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벽이 되어서도 관아는 부산했다. 계속되는 사건 속에 고을은 어수선했고, 끝내는 허 대감 집이 불타는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관아의 몇몇만 빼고는. 초검을 마치고 수령과 체건, 김 종사관, 그리고 박 종사관이 시신 앞에 서 있었다.

“결론적으로 허 대감 집 여식이 아닙니다.”

김 종사관이 검안을 다시 살펴보며 말했다.

“하인들 말로는 미단이란 아가씨는 엄지손가락이 우렁손톱이랍니다. 그런데 이 시신은 딱 봐도 길고 가늘어요.”

“그렇다면,”

“꽃분이란 하녀의 신체 특징과 비교해 봤나?”

“예. 왼쪽에 덧니가 있다고 했는데 일치합니다.”

“사인은?”

“교살입니다.”

체건이 말없이 시신을 내려봤다. 치밀한 범죄자가 한 명 더 생긴 듯했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면 우리도 아마 속았을 수도 있지. 골치 아프게 됐군.”

수령이 물었다.

“그럼, 꽃분이가 죽고 허 대감 집 여식은 도망간 걸까요?”

“그랬겠지. 먼저 목 졸라 죽이고 불을 놓은 다음 매달았을 거야. 몹시 서둘렀어. 하인들이 와서 대피하라는 말을 하게끔 하고는 그들을 다 내보내고 실행했을 테니까.”

체건의 말에 수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럴 애가 아니었는데.”

“사람이 끝까지 몰리면 원망할 것을 찾는 법이지요.”

김 종사관이 검안서를 덮으며 기지개를 켰다.

“이 일은 여기 있는 우리만 알고, 고을 사람들에겐 허 대감 집 여식이 죽은 걸로 하게. 꽃분이는 연고자가 없으니 도망갔다고 대충 소문내고. 우리가 속은 것처럼 알리도록 해.”

****

수령이 관아로 돌아와 조사서를 꾸미고 잠시 나온 대청에서 국수 그릇을 닦는 소리가 들렸다. 관아의 주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어리가 같이 그릇을 닦고 있었다. 수령이 소매부리를 걷어 올리더니 주방으로 냉큼 들어갔다.

“어리! 아직 그렇게 무리하면 안 돼. 내가 할 테니 들어가시게!”

“나리. 남들이 저를 욕합니다. 여자들끼리 그냥 밤새 수다 떨게 놔두시고 들어가 쉬시지요.”

웃으며 문간을 막고 툭 밀쳐내자 수령은 풀 죽은 얼굴로 뒤돌아서다 다시 한번 돌아봤다.

“안돼요, 나리. 그렇게 측은하게 보셔도 손에 물 묻게 해드릴 순 없습니다.”

수령이 뒤돌아 나가자 관아 주방을 보고 서 있는 체건을 보고 어리가 번희를 부르려 하니 체건이 손을 내 저었다. 그리고 뒤돌아 동헌의 집무실로 향했다.

“수령! 그릇 못 닦았으니 다시 들어가 사건 조사서나 정리하게.”

수령이 먼저 들어가자 체건이 살짝 주방 모퉁이 그늘에 와서 어리에게 번희를 불러 달라 눈짓을 했다. 나가보라는 어리의 말에 번희는 행주로 손을 닦으며 문턱을 넘어 모퉁이로 돌아서자 체건이 대뜸 얼굴을 들이댔다. 깜짝 놀라는 번희의 얼굴에 홍조가 올라왔다.

“그래. 이래야 번희지. 오늘 내아 뜰을 거니는 것은 이번 한양 다녀온 다음에 같이 하자꾸나.”

고개 숙인 채로 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체건은 그늘로 번희를 끌어당겼다. 누가 볼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번희의 뺨에 체건이 조용히 입술을 눌렀다, 따뜻한 체온이 번희의 뺨에 남도록.

“이번엔, 동네 어귀가 아니라 내 방에서 기다려주는 건 어떠하냐. 나는 새벽에 도착하려는데.”

체건은 속삭임을 남기고 동헌의 집무실로 성큼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등을 보며 번희가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톡톡 쳤다.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눈엔 살포시 눈물이 맺혔다.

“시보다 나리의 말씀이 슬픔 잊는 데는 훨씬 좋군요.”

