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받을 수 없는 청혼

“놓아주십시오.”

“싫다.”

홍화국의 왕자, 이환이 호위 장군의 딸, 유설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거라.”

환이 설의 손목을 더 세게 쥐었다. 조여 오는 통증에 설이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의 뜻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아.”

“몇 번이나 싫다 하지 않았습니까.”

“내 어디가 그리 싫은 것이냐.”

“전부.”

“…….”

“전부 싫습니다.”

설의 싸늘한 한마디에 환의 가슴이 아려왔다.

“내 너를 나중에 따로 부를 터이니, 그때까지 다시 생각해 보거라.”

“왕자 저하.”

“명이다.”

“…….”

“아니, 부탁이다.”

환이 설의 확고한 다짐을 무시한 채 손목을 놔주었다.

“그만 물러가 보거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환은 유유히 떠나갔다. 설은 화끈거리는 손목을 붙잡고 한참을 그곳에 있었다.

***

붉은 꽃이 유난히 많이 피고 지는 나라, 홍화국.

홍화국 왕족의 특징 또한 석류석같이 붉게 빛나는 눈동자이니, 그에 걸맞은 국호가 아니던가.

그러나 홍화국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홍안을 지닌 이들은 오직 왕족 뿐, 왕족을 제외한 홍화국인들은 검은 눈동자를 지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와 달리 홍화국의 국왕을 지키는 호위 장군, 유설운과 그의 자제들은 홍화국에서 보기 힘든 찬란한 은안을 지녔으리라.

유설운의 금지옥엽 막내딸인 유설, 그녀는 유난히 더 빛나는 은색 눈동자를 지녔다.

검고 부드러운 머리칼과 대조되는 그녀의 은안은 하늘의 별을 밖아 놓은 듯이 찬란하였다.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이 소녀를, 홍화국의 제3 왕자인 이환은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

“설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설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설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오라비, 유서한이 서있었다.

“오라버니!”

설은 반가워하며 제 오라비를 맞이하였다. 서한도 웃음으로 화답하였다.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어요?”

“궁에 잠깐 다녀왔단다.”

“궁에요?”

설이 놀라며 되물었다.

“그래. 앞으로 세자 저하의 호위를 맡게 되었단다.”

설과 서한의 가문인 유 씨 집안은 예로부터 홍화국의 왕과 그의 일가를 지키는 제일가는 무신 집안이다.

가문의 명성에 맞게 서한은 금년 열렸던 홍화국의 무사 시합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고 그 결과 세자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축하드려요, 역시 오라버니십니다.”

“그래, 고맙다 설아. 한데, 아버지께서 너를 찾으신다.”

“아버지께서요?”

“그래, 어서 가보너라.”

“예, 오라버니.”

설은 서한에게 해맑게 인사하고 아버지, 설운의 방으로 달려갔다.

***

“아버지, 설입니다.”

“들어오너라.”

설이 방으로 들어가자 유설운이 환히 웃으며 설을 맞이하였다.

“우리 어여쁜 딸 왔느냐.”

“네 아버지, 무슨 일이어요?”

“무슨 일이 있어야만 부르겠느냐.”

“그건 그렇지요.”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어 불렀으니라.”

설운이 허허 웃으면서 대답했다.

“설아, 네 나이가 몇이지?”

“열아홉입니다.”

“많이 자랐구나. 벌써 열아홉이라니….”

설이 호탕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의 눈치를 찬찬히 살폈다.

‘분명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

설운은 괜히 헛기침하며 차마 말을 못 꺼내고 있었다. 설이 망설이는 설운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아버지 무슨 일 있으신지요.”

“흐흠… 그게…….”

“소녀에게 말씀해 보시와요.”

“녀석,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아버지 설운이 자리를 고쳐 앉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설이 귀를 쫑긋 세웠다.

“궁에서 요즘 혼사 이야기가 많이 나온단다.”

“누구의 혼사를….”

“너를 점찍어 둔 사람이 있다.”

설이 그 말을 듣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눈에 훤했지만, 혹시나 다른 이일까 해서 설이 물었다.

“어떤 분입니까?”

