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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민한량, 어디 아파?”
설거지중인 한량의 어두운 낯빛을 본 동료 남자 알바생이 물었다.
“아니야. 아프긴. 조금 피곤해서 그래.”
한량은 애써 웃음 지으며 설거지를 마저 해나갔다.
‘연하늘, 내가 널 반드시 밀어낼 거야. 반드시.’
***
영원은 하늘과의 식사 후 게스트룸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쉬고 있었다. 그가 싫어할 만한 질문들만 골라 하니 더 이상 애를 갖자느니 침대로 가자느니 하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저 내일 있을 한령의 타이틀곡 녹음에 대한 일정만 알려주고는 오늘은 쉬라고 한 게 다였다. 줄곧 직진하던 그가 냉랭해진 태도를 보이자, 좀 전에 그 앞에서 내뱉었던 말이 후회되었다.
‘나 사, 사랑한다면서요? 그런데 내가 바람 폈다고 신고할 수 있겠어요?’
영원은 저의 그런 말이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별로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는 것쯤은 눈치로 대강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한량에 대한 분노에서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바뀐 것 또한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왜 말 해주지 않는 거지?’
저번에 학창시절에 대해 물었을 때에도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사람처럼 저에게 베풀던 상냥함을 거둬가지 않았던가. 섣불리 호기심으로만 물어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과거 같았다. 이상했다. 마음 한 구석이 울렁인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까? 뭐라고 딱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영원은 하늘이 선물해 준 핸드폰 뒷면의 강아지 캐릭터를 엄지로 매만지며 조용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난 뭐 하러 그런 말을 해가지고, 그 사람을 슬프게 만들었을까?”
***
“주문하신 카페라떼 두 잔 나왔습니다~.”
한량이 일하는 카페 안으로 노을 진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영원을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궁리만이 머릿속에 가득해 일이 잘 되지 않았다. 평소 하지 않던 실수도 오늘은 몇 번이나 했는지 셀 수 없었다.
[영원]
일하느라 진동모드로 바꿔놓은 핸드폰이 그녀의 전화로 울리고 있었다.
한량의 핸드폰 화면 위로 보이는 두 글자에 기분이 조금 업 되는 것 같았다. 일하는 중이라서 길게 통화는 못하겠지만 일단 영원에게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는 사실이 한량을 묘하게 흥분시켰다.
‘그래, 그 연하남이 거슬리긴 하지만, 영원이 나한테 마음을 주면 끝 아냐?’
한량은 동료 알바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탈의실에 잠깐 들어가 문을 닫은 후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영원아, 잘 있었어?]
“네.”
영원의 목소리엔 다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미안, 내가 알바중이라 오래 통화는 못해.]
“오빠, 저 할 말 있어요.”
[오디션 됐구나? 축하해! 난 왠지 네가 될 것 같았어.]
“…고마워요. 그런데요, 우리, 이제-”
그녀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있었지만, 정작 하려던 말이 오디션 결과가 아니라는 듯이 말을 뱉었다. 영원은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했다.
***
하늘과의 아침식사 후부터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그녀는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결혼 후에 받은 때늦은 고백이었지만, 저가 짝사랑해오던 선배로부터의 사랑고백에 영원은 마음이 꽤나 설렜었다. 그리고 딱 한 번이었지만, 나름 뜨거웠던 영화관 데이트를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옅게나마 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붙여 준 남편 몰래 하는 간 떨리는 연애를 하는 것보다, 하늘에게 했던 두 번째 질문인 ‘수호가 저를 하늘에게 보낸 진짜 이유’에 대한 답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는 한량과의 이별을 ‘그 이유’를 듣기 위한 조건으로 내세우기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갈등 끝에 영원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우리, 이제 헤어질래요?”
영원은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했다.
[어?]
한량은 제 귀를 의심했다.
‘사귄지 얼마나 됐다고 헤어지자니?’
이게 무슨 말이고 무슨 경우인지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영원아, 무슨 일 있어?]
“들켰어요. 하늘 몰래 오빠랑 만나는 걸.”
[너, 그 남자 안 사랑하잖아.]
한량은 영원의 말에 즉답을 했다. 그렇지만 그 답을 들은 영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한량이 아니었다.
