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존귀한 작은 나라, 설해국

그로부터 약 반년이 흘렀다.

“운아.”

“으음….”

설이 졸고 있는 운을 흔들어 깨웠다.

“아… 깜빡 졸았네.”

설해국에서 지내게 된 운과 설은 운의 고모 밑에서 여러 수업을 듣고 있다.

지금은 배웠던 것들을 함께 익히던 중이었다. 비몽사몽한 채로 졸고 있는 운을 설이 웃으며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하다 쉬자.”

“그래.”

운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집중하는 설을 보며 운은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흩날리는 눈과 함께 설에게 향했다.

햇살을 내리받고 있는 설의 모습은 마치 눈꽃처럼 반짝였다.

설해국에 도착한 지 대략 반년이 흘렀다. 그동안 설은 점점 어여뻐지고 건강해졌다. 홍화국에서 도망칠 때보다 더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교육을 접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고와질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물론 무예 실력 또한 출중해졌다. 고운 얼굴과는 달리 검을 집어 들 때의 설은 날렵하면서도 위협적이었다.

검을 집어 들 때 설은 평소와는 다른 차디찬 얼굴을 하였다.

그 모습 또한 다른 의미로 눈꽃 같았다.

운은 책과 설을 번갈아 가며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도련님! 혜윤입니다!”

“들어와.”

설의 부름에 혜윤이 쪼르르 들어왔다.

“공주 저하께서 함께 식사하자고 하십니다. 도련님의 고모님도 함께 계십니다. 가시지요.”

설과 운은 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식탁에 모두가 모였다.

“이제 다들 설해국 음식에 익숙해졌나봅니다.”

운의 고모, 구서인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구현인의 여동생인 구서인은 설해국 여행 중 설해국의 고위 관료인 남편을 만나 설해국에 살게 되었다. 덕분에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고모님의 훌륭한 음식 솜씩 덕분입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읍합니다, 공주 저하.”

서화의 칭찬에 구서인이 더욱 웃어 보였다.

이곳에 지내면서 모두가 서인을 고모님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모두가 성품이 뛰어나고 인자한 서인을 잘 따랐다.

“참, 설해국이 신로국으로 넘어간 사실을 아십니까?”

서화가 모두에게 물었다.

“네, 저하. 설해국의 국왕께서 그 일로 염려가 많으시다 들었습니다.”

서인이 한숨을 쉬며 서화의 물음에 답했다.

“어찌 국왕께서 염려하십니까? 어찌 보면 설해국에게는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않나요? 더 큰 나라의 보호 하에 있으니까요.”

운이 의아해하며 서인에게 물었다.

“홍화국에게 바친 자원이 많으신 만큼 배신감이 크다 하셨단다.”

“맞아요. 홍화국은 전투 지역으로도 설해국을 많이 이용하지 않았습니까? 그 대가로 설해국을 보호해주기로 한 것인데 이를 어기다니요.”

설도 거들었다.

“또한 설해국은 홍화국에서 여러 약재를 수입해오고 있지 않았습니까? 신로국에도 없는 존귀한 약재들은 이제 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수입재가 끊겼으니 걱정이 크실 만합니다.”

설이 고개를 저으며 이어 말했다. 운이 이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로국에게 더욱 힘을 키워준 셈이군요. 홍화국 국왕의 생각을 도저히 읽을 수 없습니다.”

서화가 동생, 환을 떠올리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설해국을 넘긴 대가로 환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서화가 제일 놀랄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설해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운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설을 찾고 있을까요.”

설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글쎄, 이쯤 되면 날 포기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죽은 줄 알았거나.”

그럴 리가, 환은 지금 설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물론 설이 이를 알 턱은 없었다.

“후에 어떻게 홍화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생각해봐야겠군.”

서화의 말에 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설이 가만히 지켜보았다.

‘운이 왜 저러지?’

설의 생각이 끝나가기 무섭게 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고모님,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설도 운이 자리를 떠나고 머지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운을 따라갔다.

***

“운아!”

설이 운을 불렀다.

