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현은 의아함을 느꼈다. 갓을 쓴 사내는 산수화가 그려진 부채로 눈 아랫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현의 시선에선 그의 짙은 눈썹과 함께 주름진 눈만 볼 수 있었다.

‘왜 날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지? 설마…….’

간혹 사내 중에 그런 자들이 더러 있었다. 장옷을 뒤집어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으나 여인이 풍기는 분위기만으로 그녀에게 홀딱 반해 버리는.

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가 그런 부류의 사내일 거라고 짐작하며 대수롭지 않게 눈길을 피하였다. 몇 걸음 앞에서 저를 기다리는 일행들을 향해 유유히 걸음을 옮기는데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발목을 휘감아 올라오는 걸 느꼈다. 집요할 정도로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다니는 눈빛을 향해 현이 고개를 돌렸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인데, 어디서 봤을까?’

마음속에서 한줄기 의문이 피어올랐다. 번뜩이는 시선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현은 수많은 기억을 더듬었다. 어딘가에 분명 저 눈빛과 관련된 기억이 있을 터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은 현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 답답한 상황에 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건 여전하였다.

‘어쩔 수 없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현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내에 관한 걸 좌우익위나 하 내관에게 묻기로 마음을 돌렸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발이 절로 움직였다. 그러나 발이 땅에서 떨어져 다시 땅에 닿기도 전에 현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번쩍하고 섬광이 이는 것처럼 현의 머릿속에 수상한 눈빛의 사내가 누군지 떠올랐다. 의문을 품고 있던 현의 눈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쏘아보는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눈빛으로 현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현이 드디어 자신을 기억해 냈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사내가 차츰차츰 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날 아시오?”

“어찌 모르겠습니까.”

현의 날카로운 물음에 사내가 얼굴을 가렸던 부채를 아래로 내렸다. 이제 애쓰지 않아도 현은 사내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그의 눈가 옆에 난 작은 점까지도 잘 보였다.

현은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내에게 불쾌감을 느꼈다. 그의 어깨너머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좌익위 권우명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권우명이 눈빛으로 현에게 물었다.

‘어찌할까요?’

‘기다려라.’

‘신호만 주시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현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흥분해서 날뛰려는 권우명을 안심시켰다.

“잠시 걸으실까요?”

“할 말이 있다면 여기서 하시지요. 처음 보는 외간 사내와 동행을 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거 서운합니다.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처음 본다는 둥, 외간 사내라는 둥 하십니까.”

사내가 너스레를 떨며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현은 정색할 뿐 어떤 반응도 일절 보이지 않았다.

현의 무반응에 민망함을 느꼈던지 사내가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이용하여 바람을 일으켜 얼굴에 보내었다. 화끈거림이 가라앉을 무렵 사내가 헛기침을 하며 현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아직도 절 원망하시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뻔뻔스럽게 내 앞에 나타나 내게 말을 걸 때까지도 자네의 존재 자체를 잊고 살 정도로 난 자네를 잊었네. 원망이랄 것도 뭣도 없네. 그러니 이대로 그냥 조용히 지나가 주겠나?”

현은 그를 기억해 냈다는 사실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전과 달리 말도 편하게 하였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지? 이젠 내가 더는 세자가 아니라서 그러는 것인가?”

“전 사실 대비마마의 명을 받고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내의 말에 현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러면서 눈빛도 함께 식어버린 탓에 사내가 살짝 긴장하였다.

“그걸 말하려고 날 찾은 것은 아닐 테고. 대비에게 날 데려가기라도 할 생각인가? 그래서 내게 복수를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면…….”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현의 말허리를 중간에서 잘랐다.

“한 번도 저하께 복수해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현은 코웃음을 치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몸을 반쯤 비틀었다. 더는 사내와 마주 보고 있고 싶지 않았다. 다시 그와 말을 섞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살다 보니, 살아 있다 보니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도 하게 되는 걸 보고 현은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였다.

“날 밀고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만 가보겠네.”

현의 말투가 서늘하였다. 휑하니 몸을 돌리는 현의 팔을 사내가 붙잡았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좌익위 권우명이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여차하면 이 자리에서 사내의 목을 베어 버릴 태세였다.

좌익위 권우명의 실력이 어떠한지 익히 알고 있었던 사내는 얼른 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제가 왜 한양에 돌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자네에 대한 건 뭐든 하나도 궁금하지 않네.”

현의 말에도 불구하고 사내, 최태영은 품에서 꺼낸 비단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대문을 통과할 때 병사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종이를 꺼냈다.

“새로 도승지에 임명되었습니다.”

