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자 앞에서 허첨은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세자는 허첨이 전한 체건의 말을 아주 만족한 듯 곱씹었다.

“최고의 선물.”

체건이 말하는 최고의 선물은 자신의 즉위와 직결된 것이라고 세자는 확신했다. 허첨은 세자가 만족한 표정을 보며 이체건이 세자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래, 자네가 포도대장을 만나보니 어떻든가?”

세자가 어른스럽게 말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명장 중의 한 명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지. 수고했네. 물러가게.”

허첨이 물러가자 세자는 나매를 불렀다. 나매가 도착하자 세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네는 나의 왕권이 위태하다면, 어떻게 할 텐가?”

나매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세자저하를 충심으로 돕겠습니다.”

“고맙네. 그 마음 계속되길 바라네. 가 보게.”

나매가 동궁전을 나오자 금미가 어디에 있었는지 밝은 얼굴로 뛰어왔다.

“마마! 정말 감사드려요!”

“뭐가?”

금미가 그녀의 팔짱을 끼며 얼굴을 어깨에 비볐다.

“흐응! 서래가 중궁전에서 나왔어요. 딴 곳으로 옮긴대요!”

‘일찍 손 쓰셨군.’

“고마우면, 우리 금미. 내 심부름 하나 할까?”

“그럼요!”

“인명군 나리께서 궁에 들어오시면 이걸 전해 드리거라.”

작은 서찰 하나를 품에서 꺼내 금미의 손에 주었다.

“물어보신 질문의 답을 적어 두었다고 말씀드리면 아실 게다.”

“답이요?”

“그래. 답.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답변이라고.”

부제조 상궁은 궁금해하는 금미를 보내고 다시 내전 창고를 둘러보러 몸을 돌렸다.

****

해가 지자 박 종사관은 기찰군관을 데리고 서인출의 집의 담을 타고 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 방해도 없이 대문으로 나왔다. 기찰군관도, 박 종사관도 자루를 어깨에 하나씩 메고 있었다.

“벌써 끝났어?”

“어? 김 종사관이 여긴 어인 일이야?”

“나는 뒤질 일이 있어. 어여 가.”

“대문으로 그냥 들어가. 하인도 하나도 없어.”

“그 새 돈줄이 끊겼군.”

김 종사관이 기찰군관을 데리고 들어가면서 박 종사관은 말을 타고 빠르게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집안은 적막하게 컸다.

“이렇게 누리고 살다 벌 받은 게지. 진짜 돈줄이 누군 줄 몰랐구먼.”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져 들어간 김 종사관은 오래지 않아 서책 한권과 서찰 몇 장을 덜렁거리며 들고 나왔다.

“여기 있어. 돌아간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사랑채에서 나온 기찰군관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찾으셨습니까?”

“원래 죄짓고 사는 놈들은 죄를 깔고 자거든. 보료 아래에 그냥 있더라고.”

“우리는 문갑을 부수고 있었는데요.”

“그런 데는 칠구 같이 자기 집 지키는 데 도가 튼 놈들이 정리해서 넣는 곳이야.”

김 종사관이 기찰군관들을 데리고 말을 달리니, 자루를 안장 뒤에 얹고 달리는 박 종사관이 곧 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그들과 엎치락뒤치락 하며 놀듯이 피동현으로 내리 달렸다.

****

“언년아. 어리도 허락했으니 오늘부터 번희네로 가 있거라.”

“예? 갑자기 왜요?”

“번희를 관아에서 보호하던 일은 끝났어. 번희는 집으로 돌아갈 거란다.”

“그럼 저는 갈 필요 없잖아요.”

수령의 말에 불만스럽게 대꾸하는 언년이를 보고 번희가 말했다.

“같이 가. 우리 집 넓어. 너 없으면 적적해서 밤에 심심해.”

번희가 언년이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못이기는 척, 언년이가 인심 쓰듯 말했다.

“하긴, 우리는 같이 밤을 보내는 사이니까.”

그 말에 속이 찔리기는 했지만, 번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니거 내거 가려가며 짐 싸자. 우린 피를 한 방울도 나누지 않은 자매잖아.”

번희가 언년이의 평소 말투를 따라 하자 언년이가 깔깔대며 웃었다.

“요고, 이 언니 말까지 따라 하다니. 좋았어. 수령님, 짐이 좀 되는데요, 잘생긴 포졸 오라버니 있으면 좀 빌려주세요.”

“내가 도와주지, 뭐. 흠흠.”

“어리 아줌마 보러 가시는 거 다 알거든요.”

수령은 못 들은 척하며 동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허. 날씨가 이렇게 덥네~~~!”

번희는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간 자기 방처럼 쓰느라 이것저것 많은 짐들이 놓여 있었다. 체건의 전대를 만들고 남은 남색 비단이 방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문갑 위로 경대와 바느질 바구니 같은 잘잘한 물건들이 보였다. 나리 처음 뵌 때가 복사꽃 필 때였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한 계절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희는 언년이를 돌아봤다.

“언년아. 우리 계절 하나 보내면서 별일이 다 있었다, 그치?”

“그러게나. 남들 평생 못 겪을 일은 아주 보따리 째 만났지.”

