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재회(一)

칼날같이 날카로운 은빛 눈동자가 드디어, 환을 향했다.

환의 온몸이 굳어졌지만 그의 눈동자는 정처 없이 요동쳤다.

회의장은 순간 정적으로 가득 찼다.

“아니, 저 이는….”

자리에 있던 문중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대신들, 그리고 아란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네년이 어찌 이곳에 있을 수 있지?’

아란이 왕녀가 된 설을 보며 벌떡 일어섰다. 조용했던 회의장이 순식간에 수군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유설운의 여식이 아니오?”

“어찌 왕녀로 이 자리에….”

환은 당장 옥좌에서 일어섰다.

“왕녀를 당장 포박하라!”

환의 명령이 내려지자 주위에 있단 홍화국의 병사들이 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신로국과 설해국의 병사들이 즉시 설을 에워쌌다.

“지금 내 앞에서 이게 무슨 소란이오?”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호가 나섰다.

“황태자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옵니다!”

이성을 잃을 듯이 눈을 부라리며 환이 소리쳤다. 신로국의 황태자에게 소리치는 환을 보며 대신들이 한 번 더 식겁했다. 물론 호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해국은 이제 신로국의 나라요.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소?”

“태자 전하.”

“아직도 설해국이 홍화국의 것이라 생각합니까, 국왕 전하.”

“허나, 저자는!”

환은 곧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환은 저도 모르게 점점 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환의 손가락이 천천히, 설의 얼굴을 가리켰다.

“저 자는 홍화국의 반역자입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계속되는 환의 반발에 호의 금빛 눈이 호랑이처럼 사나워졌다.

“과거에 무엇이었든 지금은 설해국의 왕녀가 아닙니까.”

“황태자 전하!”

“내 백성을 건드리는 자는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설해국의 왕녀를 해하려는 자가 있거늘, 신로국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겠소.”

차분하지만 차가운 말투가 모두에게 향했다. 환의 표정이 심히 일그러졌다.

“금일 예정되어 있던 연회는 내일로 미루도록 하지요. 여봐라! 왕녀를 모시고 가거라.”

호의 명령에 신로국과 설해국의 병사들이 설을 더욱 단단히 에워싼다.

“설아.”

환이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설을 불렀다. 설을 간절히 부르는 환의 입 모양을 오직 유설, 그녀만 보았다.

그렇지만 설은 아까의 다짐처럼, 그에게 증오의 눈빛을 보냈다.

항상 환을 향해 비쳤던 얼음같이 냉랭한 눈빛을.

설은 그렇게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환이 알아차렸다.

설해국을 되찾을 이유가 생겼음을.

***

호의 명령으로 설이 머무를 장소가 급히 준비되었다.

‘결국 김문중의 여식과 국혼을 치른 모양이군.’

설은 환이 저를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작은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좀 전의 환의 눈빛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아까는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설해국과 신로국의 병사들이 없었더라면 설은 쏜살같이 달려드는 홍화국의 병사들에게 꼼짝없이 붙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국왕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일이 있을 터, 호와 병사들을 믿기만 할 수는 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설은 단단히 결심했다. 더는 환에게 휘둘리지 않으리라.

***

같은 시각, 환은 파도같이 일렁이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유설.”

벌써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나 읊조렸는지, 옆에 있던 공 내관은 넋이 나간 환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궁에, 환이 있는 이 궁에, 설이 있다.

환은 설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환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간다.

설해국에 있으니 홍화국을 아무리 뒤져도 찾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 환은 그제야 설의 행방이 밟히지 않은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어찌 왕녀가 된 것인지는 모를 연유이지만 그 덕에 설이 저한테 제 발로 오게 되지 않았는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환은 설이 궁에 있을 이 시기가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어디론가 향했다. 공 내관이 그의 뒤를 황급히 따랐다.

***

환이 향한 곳은 신로국의 황태자가 머무는 방이었다. 시간이 꽤 늦었지만, 과거에 환과 호는 항상 이 시각쯤 대화를 나누었으므로 괜찮으리라 여겼다.

“황태자 전하를 뵙고 싶네.”

병사 한 명이 호에게 환의 방문을 전했다. 호가 승낙한 모양인지 병사가 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 전하.”

호가 무표정으로 환을 맞이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황태자 전하께 저지른 무례를 사과드리고자 왔습니다.”

환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홍화국까지 먼 걸음을 하셨는데… 송구하옵니다.”

“되었소, 괜찮습니다. 자리에 앉으세요.”

환이 호와 마주하고 앉았다. 호의 표정이 어느 정도 풀려있었다.

“국왕께서 찾으신 여인이 설해국의 왕녀였군요.”

“그렇습니다. 설해국의 왕녀가 되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환이 마른 침을 삼켰다.

“송구하오나 황태자 전하, 왕녀와의 알현을 허락해주십시오.”

“설마, 지금 당장 말이오?”

“예.”

“왕녀께서는 내키지 않은 듯한데….”

무슨 핑계로 설과 단둘이 만날 수 있을까, 환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황태자 전하, 제 누님이신 홍화국의 공주가 실종된 일을 아십니까.”

환은 홍화국의 제1 공주, 이서화를 이용하기로 했다.

“저번에 국왕께서 이야기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즉위식을 치르는 날, 공주께서 사라지셨다고.”

“예, 왕녀가 제 누님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누님께서 왕녀와 죽마고우였습니다.”

환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호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 안건이라면 협상 시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제 누님과 관련된 일인데… 이 정도는 제가 직접 추궁할 수 있지 않습니까.”