[그냥 부담 갖지 말고 나랑 편하게 계속 만나자.]
“제가 제 상황을 직면 못하고 너무 한량 오빠를 욕심 부렸던 것 같아요. 전화로 통보하듯 말해서 정말 미안해요… 이만 끊을게요.”
한량은 통화가 종료되었다는 화면을 보여주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안 돼!’
이대로 저를 가난에서 구해줄 유일한 동아줄을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영원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영원은 끝끝내 받지 않았다. 한량은 핸드폰을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두 눈엔 사나운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넌 끝까지 내 동아줄이어야만 해, 절대로.’
한량은 좁은 직원용 탈의실 안에서 삐뚤어진 욕망을 이글거렸다.
***
‘저녁, 챙겨먹어요.’
굳은 결심을 한 후 한량과의 통화를 마치고 나온 영원은 부엌 쪽 식탁에서 나는 맛있는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막상 식탁에 와 보니 하늘은 없었다. 저녁을 챙겨먹으라는 쪽지만 달랑 있을 뿐이었다. 영원은 혼자 먹는 밥이라면 지긋지긋했다.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음악적 재능. 게다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집안까지. 또래 친구들은 그녀를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런 영원에게 혼자 하는 식사는 지독한 외로움을 대면하는 시간이었다. 부모님에겐 이런 고민을 딱히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말 해 봤자 부모의 마음만 아프게 하는 일이란 것쯤은 어린 나이였어도 대강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서재인가?”
아침식사를 하며 그의 표정을 울상으로 만든 그녀였지만, 식사는 같이 하자고 해야 될 것만 같아 그가 있을만한 곳을 찾았다.
“실례합니다~.”
책장에 가득한 책들과 넓은 책상 위에 간소하게 있는 고가의 컴퓨터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책장의 책이나 책상 위 컴퓨터보다는, 엄청나게 편해 보이는 의자에 더 눈길이 갔다.
“대-박, 티비에서나 보던 이 의자를 여기서 보다니.”
이태리 명품 가구 브랜드로 유명한 모 브랜드의 의자를 보니 한 번 앉아보고 싶어진 그녀는 살며시 의자 위에 엉덩이를 올려보았다. 이어서 조심스레 등도 기대보았다.
“우와, 완전 편해! 하늘 씨는 이런 데 앉아서 일하는구나. 일이 저절로 잘 되겠는 걸?”
허리를 바로세우고 일하는 시늉을 하며 마우스를 움직여 본 그 때였다. 컴퓨터가 절전모드였는지, 마우스를 움직이자마자 까맣던 모니터화면에 컴퓨터 배경화면이 드러났다.
“엄마야!”
그리고 그녀는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지정되어 있던 사진을 보고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이, 이게 여기에?”
***
“한령아~ 나랑 놀자. 술 어때?”
한령은 저의 집에 술이 취한 채로 들어온 남자에게 냉수 한 잔을 건넸다.
“됐거든? 난 상대가 연하늘 아니면 안 마셔.”
“쳇, 아직도 그 놈 타령이냐?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니깐?”
탁.
그녀가 물컵을 짜증 섞인 손길로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널부러져있는 남자로부터 등을 돌렸다. 저에게 들이대는 이런 그의 행동이 익숙하지만 좋지는 않았다.
“그만 가지?”
그 때였다. 남자는 한령의 어깨에 두 팔을 두르며 치근덕대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나랑 한 잔만 하자니깐~?”
***
“연하늘, 나 몰래 나 훔쳐보면서 나 좋아한 거야?”
영원은 생존을 위해 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먹으며 분에 찬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하늘에게 실컷 따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밥을 먹고 힘을 내야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따져 물어야 될지 머릿속에서 잘 정리되지 않았다. 저를 오래전부터 알아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저에게 얘기하지 않은 그에게 이유모를 배신감이 들었다.
“아 씨, 쪽팔려.”
매섭게 밥을 먹던 고운 영원의 외모와는 상반된, 다소 거친 표현이 입에서 내뱉어졌다. 거친 표현의 원인은 서재 안 컴퓨터 속의 배경화면 때문이었다. 배경화면은 영원의 중학생 시절, 가수가 되고 싶었던 큰 꿈을 안고 음표 엔터테인먼트 오디션을 보았던 당시 녹화된 영상 한 부분을 캡쳐한 장면이었다.
