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햇볕이 따갑다 생각될 정도로 쨍하였다. 눈이 절로 부셨다.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렀다. 그런 하늘에 두둥실 떠다니는 하얀 구름에는 꼭 신선이 타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신선이 오늘 있을 방방의를 축하해주러 하늘에서 내려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쾌청한 날이었다.

날씨가 맑은 것뿐인데 현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얼마 후면 연후를 만나 그동안 세월의 더께처럼 쌓인 오해를 풀 수 있어서 인지도 몰랐다. 꿈에나 그려보던 연후와의 재회가 곧 온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어 왔다.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현이 연후를 생각하고 있을 때 좌익위 권우명이 말을 건네왔다.

“저하, 열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기분이 좋아 상기된 것뿐이다.”

“그러십니까?”

권우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시선을 멀리 두었다. 현은 세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많은 사람 앞에 나서야 했다. 혹시나 불의의 사고라도 생길까 권우명은 걱정이 앞섰다.

“저하, 오늘은 그건 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그거?”

“네, 왜 있지 않습니까.”

권우명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입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현의 눈치를 살폈다. 현이 인중에 점을 그렸던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걸 기억하고 있어서였다.

“방방의에는 내 얼굴도 아는 대신들도 참석할 텐데 그러다 들키면 더 망신스럽지 않겠나?”

현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주상전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에 와서 주상전하께 밉보일 건 없지 않습니까.”

권우명의 직언에 현은 고민에 빠졌다. 분명 왕이 무과에 나가는 걸 허락하긴 하였으나 방방의에서 정체를 드러내도 좋다고 한 적은 없었다.

왕이 여러 날에 거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탓에 문안 인사도 겨우 올릴 정도였다. 잠시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갔을 때 여쭤볼 것을 이라고 현은 내심 후회를 하여 보았다. 왕에게 물으러 가기엔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세자가 아닌 신분으로 왕에게 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다 와 놓고 삐끗할 필요는 없지.”

자신의 안일함이 혹시라도 연후에게 피해를 줄까 저어되었던 현은 권우명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점이야 나중에 지우면 그만이었다.

“동궁전으로 다시 돌아가야겠구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니?”

“혹시나 해서 지필묵을 챙겨왔습니다.”

권우명이 소맷자락에서 지필묵을 꺼냈다.

“자네에게 이리 세심한 면모가 있는 줄 그전까지는 미처 몰랐구나.”

현의 말에 권우명이 부끄러워하였다.

이런 권우명을 보는 게 낯설었다. 현은 슬쩍 눈동자를 굴려 우익위 문기찬을 쳐다보았다.

‘좌익위가 왜 이러는지 우익위는 연유를 아는가?’

‘연모하는 여인이 세심한 사내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우익위의 눈빛을 읽은 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근래에 들어 제 문제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 권우명에게 연모하는 여인이 생겼다는 걸 말이다.

그동안 주변인에게 무심했던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현은 물끄러미 권우명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권우명은 붓에 먹물을 묻히고 있었다.

“다 되었습니다, 저하.”

고개를 들던 권우명이 절 바라보고 있던 현과 눈이 마주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눈빛으로 절 보시는 것입니까?”

“방방의만 끝나면 며칠 휴가를 줄 터이니 실컷 쉬다가 오너라.”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얼떨떨해하는 권우명에게 현은 따로 설명해줄 생각이 없었다. 아예 고개를 돌려 우익위 문기찬을 바라보았다.

“우익위도 마찬가지네. 자네도 좀 쉬어야겠어. 지금 보니 두 사람 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

“저하.”

“그리 감동한 표정을 할 필요는 없네. 돌아오면 혹독하게 일을 시킬 테니까.”

혹시라도 권우명과 문기찬이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라도 할까 봐 현이 뒷말을 얼른 덧붙였다. 그리고 호쾌한 웃음을 지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세자 저하.”

몰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이 동시에 허리를 조아렸다.

이렇게 우물쭈물하다가 연후를 만날 틈도 없이 방방의가 시작되어 버릴까 마음이 급하였던 현은 서둘러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인사는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고 난 다음에 하게. 일이 꼬여버리면 휴가도 없던 일이 될 수 있어.”

“염려 마십시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하를 지킬 겁니다.”

“감히 그 누가 내가 세자인 걸 알고 헤치려 들겠는가. 좌익위 자네가 이리 철저하게 준비했는데.”

현이 웃으며 얼른 인중에 점을 그리라고 눈짓으로 권우명 손에 들린 붓을 가리켰다.

“인중에 점을 찍는 순간 난 이 나라의 세자가 아니라 평범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 과거에 급제한 사내일 뿐이네.”

권우명이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받치고선 현의 인중에 점을 찍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너무 작게 그린 것 같지 않나?”

면경을 보지 않았음에도 현은 왕이 그려주었던 점보다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부족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음,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구나.”