늦은 새벽까지 관아 주방의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집무실에서 울리는 체건과 수령의 말소리가 서로 대화하듯 내아의 뜰로 흘러들었다.

****

아침부터 경빈은 얼굴 가득 화가 나 있었다.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나까지 대비마마께 불려가게 만들어! 어제 그런 이야길 들었으면 이곳엘 오지 말았어야지!”

자존심이 상해 제조 상궁을 향해 쏟아내는 말이 험해지고 있었다.

“중궁전 일도 못하게 자넬 부르는 거 아니냐며 내게 핀잔을 주셨어!”

“하오나 마마. 워낙 시급한 일이나 뵙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중하다 여겼사옵니다. 부디 화를 푸시옵소서.”

“무슨 일이 그리 시급해? 일은 그르친 건 오래고 수습도 못 하고 있으면서.”

“좌포청 포도대장 이체건 영감이 세자마마 편으로 돌아선 것 같습니다.”

경빈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드러났다. 화만 내던 말투가 신중하게 바뀌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이체건이가 세자 편으로 돌아섰다니!”

“틀림없습니다, 마마.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의 일을 방해할 까닭이 없습니다.”

제조 상궁은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며 경빈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경빈의 꽉 쥔 주먹이 경상을 내리쳤다. 놓여있던 서책이 잠시 흔들렸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지?”

“얼마 전, 용머리 비녀를 가져오기 위해 사람을 보냈습니다. 첫 번째는 가지고 나오다 잡혔는데 그때 그를 친 것이 이체건 영감입니다. 그때의 목격자를 처리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그도 역시 실패한 듯합니다. 들어온 소식으로는 목격자를 그 고을의 관아에서 보호하고 있다 합니다. 이러니 이체건 영감이 세자의 편을 들어 비녀 사건을 철저히 쥐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어딜 봐서 세자 편이라는 건가? 그들도 목격자를 죽이면 그만 아닌가?”

“하오나 처음부터 모든 일을 소상히 알고 있는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사건은 덮을 수 없사옵니다.”

경빈이 마땅치 않은 듯 혀를 끌끌 차며 나무랐다.

“일을 왜 그리 서둘렀어! 차라리 없었던 일로 하고 손을 떼시게! 안 그래도 인명군이 며칠 전 이체건을 만난 모양이던데. 기방에서 만난 건 또 뭐고!”

경상을 툭툭 치는 손길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무슨 일로 포도대장 나리와 인명군 나리가 만나셨다 하십니까?”

“그걸 이야기 안 하니 내가 다 답답해. 그 후론 바쁘다면서 아예 궁엘 들어오지 않으니 얼굴도 못 보고 있잖나!”

체건과 인명군이 만났다? 왜?

“혹, 그 이 열 문제로.”

“그 치 이름은 입에도 담지 마! 문중 인간도 아니니까. 아버지는 늙은 나이에 왜 그리 여색은 밝히셔서. 에이! 쯧쯧쯧!”

“마마, 제가 다시 소상히 알아보고 소식 올리겠나이다.”

“알았네. 그리고 당분간 발걸음 하지 말게. 중궁전에 있어야 할 사람이 자꾸 이곳을 드나들면 안 좋을 수 있으니.”

“예. 마마.”

제조 상궁이 나간 후 경빈은 가까운 궁녀를 불렀다.

“지금 외전으로 달려가 좌의정 대감이 입궁하셨는지 알아보고, 들어오셨거든 잠시 내가 뵙고 싶다 하거라.”

“예, 마마.”

궁녀가 나가자 경빈은 경상에 놓여있던 서책을 뚫어지게 노려보다 찢기 시작했다. 찢긴 책장이 수북해지자 그제야 기분이 풀린 얼굴로 말했다.

“차나 가져오너라.”

****

새벽부터 출발한 체건과 두 종사관이 궁에 도착하기 전 세자를 만나기 위해 나매는 먼저 동궁으로 향했다. 들어가면서 나매는 생각했다. 지난번처럼 충분히 그들을 잠시 보낼 수 있으리라. 세자는 그들이 지난번 다녀가고 나서 읽지 않을 책들과 먹지 않는 음식들을 처분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다시는 책과 음식으로 동궁전을 비우지 말라는 웃지 못할 농담을 기억하면서 나매는 세자의 거처인 자선당으로 향했다.

