
“김 종사관, 오후에 죄인들에게 형을 바로 집행하겠다. 포도청 안에서 필요 없이 형장이 목도되는 일 없도록 단속하고, 대문 밖으로는 일반 백성들이 겁먹지 않도록 방을 써 붙이도록 해라.”
“예. 방은 이미 써 놨습죠. 나리. 아이고~오늘도 바쁘다, 바빠.”
집무실의 문을 열면서 번희를 흘끗 본 체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의 미소를 본 번희의 마음은 은근한 설레임과 든든함이 솟아올랐다. 그가 곧 집무실 안으로 사라지면서 포도청은 다시금 죄인이 가득한 곳으로 바뀌었다. 정신 차린 번희가 바쁘게 대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 김 종사관을 잡고 물었다.
“종사관 나리! 그, 여인과 아이는 어디에 있어요?”
“아아~! 여창네 가족? 지금 옥사 검시소 안에 있다. 가 보거라.”
“왜 검시소에 있어요?”
“천오작이 습관적으로 데려간 거 아닐까? 지금 곁에 붙어 있어야 하니까.”
“그래도 가족이 있는데. 청사에 방이 아직 많이 남았는걸요!”
“네가 봐서 어째야 하는지 결정하거라.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 못한 것도 있어.”
옥사로 들어간 번희는 그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며칠째 같이 지내고 있었지만, 유난히 오늘 아침은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아프고 미안했다. 검계들의 습격으로 집을 잃은 그들은 간신히 먹는 것만 해결하면서도 포도청의 일을 돕고 감사해하며 웃고 있었다.
‘내가 너무 편한 것에 길들여져 있었어. 어릴 때부터 어머니도 그렇게 나를 보호하셨고, 지금은 나리가 곁에 계셔서 작은 상처 하나 안 나게 해 주시는데. 부끄럽다.’
번희가 손매를 걷어 올리며 검시소 안으로 들어갔다. 후덥한 공기와 함께 땀을 흘리며 울고 있는 아이가 그 어미의 품에서 바둥거리고 있었다. 여창은 아직 눈을 못 뜨고 있었다.
“천오작 아저씨! 좀 더 밝고 깨끗한 방으로 옮기시는 게 어때요?”
“그럼 좋지! 내가 정신없어 데리고 들어와 버렸다. 알아볼 여유가 없었어. 그런데 방이 있어?”
“제가 포도대장 나리께 부탁드려 볼게요, 잠시만 계셔요!”
나가려는 번희의 눈이 여창의 부인과 부딪혔다. 번희가 먼저 다가가 어색하지만 진심을 담아 그녀의 손등을 감쌌다.
“군졸 나리는 괜찮으실 거예요. 나리 덕에 우리 모두가 살았어요. 그 은혜를 베푸신 만큼 복도 많이 받으실 테니 우리 같이 힘내요!”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번희의 얼굴을 보며 눈물을 참던 여창의 부인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으흑…! 고맙습니다…!”
“우… 우엥!”
엄마가 울자 아이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나가 번희가 체건의 집무실로 향했다.
“나리!”
숨이 차 뛰어 들어간 번희의 눈엔, 집무실 해주반 앞에서 조사서를 보고 있는 체건이 들어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반듯한 콧날과 시원한 이마가 그 위의 전립과 어우러져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포도대장의 기백을 보이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체건의 수려함에 번희가 할 말을 잊은 채 문간에 서 있었다. 고개를 돌린 체건은 번희를 보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건이 오는 것을 보고 번희가 급히 문을 닫았다. 언제나처럼 갑자기 다가오는 그가 또 어떻게 자신을 매만질지 모를 긴장감이 일어났다.
“어이 그렇게 숨이 차느냐?”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체건의 얼굴이 다가올수록 번희의 심장은 더욱 설렜다. 또한 그가 다가올수록 번희의 고개는 위로 점점 올라갔다. 봐도 봐도 큰 키의 사내였다. 번희가 체건의 얼굴을 바로 올려보며 말했다.
“저, 나리. 여창 군졸님이 옥사 검시소에 계십니다. 좀 더 깨끗한 청사의 저쪽 끝 방으로 모셔도 될까요? 부인과 아이가 같이 있는데 과히 편해 보이지가 않아서요. 아까 방, 허락해 주신건 기억 하시죠?”
간절하게 말하는 번희에게 체건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보느라 고개 한껏 뒤로 젖혀진 번희를 보는 그의 얼굴엔 미소가 만개했다.