아버지 설운이 한숨을 쉬시고는 말을 이어간다.

“제3 왕자이시다.”

예상하던 이가 설운의 입에서 나오자 설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설의 언짢은 기색이 설운에게도 전해졌다.

“셋째 왕자 저하는 저의 집안과 혼인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설의 보석 같은 은빛 눈이 차갑게 변했다.

홍화국의 왕과 왕비의 셋째 왕자 이환, 그는 홍화국의 왕권에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홍화국의 왕과 왕비에게는 3명의 자식이 있다. 제1 공주 이서화, 제2 왕자 이신, 제3 왕자 이환.

원래 왕과 왕비는 맏이이자 제일 총명한 제1 공주, 이서화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었지만 서화 공주는 왕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순위인 제2 왕자 이신이 세자가 되었다.

제2 왕자인 이신은 왕위에 욕심이 있었고 왕이 되기에 충분한 성품과 자질을 지닌 왕자였기에 바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환 역시 왕위를 원했으며 총명한 왕자였지만 왕과 왕비는 환의 충동적이고 난폭한 성품이 왕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신이 환보다 우선 순위였기에 신이 세자가 되는 것이 자연한 일이었다.

환은 이를 납득할 수 없었다.

현 왕실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런 제3 왕자의 심정을 이용해 세력을 만들었다.

이들은 제3 왕자를 즉위 시켜 자신들의 뜻대로 나랏일을 펼칠 계획이었다.

따라서 궁의 세력들은 자연히 세자 파와 왕자 파, 둘로 나뉘었다.

현 왕실을 옹호하는 세자 파, 그에 속하는 설운의 여식인 설이 환과 혼인한다는 것은 설에게 있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아비도 안다. 설아.”

설운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제3 왕자께서 내게 직접 말씀하시더구나. 전해달라고….”

“제 대답은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 왕자 저하께도 제 뜻을 여러 번 밝혔습니다.”

“물론이다. 네 마음을 돌리기 힘드실 거라고 말씀드렸으나 너에게 한 번 더 전해 보라고 하시더구나. 내가 말하면 달라질 것이 있다고 믿고 계시는 듯하구나.”

“정말이지, 그분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습니다.”

“설아.”

설운의 부름에 설이 불평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설이, 네 뜻과 맞지 않은 일을 강요하는 것을 물론 권유할 생각도 없다. 그저 네가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네게 말하는 것뿐이다.”

“아버지….”

“나는 네가 우리 가업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단다. 그래서 그렇게 네 오라비와 함께 훈련을 받고 검술을 익히는 것이겠지.”

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의 가문에 대한 충심은 이 아비도 잘 아는바, 그런 우리 딸이 제3 왕자랑 혼인하는 것을 달가워할 리가 없지.”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허허. 나도 우리 딸을 제3 왕자께 보내고 싶지 않다.”

설운은 딸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그리 말해주신다니 소녀, 마음이 편안합니다.”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설아, 제3 왕자께서 너를 만나고자 하신다. 네가 그 자리에서 너의 뜻을 명확하게 다시 밝혀야 할 것 같구나.”

몇 번이나 거절했거늘, 설의 마음이 답답함으로 차올랐다.

“내일은 이 아비랑 함께 궁에 가자꾸나. 가면 제3 왕자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게다. 힘들겠지만… 다시 한 번 뜻을 확실히 전하고 오너라.”

“저… 아버지도 함께 계실 건가요?”

설이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미안하지만 나는 전하와 세자 저하의 곁을 지켜야지.”

설운이 설을 안쓰럽게 보며 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지만 우리 쪽 사람들이 근처에 있을 게야. 너무 염려 말아라.”

“알겠습니다.”

“그래, 이제 들어가서 쉬려무나. 나도 이제 네 어미한테 가봐야지. 잘 자려무나.”

“네, 아버지도 안녕히 주무세요.”

설이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는 방을 나섰다.

***

설은 처소로 돌아왔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다 마치고 누웠지만, 설은 뒤척거리며 쉽게 눈을 감지 못했다.