운은 정원의 편백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편백의 입사귀가 눈과 함께 흩날렸다. 눈 사이에 서 있는 운은 매우 추워 보였다.

“설아….”

“운아, 안색이 좋지 않아.”

설이 운의 얼굴빛을 살폈다. 운이 고개를 피했다.

“나 좀 봐.”

설이 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들어 올렸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설아.”

운이 낮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설을 불렀다. 설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있었다.

“난 네가 홍화국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

운이 얼굴을 감싸고 있는 설의 손을 꼬옥 잡았다.

“계속 여기 있으면 안전하잖아.”

“…….”

“제3 왕자… 아니, 국왕이 널 포기하지 않고 있으면 어떡해.”

운의 떨리는 눈빛을 본 순간 설의 가슴이 아려왔다.

설은 당연히 곁에 있으리라 믿었던,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본 적이 있어서인지 운의 슬픈 눈빛이 더욱이 이해되었다.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아. 그렇지만 우린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알면 안 가면 안 돼?”

“운아.”

운을 부르는 무거운 목소리에 운이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걱정하는 일 없도록 할게.”

“정말….”

운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럴 수 있어?”

“응.”

설의 대답을 듣고 운이 설을 꽉 끌어안았다.

“약조한 거다.”

“그래.”

설도 운에게 안긴 채,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눈이 나리는 냉랭한 날씨와는 달리, 드넓고 따사로운 운의 온기를 느끼며 설은 눈을 감았다.

따듯한 겨울이었다.

***

다음날이 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설은 검을 빼 들고 날카로운 검술 솜씨를 뽐냈다.

운도 설에 지지 않을 만큼 현란하게 칼을 휘둘렀다.

챙그랑!

명쾌한 칼 소리를 끝으로 둘의 겨루기가 끝났다.

설이 주저앉아 있었고 운의 칼이 설의 목을 향했다.

“오늘은 내가 이겼네.”

운이 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설이 운을 빤히 쳐다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운, 점점 실력이 느는 것 같네.”

운이 설을 향한 칼을 치우고 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설이 잡으며 말했다.

“분발해야겠어.”

“되게 오랜만에 이긴 건데 뭘.”

운이 그리 답하며 설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졌고 분위기는 겨루기를 했을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운의 눈빛은 주의를 고요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일까, 설은 그를 마주하고 있을 때면 세상에 둘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운의 향기가 설의 코끝에 닿았다. 그 향에 설의 정신이 아득해진다.

설은 순간 놀라 저도 모르게 운을 밀어냈다.

“다, 다시 겨뤄보자.”

붉어진 얼굴을 감추느라 설이 애써 운을 뒤로한 채 말했다.

운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이 다시 검을 빼 들려 하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기척에 설과 운이 뒤를 돌아보았다.

“열심히 하고 있느냐.”

운의 고모, 서인이 운과 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설과 운은 곧장 검을 집어넣고 예를 차렸다.

“바쁜 와중에 미안하다만 할 얘기가 있단다.”

“괜찮습니다. 고모님.”

“그럼 내 처소로 가자꾸나.”

서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설과 운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은 의아해하며 서인을 따라갔다.

“무사시험 날짜가 나왔단다.”

운과 설이 자리에 앉자마자 서인이 뱉은 말이다.

“설해국에서도 무사시험을 봅니까?”

“그럼, 설해국에서도 홍화국처럼 무사시험을 보고 인재를 등용한단다. 뽑히게 되면 궁으로 들어가 궁 소속의 무사가 되지.”

“그렇군요.”

“참여할 생각이 있느냐? 신분, 국적에 상관없이 참여할 수 있다고 하는구나.”

서인의 물음에 둘 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홍화국의 무사시험에 꼭 합격해서 제1 공주 저하의 호위무사가 되고 싶었는데….’

홍화국 대신 설해국의 무사시험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는 생각에 설의 표정이 잠시 침울해졌다.

역시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다고, 설이 생각했다. 상황이 이리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운이 설의 표정을 보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지만….’

해야만 한다. 싫건 좋건, 자신을 더 강하게 하는 수단은 뭐든지 아득바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더더욱.

