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제일 크나큰 시련

“누구냐니.”

“…….”

“내게 말한 것이야?”

“네.”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운이 담담히 답했다. 설의 가슴이 쿵 하고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그때 설의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왕녀님…?”

들려오는 목소리에 설이 뒤를 돌아보았다. 리하였다.

“양리하.”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어야지, 리하의 눈이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방금.”

설이 리하의 말에 답하고 있는 사이 운은 리하의 옆으로 향했다. 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운…?”

“저분은… 누구십니까?”

운은 설의 부름을 무시한 채 리하에게 물었다.

“왕녀님이십니다.”

“아…….”

운이 인상을 어그러뜨리며 흠칫거렸다.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설은 알 턱이 없었다.

“그럼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누십시오.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리하가 슬픈 눈으로 운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설의 내면에서 올라온다.

리하가 나가고 운과 설, 단둘이 처소에 남았다.

“운아,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네.”

운의 대답에 설의 가슴이 한 번 더 덜컥 내려앉았다. 설은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겨우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난 이 나라의 제1 왕녀이고 너의 혼약자야.”

“…….”

“난 네 정인이야.”

제발 기억해줘, 설이 간절히 빌었다.

그렇지만 그 바람을 뭉개버리듯, 운이 가소로운 웃음을 지었다.

“좋으시겠습니다.”

“…뭐?”

“전 왕녀님의 모든 것을 빼앗고 왕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니까요.”

“지금 뭐라고….”

전 왕녀라니? 설이 의아해하며 운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깊지만 영혼 없는 텅 빈 눈동자로, 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공허한 눈동자 때문에 설의 마음도 공허해졌다.

“원래 그 자리, 당신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운은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버리는 말들을 흘리는 모습이 전혀 그와 같지 않았기에,

“저 또한 당신의 것이 아니었고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됐습니다.”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운이 설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설은 한동안 운의 처소에 멍하니 있었다.

***

내가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설이 제 처소로 돌아와 머리를 부여잡으며 생각에 잠겼다.

영침독에 의해 잠든 운이 깨어나면서 기억을 몽땅 잃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아까 그가 내뱉었던 말 중에 이해가 가는 것이 없었기에 설은 혼란에 빠졌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는데, 누군가 설의 처소에 들어왔다.

“왕녀님.”

리하가 설을 부르며 다가왔다. 왜인지 꽤나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운이 왜 저러는지 너는 아느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글쎄요?”

리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의 물음에 답했다.

“하지만 사실이지 않습니까?”

“……?”

“제 자리였던 것을 빼앗으신 건 맞지요.”

“네 짓이로구나.”

설의 은안이 살벌하게 빛나자 리하가 흠칫거렸다. 그렇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엔 뻔뻔한 표정이 드러났다.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군요.”

“대체 운에게 무슨 말을 지껄인 것이냐.”

“그저 사실을 이야기해 줬을 뿐입니다.”

리하는 제 선홍빛 머리를 넘기며 웃음을 흘렸다.

“청소를 하러 왔는데… 왕녀님의 기분을 보아하니 다음에 하러 와야겠습니다.”

“양리하!”

설이 리하를 향해 소리쳤지만 리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 그거 아십니까, 왕녀님.”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설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리하를 바라보았다.

“궁의 나인 중에서 누군가 영침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면, 운에게 독을 먹인 진범을 잡았단 말이냐?”

“아뇨. 그 나인은 도무지 왜 자신에게 영침독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발뺌 중이옵니다.”

“그 나인을 직접 봐야겠다. 어디에 있느냐?”

“궁 안 옥사에 잡혀있으니 가시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설은 리하를 지나쳐 나갔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굴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 유설.”

홀로 남은 리하가 중얼거리며 설의 보석함을 열었다.

전에 숨겨두었던 영침독이 담긴 병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리하는 그 병을 꺼내어 설의 침소 밑으로 병을 굴렀다.

데구루루, 병이 구르다 멈추는 소리가 리하의 귓가에 맴돈다.

“난 모든 것을 되찾을 거야.”

왕녀의 자리도, 구운도 전부 자신이 가져가겠다고 다짐하는 리하였다.

곧 있으면 다른 나인들이 이곳을 청소하러 올 것이다. 리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처소를 나갔다.

부디 날 살려둔 것을 후회하게 할 것이야.

리하가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

“고개를 들어라.”

옥사 안에서 쭈그리고 있던 나인에게 설이 말했다. 설의 목소리에 나인이 고개를 들었다.

전에 리하에게 타박을 주었던, 제일 직위가 높은 나인이었다.

“왕녀 저하!”

“네가 독을 가지고 있었다 들었다.”

“왕녀 저하, 소인을 믿어주시옵소서! 어째서 제 장롱에 그 독이 있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일이다?”

“예, 왕녀님! 부디 믿어주십시오!”

겁먹은 나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넙죽 엎드렸다.

“혹시 배후가 있는 것은 아니냐.”

나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앞에 있는 나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턱이 없었다. 설이 고민에 빠지던 와중에 궁내부 병사들이 설에게 다가왔다.

“왕녀님,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설의 양쪽 팔을 붙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실례하겠습니다.”

그들은 설을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

설이 끌려온 곳은 설해국의 국왕, 온의 앞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신들이 하나같이 설을 응시하며, 저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유독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설이 고개를 돌렸다. 운의 고모부가 설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 조용.”

웅성거리는 대신들을 온이 조용히 시켰다.

“왕녀는 과인의 물음에 사실대로 답하라.”

무슨 상황인가 싶어 설이 아무 말 없이 온의 은안을 응시했다.

“좀 전에 왕녀의 침소에서 영침독이 발견되었다. 그곳을 청소하던 나인들이 발견했다지.”