현의 인중 위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던 붓이 떨어졌다. 권우명은 지필묵을 소맷자락 안으로 갈무리하며 흡족한 표정으로 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었군. 서둘러 가지.”

현이 두 사람을 재촉하였다.

**

왕을 호위해야 할 내금위장 유림은 근정전이 아닌 동궁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정대로 민 귀인이 중전을 방방의에 부르는 데 성공하였다. 조금 전 함께 중궁전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다.

뜻하지 않게 경빈 박 씨가 거기에 끼어 있긴 했으나 어차피 방방의가 끝나는 대로 제거할 인물이었다. 조금 일찍 손을 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었으니 유림은 별다른 상관을 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동궁전에서 꼼짝을 하지 않는 세자인 현에게 있었다. 분명 중궁전의 궁녀가 동궁전에 급히 들어갔다가 나오는 걸 보았다. 한데 이상하게도 동궁전에서 세자는 꼼짝을 하지 않고 있었다.

미리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하여 방책을 세워두길 잘하였다. 중전의 명에 당연히 세자가 방방의에 참석할 거로 믿고 손을 놓고 있었다가는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릴 뻔하였다. 전각마다 살펴보는 눈을 심어두길 잘하였다고 생각하며 유림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집을 한 번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제자리에 잘 있었다.

잔뜩 긴장한 유림의 뒤로 내관으로 변장한 자객들이 줄을 이어 동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들이었다. 두꺼운 몸태와 어울리지 않게 입가가 매끈하였다. 오늘을 위해 지난밤 말끔히 수염을 밀어버렸다. 내관에게 수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관복 아래로 검을 다리에 묶어 숨겨 두었다. 통이 넓은 관복이 검을 잘 가려주었다.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소맷자락 안으로는 작은 단검을 하나씩 숨기고 세자를 암살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눈가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유림과 내관으로 변장한 자객들은 조용히 동궁전의 문턱을 넘었다. 쥐라도 죽은 것처럼 동궁전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였다. 스산한 분위기에 이상스러움을 느낀 유림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동궁전에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전에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유림이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고개만 돌려 어깨너머를 보았다. 그리고 고갯짓을 하였다.

잘 훈련된 자객들에게 말은 필요치 않았다. 유림의 짧은 고갯짓 한 번에 두 무리로 단숨에 나뉘었다. 그중에 한 무리는 동궁전을 둥글게 에워싸서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지키고 다른 무리는 동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유림은 동궁전을 노려보며 밖에 서 있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에 유림은 전신이 당겨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이었다. 마냥 이 기분이 싫지 않은 유림이었다. 머지않아 손에 쥘 권력 때문인지도 몰랐다.

**

“아차차, 내 정신 좀 봐라.”

잘 걷던 하 내관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한심한 제 모습이 못마땅하여 혀를 차는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급한 마음에 신을 갈아신지 않고 그대로 나온 걸 방금 깨달았다. 관복에나 신는 목이 긴 검은 목화에 도포 차림이라니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없을 것이다.

현만 만나러 가는 것이라면 그냥 가겠다만은 지금 하 내관이 가려는 자리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왕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문무백관을 포함하여 과거급제자들과 그들의 가족과 친인척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세자를 보필하는 자가 의복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참석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 내관이 지나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제법 멀리 와 있었다. 동궁전의 지붕이 까마득하여 서 있는 자리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마음은 동궁전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몸은 근정전으로 가고 싶어 갈등하였다. 마음의 추가 어느 한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못했다.

우왕좌왕하던 하 내관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쩔 수 없지. 뛰어갔다가 오는 수밖에.”

하 내관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다들 방방의에 몰려간 것인지 사위가 적막하였다. 가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하 내관이 동궁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 냅다 뛰기 시작하였다.

머리에 쓴 갓이 바람을 맞으며 자꾸만 벗겨지려 하였다. 하 내관은 두 손으로 갓 끝을 꼭 잡고 오로지 달리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하였다.

“하아, 하아.”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동궁전의 푸른 기와가 하 내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는 상태였지만 하 내관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만큼 시간이 줄어들어 갈 길이 급했다.

급한 상황에 눈이 멀어 하 내관이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저급한 체력이었다. 동궁전을 목전에 무고 그만 무릎이 꺾이며 땅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찧고 말았다.

“아휴, 아파라.”

하 내관이 무릎을 손으로 감싸 쥐고 연신 문질렀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아픔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입에서는 연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제 다리를 내려보던 하 내관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를 악물고 일단 일어나보았다. 넘어지면서 크게 다치기라도 했는지 무릎을 제대로 펼 수조차 없었다. 아쉬운 대로 한쪽 다리를 절면서 하 내관이 동궁전으로 걸어갔다.

“이게 뭔 난리래.”

혼자인 게 지금처럼 다행이라고 느끼긴 또 처음이었다. 현이 자신의 한심스러운 모습을 보았다면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차며 그것으로는 모자라 타박을 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