언년이도 콧잔등이 시큰한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번희는 자신 때문에 언년이가 피해를 입은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어린 시절, 꿀떡을 같이 나눠 먹던 미단이도 그리웠다.

“미단이는 어떻게 됐을까?”

“말 꺼내지 마. 니 마음만 아파.”

“응.”

방을 정리하고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체건이 보따리를 안고 신을 신는 번희에게 다가왔다.

“조심히 들어가거라.”

“예, 나리.”

“저도 갑니다, 나리.”

언년이가 인사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번희는 뒤에서 살짝 자신을 잡는 체건의 손가락에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몹시 아쉬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와 같은 심정이실까?

“반드시 방은 너 혼자 쓰거라. 아니면, 밤에 사랑채로 보쌈해 가겠다.”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체건은 번희를 놓았다. 자신을 한시도 놓기 싫어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를 올려다보며 번희가 웃었다. 왠지 그가 계속 담을 넘게 하기는 싫었다.

“나리. 어머니께 말씀드려 아예 사랑채에 나리 물건을 가져다 놓을까요?”

뜻밖의 말이었는지, 체건이 잠시 멍하고 있다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기쁜 이야기는 태어나서 처음 듣는구나!”

“그렇게 기뻐하시니 꼭 이뤄 드릴게요.”

번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는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체건에게 가까이 얼굴을 대라는 손짓을 했다.

“할 이야기가 더 있느냐?”

얼굴을 내리며 체건이 말하는 순간 번희가 체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댔다. 촉.하는 소리와 함께 놀란 체건이 잠시 멈칫하고, 번희는 바람처럼 몸을 돌려 언년이를 불렀다.

“같이 가!”

어쩐 일인지 남아있는 체건의 뺨이 약간 더운 듯 붉어져 있었다.

****

“우리 아가!”

어리가 번희를 맞이했다. 같이 온 언년이를 안으며서도 몹시 기쁜지 얼굴을 수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수령님 얼굴도 제 얼굴처럼 한번 쓰다듬어 주세요. 아주 날아 오셨다니까요.”

언년이의 말에 수령은 얼굴이 빨개졌다.

“너, 나한테 왜 이래!”

당황한 수령의 얼굴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이미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모두 안채의 대청으로 들어가는 와중에 번희는 체건이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것을. 저녁은 누가 챙겨 드리지? 뭘 드시려나.

눈이 담으로 향했다.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오늘도 뵐 수 있긴 하지. 번희는 조용히 신을 벗고 대청위로 올라갔다.

****

체건은 바삐 상엿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김 종사관이 건네준 원래의 사건 보고서와 함께 제조 상궁이 서인겸에게 쓴 서찰을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제조 상궁을 믿지 않았던 듯, 중요한 내용을 적은 서찰 몇 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들키면 자신도 위험한데, 제조 상궁이 더 위험했던가 봅니다.”

김 종사관이 체건과 같이 상엿집으로 가고 있었다.

“거참. 지독한 집이예요. 친구 죽음을 팔아서 뇌물 받고, 손녀는 생각시로 입궁시키고. 서인출 부부는 딸이 보낸 돈이랑 제조 상궁이 준 패물가지고 뻔뻔하게 누리고 살고.”

체건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자신을 늙은 무당에게 팔았던 친부를 생각했다. 한때는 원망했지만, 지금은 차라리 팔려갔기에 더 좋은 기회를 얻어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기묘한 인연이지. 모든 일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같이 공존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상엿집에 들어가니 겁에 질린 부부가 체건을 보고 빌기 시작했다.

“나리, 나리!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다 하겠으니 목숨만 살려 주세요!”

눈물, 콧물 다 쏟으며 말하는 서인출을 보는 체건의 눈빛이 싸늘했다.

“아이고, 저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저 아버님이 받으신 걸로 먹고 산 것뿐입니다.”

서인출의 부인이 말했다. 체건이 가지고 있는 등채를 있는 힘껏 거머쥐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쏟아지려 했다.

“입 다물어.”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에 서인출 부부는 말을 멈췄다.

“묻는 말 이외에 입을 열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상엿집 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평소보다 훨씬 무거운 얼굴로 체건이 물었다.

“아리라는 궁녀나 자네들 딸인가?”

“예.”

“어째서 내쫓았지?”

“세자저하와 정을 통했다 해서 그랬습니다.”

체건이 조롱하듯 입술 한 쪽을 올렸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위험할까 봐 딸을 내 쳤군. 친구를 내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인걸.”

비꼬는 말투가 칼처럼 예리했다.

“제조 상궁이 아리라는 당신 딸의 안부와 곧 빈이 될지도 모른다고 적었더군. 궁녀는 기본적으로 상감마마의 여인일세. 알고는 있겠지?”

“그, 그건! 그냥 잘 지낸다는 말로만 이해했습니다!”

“이건 역모지. 제조 상궁이 세자저하를 위험에 빠트리려는 역모를 꾸몄고, 자네들은 거기에 가담했네.”

“역모라니요!”

“기분 어떤가? 십 팔 년 전처럼, 자네의 9족이 한 날 다 참형을 당하게 됐는데.”

쿵. 소리와 함께 서인출의 부인이 눈을 뒤집고 쓰러지면서 묶여 있던 의자가 같이 소리를 내며 바닥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