조용했던 대신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온이 다시 그들을 쏘아보자 대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어찌 영침독이 그곳에 있었는지 고하여라.”

“저는 모르는 일이옵니다.”

“사실대로 말하라 했다.”

“정말 모르는 일이옵니다.”

험악한 얼굴로 온이 다그쳤지만, 설은 대답은 확고했다. 그곳에 있던 운의 고모부가 보다 못해 설에게 직접 소리쳤다.

“왕녀 저하의 처소에 독이! 영침독이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조카를 잃을 뻔했던지라 설을 향한 그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 보였다.

“왕녀께서 제 조카를 영원히 잠들게 하려 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설도 인상을 구기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 이미 그곳의 대부분은 설을 범인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국왕 전하, 저는 억울하옵니다. 제가 제 혼약자에게 어찌 저런 것을 먹이겠습니까!”

진심으로 분노한 설이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왕녀.”

온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설을 불렀다.

“그대가 결백하다면 곧 풀려날 것이다.”

“전하!!”

“왕녀를 냉궁에 가두고 심문하여라.”

병사들이 다시 설을 붙잡았다.

“놓아라!”

설이 병사들을 뿌리치며 회의장이 떠나갈 듯 크게 소리쳤다.

“내 발로 갈 것이니.”

설이 먼저 냉궁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떼었다. 병사들이 안절부절못하며 그 뒤를 따랐다.

***

같은 시각, 운은 궁 안의 이곳저곳을 거닐고 있었다.

별일 없는 하루였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왕녀라는 그 여인을 보고난 후부터 그랬다.

그 왕녀는 왜 나를 보면서 그리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운이 생각했다.

‘내 마음이 이리 아픈 것은… 그녀의 표정이 아파서였나.’

설해국의 제1 왕녀라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윽고 바늘에 찔린 것처럼 심장이 따끔거렸다.

애틋하게 따가운 느낌, 제 심장이 느낀 것은 그런 느낌이었다.

리하의 말대로라면 왕녀는 사랑하던 리하와 운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한데, 어째서 이리 애틋하게 아파져 온단 말인가.

그녀의 은빛 눈은 어찌도 그리 슬퍼 보였단 말인가.

‘원망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가슴이 아파야 정상일 텐데.’

운은 제가 착각을 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원망 섞인 감정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여전히 운의 가슴은 원망과는 거리가 멀게, 쿵쿵 뛰었다.

운은 마음이 착잡해지자 항상 가지고 다닌 손수건을 꺼냈다.

설이 청혼하며 주었던, 아름다운 겨울 꽃이 수 놓여 있는 손수건이었지만 운의 머리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착잡한 순간순간마다, 이 손수건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대체 무엇을 잊어버리고 있는 걸까.’

가슴으로만 기억하는 무언가를 머리도 빨리 기억해내길, 운이 간절히 바랐다.

***

설은 차가운 냉궁에서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내 인생은 왜 이러는 거지.’

온 세상의 불운이 다 저에게로 쏟아진 것 같았다. 힘겹게 본국으로 돌아왔더니 맞이하는 것은 기억을 잃은 정인이라니. 설의 치맛자락에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운만을 갈망하며 겨우 이곳까지 왔는데, 현재 상황이 너무나도 서글펐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가 나를 보지 않는다.

이를 직접 느끼니 심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홍화국 국왕의 심정이 이랬을까.’

환이 저를 보며 이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그리 생각하니 그에 대한 설의 마음이 조금은 측은해진다.

‘이환, 그자도 불쌍하기 짝이 없구나.’

잠깐의 연민 속에서 이환, 그를 떠올려버렸다. 그렇지만 곧 설은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누가 누구더러 불쌍하다는 건지.’

항상 고된 시련을 겪어왔던 설이지만 이번 시련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시련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겨울에 피는 꽃이 되어 주리란 그 약속을 지켜내야 하는데 이 상황에서 그 약속을 어떻게 지켜내야 할지도 모르겠는 설이다.

이 시련 속에서 어찌 피어나야 할까, 냉궁 속에서 설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우선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 누군지 알아내야 하는데….’

초조함 속에서도 설의 머리는 팽팽히 돌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설에겐 범인은, 리하였다.

***

보름달이 걸린 밤, 궁궐 안 은밀한 곳에서 운과 리하가 남몰래 만났다.

리하는 세상 행복한 듯이 운에게 안겼다. 제 품에 안긴 리하의 선홍빛 머리칼을 운이 어루만졌다.

따듯한 손길로 리하를 다루고 있는 그의 표정은, 손길과는 다르게 매우 무덤덤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기억을 잃기 전 저가 사랑한 여인이라 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리하에 대한 감정이 돌아올 것이라고 운은 굳게 믿었다.

사실을 알아볼 방법은 많았으나 운은 그러지 않았다. 현 왕녀가 어찌 지금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궁에서 금기시되어있다고, 리하가 운에게 신신당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가 제 편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기억을 잃은 운에게 혼란스러운 것이 너무 많은지라 운은 우선은 그저 리하의 말을 믿기로 했다.

리하가 제품을 파고드는 지금도 운은 리하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저기….”

“네, 도련님.”

그의 품에서 리하가 행복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말씀해보시지요.”

운은 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 손수건이 혹시 제게 특별한 것이었습니까?”

리하가 설의 심부름으로 운에게 전해준 손수건이었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리하가 인상을 잠깐 찡그렸지만 이내 온화한 표정으로 운에게 답했다.

“이것도 기억을 못 하시는군요. 제가 도련님께 드린 선물입니다. 특별한 것일 수밖에요.”

직접 건네준 이는 리하였으니, 그건 사실이었다.

손수건 위에 그려진, 눈 아래 피어난 꽃을 운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