“전 하겠습니다.”

“저도요.”

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운도 즉답했다. 설이 운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리 알고 있으마. 온 김에 다과 좀 들다가 가렴, 먹고 힘내야지.”

“예, 고모님.”

서인의 다정함이 어머니 선경과 겹쳐 보인 설은 슬프지만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

***

“오늘은 어떠한가.”

“전하… 그것이…….”

홍화국의 늦은 밤, 평소 대신들이 모이던 자리에서 그의 무인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서 있었다. 환이 대놓고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어떠하냐고 물었다.”

환이 재차 묻자, 그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 공주 저하는 아직….”

“말고.”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들자 환의 광기 어린 붉은 눈이 그를 향했다. 그 눈빛에 압도된 무인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계집 또한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쾅!

“홍화국의 땅이 아무리 넓다 한들 어찌 못 찾는 것인가!”

환이 주먹으로 옥좌를 세게 쳤다. 환의 주먹이 가만있지 못하고 떨린다. 무인들의 고개가 더욱 낮아졌다.

“고작 계집 하나거늘.”

“송구하옵니다. 전하.”

환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숨을 쉰 것은 환인데 무인들은 자신이 땅으로 꺼질 것처럼 몸을 떨었다.

“구현인의 거처는 찾았느냐.”

“예, 겨우 찾아내어 수색했으나… 그곳에는 구현인과 그의 여식인 구시연 무사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네, 그의 아들은 유학을 보낸 상태라고 합니다.”

“하….”

그곳이 환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그곳에도 없다니.

구현인의 집안사람들은 설의 가문이 그렇게 된 것도 몰랐다고 했다. 믿기 힘든 사실이었으나 증거도 없이 그들을 구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무인들은 그저 그의 집을 수색하는 것으로 행동을 그쳤다.

그럼 이제 어디를 수색해봐야 하나, 환이 고민했다.

“시체라도 찾아와야 한다. 알겠느냐, 찾는 인원을 더 늘릴 터이니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할 것이야.”

그리 말했지만 환은 설이 시체로 발견되길 원하지 않았다. 제발 살아있어 주길 바랐다.

아니, 살아있어야만 한다.

“예! 전하!”

무인들의 힘찬 대답 사이에 인기척이 들렸다.

“전하, 김 판서 대감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라 하라.”

환은 손짓으로 무인들을 모두 보낸 뒤 김 판서, 문중을 들였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이 밤에 어인 일로 오셨는가? 대감.”

“전하께서 밤새 업무를 보고 있다 하시어 걱정되어 찾아왔나이다.”

“과인의 걱정을 그리해주다니, 충심이 깊구나.”

“황송하옵니다.”

문중이 환의 눈치를 살핀다. 문중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을 알아챈 환은 문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문중이 기다렸다는 듯이 환에게 물음을 던졌다.

“전하, 아직도 그 계집을 찾으시옵니까?”

“그래, 왜 묻는 거지?”

주제넘게 굴지 말라는 눈빛으로 환이 물었다. 허나, 문중은 그 눈빛을 알아채지 못한 체하였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 설마 그 계집을 국왕비로 맞으실 참입니까?”

“아니?”

환의 대답에 문중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지만 한순간뿐이었다.

“아직은 그 누구도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문중이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하… 하오나 전하, 지금 왕비의 자리가 비어있어 대신들의 걱정이 하늘을 치솟고 있사옵니다. 부디….”

“대신들이 아니라.”

환이 문중의 말을 싹둑 잘랐다.

“그대의 걱정이 큰 것이겠지.”

“국왕 전하, 소신은 그저….”

“자네의 여식을 홍화국의 왕비로 올리고 싶은가?”

속내를 들킨 문중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대의 여식이 국왕비의 자리에 오른다면, 평생 국왕의 사랑은 받지 못할 터.”

“전하.”

“그래도 괜찮으면 한번 생각은 해보지.”

환이 서늘하게 문중을 내려다보았다. 그렇지만 문중은 한 줄기의 빛을 본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