분명 싫다고 뜻을 여러 번 밝혔건만, 제3 왕자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구나. 설이 생각하며 계속 뒤척였다. 예상은 했지만 제3왕자가 아버지, 설운에게까지 제 뜻을 이렇게 빨리 밝힐지는 몰랐던 설이다.

설은 서화 공주와 두터운 친분이 있었기에 왕궁 출입을 허가받았다. 평소와 같이 공주를 만나기 위해 입궁하던 어느 날, 설이 환에게 다가갔던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가… 열 셋이었나.”

설이 과거를 회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때 그냥 지나쳤어야 했어.”

환과 설의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세자 파와 왕자 파의 대립이 뚜렷해지기 전까지도 둘의 사이는 좋았다.

환에게 느끼는 지금의 감정은 그 시절에 없었다. 물론 그 시절의 감정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둘은 그저 어린아이였을 뿐이었는데,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 차라리 멋모르던 그 시절이 나았다고 설은 생각했다.

포악하고 성질 더러운 왕자, 그렇지만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그런 왕자, 지금의 설에겐 환은 그뿐이었다.

아니, 그뿐이어야 했다.

“이젠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설은 계속해서 과거를 곱씹었다. 설은 뜬눈으로 뒤척이다가 겨우 잠에 들었다.

***

날이 밝았고, 설은 설운과 함께 궁으로 향했다. 궁 앞에서 설운이 설에게 당부했다.

“설아, 왕자 저하께 네 뜻을 잘 말씀드리고 오너라.”

“예, 걱정 마셔요. 아버지.”

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설운은 그런 딸아이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이따 집에서 보자꾸나.”

설운은 설에게 손을 흔들며 바로 왕과 세자에게 향했다. 설운을 보낸 후 설은 제3 왕자의 처소 앞으로 향했다.

바위라도 짊어진 듯, 그에게 가는 발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발걸음처럼 마음에도 돌덩이를 진듯했다.

‘이번에도 막무가내로 구시려나.’

설의 생각은 바뀔 일이 없으니 환의 생각이 바뀌었어야 할 텐데, 설은 무거운 걸음을 겨우 떼어냈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어느새 설이 그의 처소 앞에 도착했다. 홍화국의 제3 왕자, 이환이 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환이 다가오는 설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무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이 정적이 흘렀고 환이 먼저 그 정적을 깼다.

“왔느냐.”

환이 씨익 웃으며 설을 맞이했다.

“제3 왕자 저하를 뵙습니다.”

“그래.”

설이 환의 눈을 피하며 인사를 올렸다.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환은 더 진한 웃음을 보이며 설의 눈을 마주 하려 했다.

설이 계속 저를 봐주지 않자 환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처소 근처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이동했다.

설이 환의 손에 이끌리며, 그를 따라갔다.

“내 처소 안에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네 아비가 노발대발하더군. 누가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 아니랄까 봐.”

설은 마치 자신이 호의를 베푼다는 듯이 말하는 환이 어이없을 따름이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십니까.”

설이 마음으로 욕하며 환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마음이 바뀐 거 같지는 않군.”

“예.”

“내가 그리 부탁했는데.”

부탁이 아니라 명이셨지요, 설이 얼굴을 꼿꼿이 들며 환을 노려보았다.

“저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뜻도 같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묻겠네.”

환이 성큼 설에게 다가갔다. 설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세자빈이 되고 싶지 않은가?”

“왕자 저하!”

“나는 세자가 되고 싶은데.”

‘어찌 그런….”

“그러기 위해서는.”

환이 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붉은 눈에 서려있는 위압감에, 설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네 집안 정도의 군사력이 필요하지.”

“왕자 저하.”

“그대의 집안처럼 큰 세력을 없애기는 힘들어 보이니 내 편으로 만들고 싶군.”

대놓고 속을 보이는 환을 향한 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시기 위해서 제게 청혼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설이 놀란다. 환이 설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두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것과는 별개이니라. 너를 향한 내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다니 매우 섭섭하군.”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설이 환의 얼굴을 피하며 답했다.

세자빈이 되고 싶지 않냐 하다니, 그리고 세자가 되고 싶다니, 이것은 반역을 부르는 발언이다.

“설아.”

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설의 손목을 잡은 환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