“네가 그렇다면 그리해 줘야지. 내가 미리 신경 쓰지 못했구나.”
체건의 가벼운 입맞춤이 번희의 콧등에 내려왔다. 번희는 순간적인 그의 다가섬에 눈앞이 아찔해 눈을 감고 말았다. 문 닫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너는 내게 익숙해지려나?”
작게 속삭이는 체건의 귓속말에 번희는 다시금 온 얼굴이 붉어졌다.
“하하하하! 네가 이러니 내가 너를 놀리지 못하면 하루가 즐겁지 않구나!”
“나리!”
놀림당한 듯한 기분에 번희가 볼을 감싸고 집무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뒤에서 번희의 허리를 낚아챈 체건이 번희의 뱃살을 조물 거리며 말했다.
“일이 끝나면 바로 가택으로 돌아가거라. 형장이 끔찍할 것이다. 그리고, 밤엔 먼저 자 두는 것이 어떠하냐? 새벽에 너를 찾아 들어가면, 내 너를 재우지 못할 것이다.”
체건이 번희의 배를 감싼 손을 거두며, 앞의 문을 바로 열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체건은 다시 근엄한 표정의 포도대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거기, 네 명! 지금 다모를 쫓아 옥사로 가라! 여창을 청사 끝 방으로 옮기고 그의 부인과 아이 역시 같이 지낼 수 있도록 하거라!”
“예!”
체건의 명령에 군졸 네 명이 청사 앞으로 몰려들었다. 체건을 향해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온 번희의 얼굴은 더운 여름날,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일한 아낙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포도청으로 부랴부랴 뛰어가는 언년이 뒤로 비가 휘파람을 불며 느리게 걷고 있었다. 포도청 담벼락의 모퉁이를 돌던 언년이가 갑자기 입을 막고 구토를 했다.
“우읍!”
깜짝 놀란 비가 언년이를 향해 뛰어갔다. 언년이의 얼굴은 하얗게 핏기가 없었다. 계속해서 해 대는 헛구역질에 비가 언년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물었다.
-혹시. 벌써 애기가 생긴 거야?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비의 팔뚝을 언년이가 있는 힘껏 때렸다. 찰싹!
-왜 때려!
“무슨 소리야! 지금 이 냄새, 넌 괜찮아?”
코를 들어 비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니 과연 언년이의 말대로 붉은 비린내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언년이는 다시금 코를 손으로 쥐고 눈물을 글썽이며 비를 봤다.
“우엑! 정말 힘들다. 어떻게 넌 아무렇지 않아?”
그제야 비는 피비린내를 맡았다. 불현 듯, 비의 눈엔 두려움과 슬픔이 하나 가득 올라왔다. 그리고 천천히 그날을 상기하며 언년이에게 말했다.
-그날은 이보다 백배는 더 했거든. 난, 봤어.
****
아침부터 주건과 같이 대문을 들어선 보금에 가노들은 살짝 놀란 얼굴로 서로 쳐다보았다.
“그리 볼 것 없소. 간밤에 급히 피난 갔다 온 것이니.”
새초롬하게 말하고 들어가는 보금 뒤로 고양이를 듬뿍 안은 주건이 들어서자 늙은 가노가 다가왔다.
“제가 들겠습니다, 나리.”
“아니오. 내가 직접 데려다주고 오리다.”
“의관에 털이.”
“그깟 털이 설마 누이의 기분보다 중하겠소?”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싱긋 웃으며 들어가는 주건을 보고 하인들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거 참. 생기기도 잘 생기셨는데 성격도 좋으시네. 복숭아집 도령이시지?”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해마다 복숭아 가지고 오셨는데, 아가씨하고는 올해 처음 본 것 같습니다?”
“웬일로 아가씨가 고양이를 다른 사람에 맡기셨대요?”
하인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주건은 안채로 쫓아 들어갔다.
“누이!”
대청으로 올라가려던 보금이 우뚝 자리에 섰다. 뒤를 돌아보는 얼굴이 과히 달가워 보이지는 않았다.
“왜 그러시오? 차라도 한잔 대접받으려는 마음이라면, 나는 그런 것 모르니 그냥 가시오.”
고양이에게도 신경을 안 쓰는 듯한 보금의 말에 주건은 슬쩍 마음이 상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지난번엔 고양이를 엄청 아끼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왜 상관도 안 하는 거지, 누이?”
보금의 이마가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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