“…….”

“그리고 협상 시 추궁한다고 한들, 그곳에서 왕녀가 직접 밝힐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호가 금안에서 고민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환은 기회를 놓칠라,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유독 친애하시는 누님이 있다 하셨지요.”

환은 호가 신로국에서 유난히 잘 따른다는 누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호가 그 누구보다 누이를 생각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환이 이를 이용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는 환의 말에 즉시 제1 황녀를 떠올렸다.

“그러니 황태자 전하께서 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하나뿐인 누님께서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가만히 있을 아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호는 계속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호가 마지못해 허가를 내렸다. 환이 소리 없는 기쁨의 아우성을 질렀다.

“홍화국의 공주 저하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허나, 왕녀에게 절대 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약조해주십시오.”

“한 때 제가 연모하던 여인이었습니다. 어찌 해하려 하겠습니까.”

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가 곁에 있던 궁인 중 한 명을 불렀다.

“왕녀께 홍화국의 국왕 전하께서 알현을 청한다고 전하여라.”

호의 명령에 궁인이 바로 발걸음을 뗐다. 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 전하의 하늘같이 넓은 아량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환이 어느 때보다 정중히, 호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호는 물러가는 환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호는 신로국과 설해국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마당에 별일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

소식을 전해들은 설은 동상처럼 얼어 붙어있었다.

“왕녀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소신들이 밖에 있을 것입니다.”

설해국의 병사들이 설을 안심시켰다. 신로국의 병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 무슨 일이 있으시면 소리치십시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고마워.”

설이 그들을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설의 미소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녀의 아리따운 미소에 병사들의 사기가 더 올라간 듯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의 눈짓에 병사 중 한 명이 문을 열었다.

환이 들어왔고 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화국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환은 제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인사를 올리는 설이 야속했다.

“왕녀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다들 나가 보거라.”

모두 내키지 않았지만 홍화국의 국왕이 내린 명령을 거절할 순 없었기에 방을 나섰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 둘만 남겨지자 고요한 적막만이 그들 곁에 있었다.

환아 설에게 찬찬히 다가갔다. 설은 움직이지 않고 그저 제자리에서 주먹을 쥐었다.

“설아.”

환이 설의 이름을 불렀다. 환의 손길이 서서히 설의 얼굴을 향했다.

“손대지 마십시오.”

설의 은빛 눈이 환을 쏘아보았다. 환은 손을 거두었다.

“그동안 어찌 지냈느냐.”

“이곳저곳, 도망치면서 지냈습니다.”

설이 얼음장 같은 말투로 그 누구보다 차갑게 답했다.

“누구 덕분에 말입니다.”

“설아.”

“제게 무슨 할 이야기가 있다고 찾아오셨….”

설의 물음이 끝나지 않았지만, 환이 설의 팔을 잡고는 그녀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설이 환의 품에 안겼다. 설의 동공이 커졌다.

“애타게 찾았다.”

설의 몸이 부서질 듯, 환은 그녀를 세게 안았다.

설이 벗어나려 했지만 환은 놓아주지 않았다.

“매일 너만을 그리며 애타게 찾았으니라.”

“놔주십시오.”

“어찌 이제야 온 것이냐.”

“하….”

설이 환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작게 탄식했다. 설의 행동이 잠잠해졌지만 환은 여전히 설을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저는 국왕 전하께 온 것이 아닙니다.”

설이 그의 품에서 증오가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설해국의 백성과 저의 혼약자를 위해, 이곳에 온 것입니다.”

“혼약자라니?”

환의 표정이 무섭게 돌변했다. 그는 포악한 표정으로 설을 내려다보았다.

무엇이든 잡아 먹어버릴 것 같은 사나운 표정, 그 표정을 너무 오랜만에 마주한 설이 순간 겁먹었다. 설은 뒤늦게 아차 했다.

그렇지만 숨길 이유는 없지 않은가.

“네게 혼약자가 있느냐?”

“…네.”

환이 설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환이 설의 손목을 잡아채며 그녀를 벽으로 밀쳤다.

손목을 붙잡힌 설은 환과 벽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그럴 리가.”

“전하!”

“너는… 나만의 것이야 한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설은 제 손목을 잡은 환을 뿌리쳤다.

“그만 좀 하십시오!”

설이 인상을 구기며 질린다는 듯 소리쳤다.

“제가 아직까지 홍화국의 어린 소녀로 보이십니까?”

“그래.”

환도 불같이 눈을 부라리며 답했다.

“너는 나에게 아직 그 시절의 작은 소녀이다.”

“…….”

“내가 그토록 연모했던.”

“아닙니다.”

설이 딱 잘라 말했다.

“아니란 말입니다.”

당신도 예전에 다정했던 제3 왕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설이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설아.”

“저는 이제 설해국의 왕녀입니다. 제게 한 번만 더 함부로 대하시면 소리 질러 신로국과 설해국의 병사들을 부를 것입니다.”

“…….”

“그러니 용건만 말씀하시고 가십시오.”

“여전하구나.”

여전히 넌 내게만 차갑구나, 환이 쓰게 웃었다.

“내가 너를 용건이 있어서 보러왔겠느냐.”

“…그럼 가시지요.”

“왕녀.”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손 하나가 설의 볼을 스쳤다. 여전히 차가운 손길이었다. 설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설은 온 힘을 다해 도망치려 할 것이다. 이번엔 꼭 막고 마리라.

“어디 한 번 도망쳐 보거라.”

환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을 나왔다.

설의 시선은 그를 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