“자네가 도승지가 된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러는가? 실례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아, 하긴 배운 게 없으니 예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겠지.”

현은 구태여 불쾌한 기색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완전히 도승지 최태영을 무시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대응에도 최태영은 현의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저 남녀가 서로 다툼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인지 아무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긴 누가 모르는 남녀 간의 싸움에 끼고 싶겠는가. 상황이 반대되었어도 모르는 척 지나쳤을 것 같았다.

현은 몸을 빙글 돌려 최태영을 빤히 응시하였다. 그가 최태영과 아웅다웅 다툼을 벌이는 사이 문규는 장가의 점포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문규와 연후가 만났을 것이다. 어떻게든 최태영을 떨어뜨리기만 하면 오늘 하기로 했던 일도 어느 정도는 성공한 셈이었다.

“날 밀고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 그렇다면 조용히 가주게. 난 더는 자네와 실랑이를 벌일 생각이 없네.”

“지금 실랑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럼, 이게 실랑이가 아니고 뭔가?”

“저하.”

“어허, 그렇게 부르지 말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훤한 대낮에, 그것도 시전 한복판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가.”

현이 따끔하게 최태영을 꾸짖었다. 행색은 달라졌다고는 해도 그는 여전히 세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현에게 있었다.

최태영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더는 공주마마께 마음이 없습니다.”

“없어야지. 있다고 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자네의 목을 베어 버렸을 것이야.”

현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감정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였다.

“못난 자네 때문에. 누님이, 우리 누님이.”

목구멍으로 울컥 솟구친 격한 감정에 현은 입술을 사려 물었다. 벌벌 떨리는 입술을 이로 꾹 눌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슨 말이 튀어 나갈지 알 수 없었다.

“전 그 같은 결정을 내리셨던 저하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더는 험악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제발 가주게.”

이젠 현이 사정하듯이 최태영에게 말하였다. 그가 현에게 있어 괴로운 기억을 자꾸만 상기시키고 있었다.

“저하를 돕고 싶습니다.”

“대비의 사람을 자처한 그대가 하기에 방금 한 말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아는가? 아마도 모르겠지. 그러니 이 같은 말을 실없이 나에게 하는 것이겠지.”

입매를 단호히 여미고 현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다 믿어도 최태영 한 사람만은 믿을 수 없었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했다. 생각이 쉽게 바뀔 리 없다는 걸 현은 잘 알았다.

‘지조조차 없는 사내가 뭐가 좋다고 우리 누이는 이런 자를 마음 깊이 사랑하였을까.’

현은 누이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걸음을 옮겼다.

“제가 한양에 온 건 다 저하를 위해섭니다.”

“거짓말을 하려거든 좀 더 그럴싸하게 하게. 날 위한다는 자네가 나를 벼랑 끝에 몰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가?”

그제야 최태영이 입을 다물었다.

현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새겨질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더는 최태영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현은 권우명이 서 있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한양에 거처를 마련하지 않아 기루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그곳이라면 편히 이야길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발로 호랑이굴로 들어가라고 아주 등을 떠미는구나.”

“저하.”

현은 맹렬한 기세로 등을 돌려 최태영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목이 떨어질 거라는 걸 최태영은 직감하였다. 아쉽지만 물러날 때였다. 최태영은 현에게 허리를 꾸벅 숙인 후에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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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까맣게 알지 못하는 연후는 그저 문규를 만난 기쁨에 취해 있었다.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혔다.

다급하게 장가의 점포 안으로 들어왔던 문규는 붉어진 눈시울로 절 빤히 바라보는 사내에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날 보고 눈물을 보이는 것이지?’

문규의 기억 속에 연후는 곱게 머리를 땋아 내리고 만개한 꽃잎처럼 풍성하게 부푼 치마를 입은 말괄량이 소녀였다. 여길 오면 연후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눈앞엔 시커먼 수염이 난 웬 사내가 하나 있으니 당황스러운 것도 당연하였다.

“오라버니.”

연후가 나지막이 문규를 부르며 다가갔다.

“혹 방금 절 부르신 것입니까?”

문규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를 제외하고는 점포 안에 주인인 장가만 있었다. 그는 열심히 물건을 포장하고 있었다.

“접니다, 오라버니.”

“뭔가 오해를 하신 듯합니다. 전…….”

“보고 싶었습니다.”

연후가 와락 문규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품속을 파고드는 작은 인영에 문규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무의식중에 작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울지 마십시오.”

울지 말란 소리에 오히려 연후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서러운 울음을 토해내는 연후를 안타까운 듯이 내려다보며 문규는 멈추지 않고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녀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해줄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