“세자저하 계시냐? 내가 왔다 말씀 올려다오.”

“마마께선 잠시 휴식을 위해 금원으로 나가셨습니다.”

문 앞에 있던 나인 하나가 말했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예. 중전마마께서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혹, 상궁 마마께서 오시거든 먼저 들어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나인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나매는 조심히 문턱을 넘었다. 언제나 정갈하고 언제나 반듯한 방의 모습 속에 서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나매는 세자가 서책을 올려놓은 경상 앞에서 옆으로 비껴 앉았다. 그런데 사선으로 보이는 경상 모서리를 지난 시선 끝에 꾸러미 하나가 눈에 걸렸다. 평소 자신이 앉은 자리에선 볼 수 없는 방의 모서리 중 끝이었다. 나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분명 남색의 비단 꾸러미였다. 지난번 좌포청 포도대장 이체건이 들고 와 되돌려 놓은 용 머리 비녀일터.

'어째서 저 귀한 걸 쑤셔 넣어두셨지?'

그러고 보니 자신이 관리하는 내전 창고에 새로 추가되어 보관 한 비녀가 없었다. 나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궁궐의 여인들만 할 수 있는 귀한 비녀를 왜 아직도 세자저하가 저렇게 구석에 숨기듯 가지고 계시지?

“세자저하께선 언제 오신다더냐?”

“정오까진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내가 너무 일찍 온 것 아니냐. 나갔다 다시 오마.”

나매는 그길로 내전 창고에 갔다.

“이럴 수가!”

이상한 일이었다. 물품 장부에 용 머리 비녀는 두 개였고, 그 두 개 다 보관 중이었다. 나간 적이 없었다. 나간 적이 없으니 되돌아올 물품도 없는 거였다. 나매는 걸음을 재촉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엄한 왕의 보물창고였다. 나매는 비녀가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단 두 개의 비녀가 만들어진 그대로 작은 함에 담겨 봉해져 있었다. 뜯지 않은 채였다.

“그럼, 그 비녀는 뭐지?”

나매는 심장의 두근거렸다. 뭔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았다. 궁에서 무언가 모르는 일이 생긴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현기증이 일어 몸을 휘청였다.

일단 체건 일행을 맞이해야 하므로 나매는 동궁전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체건이란 남자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다만, 그것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가문의 몰락을 가져오는 일이 아니기를 빌 뿐이었다.

****

체건의 일행이 동궁에 들어가니 이극문 앞에서 나매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포도대장 나리. 두 종사관분들도 다시 뵈니 심히 반가운 따름입니다.”

나매를 따라 세자의 거처로 들어가니 지난번과 같이 세자가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시게들. 지난번엔 차 한잔 못 주고 보내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은 서로 빈손이니 차는 마실 수 있겠군.”

향이 좋은 찻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 무엇이 급해 이리 달려왔나?”

“그 사건 이후 다시 자객이 들었습니다. 지난사건의 목격자를 노린 범행이었습니다.”

찻잔을 들던 세자의 손이 멈췄다.

“사건의 목격자?”

“아예 덮으려는 시도 같습니다. 그리 보면 그 세력이 애초에 비녀에 관련된 일의 시작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매는 그가 제조 상궁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체건의 날카로운 상황판단에 놀라는 한편, 과연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마무리하려는 걸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자객도 처리했고, 목격자도 보호했으면 손을 떼는 게 맞을 텐데. 그는 특별히 세자를 보필하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포도대장. 지난번 말한 바와 같이 이 사건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자신, 여전한 거지?”

세자의 물음에 체건이 대답했다.

“예.”

단호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매는 여전히 체건이 이 사건에서 무엇을 얻으려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출세라면 이미 보장되었다. 세자가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준다고 약속한 것은 왕위에 등극했을 때 영의정 자리라도 줄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왜 계속 마무리하겠다는 것일까.

세자와 체건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음을 서로 아는 듯 체건이 예를 차려 인사하자 잘 가라는 조용한 말로 만남을 끝냈다. 앞으로 보고할 일이 생기면 편안하게 찾아오라는 호의도 같이 내려졌다. 동궁을 완전히 나서자 나매에게 체건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