“왜 하필 눈물 흘리기 직전 울먹거리는 표정을 캡쳐한 거야? 변탠가?”
영원은 밥뿐만 아니라 반찬도 한 젓가락 크게 집어먹으며 입안에서 오물거렸다.
탁!
“나는 그 때 연하늘 존재도 몰랐는데!”
그녀는 숟가락을 꽉 쥔 손을 식탁에 내리치며 다시 혼자서 화를 내었다.
“혹시, 그 땐 지금 얼굴이 아니었나? 그럼, 성형미남!?”
그녀는 혼잣말을 하다가 단번에 심각해졌다. 밥을 먹다가 뜬금없이 엉뚱한 상상력이 총동원되었다. 어쩐지 그의 외모가 이 세상 외모가 아닌 것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서양인처럼 높은 콧대. 화가가 세밀하게 그려놓은 듯한 쌍꺼풀과 유난히 긴 속눈썹. 남자입술 치고는 유난히 붉은 혈색의 도톰한 입술. 가지런한 치열에 진주처럼 고운 피부까지. 누가 봐도 잘생겼을 법한 그의 외모가 수상쩍어졌다. 외롭고 고독했던 식사시간을 혼잣말로 채우며 식사를 마친 영원은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식사를 마무리하는 혼잣말을 했다.
“아무래도 수상해. 조만간 어릴 적 사진이라도 보여 달라고 해야겠어.”
***
한령은 저에게 치근덕대는 술에 취한 남자를 애써 몸에서 떼어낸 후 소파에 뉘인 후 고이 개켜져 있던 담요를 꺼내어 덮어주었다. 술에 취한 상태여서 그런지 등을 소파에 뉘어주자 술기운으로 잠이 금방 드는 것 같았다.
드르렁~.
등을 붙인 지 얼마나 됐다고, 어느새 남자는 코까지 골며 잠에 빠졌다.
한령은 그런 남자가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보면서도 딱한 마음을 가졌다.
“연푸름, 니가 연하늘 형이라 봐준다.”
드르렁~.
푸름은 한령이 무슨 말을 하던지 신경이 안 쓰이는 사람처럼 큰 소리로 코를 골았다. 그런 푸름을 보며 한령은 작은 혼잣말을 덧붙였다.
“비록, 이복형이지만.”
***
“윽…!”
반 쯤 깨어진 초록색의 소주병이 어린 소년의 팔위에서 다시 산산조각 났다.
“아…아파요, 엄마….”
“누가 네 엄마야?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그만.’
“너만 보면 니 아비 생각이 난단 말이야!”
‘그만….’
“쓸데없이 똑같이 생겨가지고는…!”
‘제발 그만!’
“헉- 허억-”
하늘은 숨을 헐떡이며 번쩍 눈을 떴다. 하늘의 두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이 어느새 귓가를 스치고 있었다. 또 그 꿈이었다. 제 오른팔의 흉터를 만든 장본인과의 시절이 재현되는 꿈. 꿈이었지만 오른팔로 느껴졌던 그 날의 고통은 꿈에서도, 꿈에서 꾼 직후에도 하늘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벌써 출근할 시간이네.’
시간은 어느덧 출근할 때가 다 되어있었다. 어제는 영원과 침대 위에서 사랑을 나누며 아이부터 갖는 상상에 들떴지만, 저의 과거를 비롯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해대는 통에 온종일 마음이 괴로웠다. 회사 공식 휴무일이었지만 일을 해보려 서재에 들어갔을 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면제를 괜히 먹었나.”
앞으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영원에게 설명해 주어야 하나 머리가 아파오는 통에 잠도 잘 오지 않아 수면제를 좀 먹었을 뿐인데, 약기운으로 잠든 탓인지 악몽을 꿔버렸다.
“악몽도 가지가지다, 정말.”
하늘은 푸념을 하며 정신을 차려보려 침대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샤워를 하러 들어온 그는 머리끝부터 차가운 물줄기를 맞으며 애써 꿈을 잊어보려 노력했다.
18년. 저에게 고통을 준 그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합법적인 시간은, 18년이었다.
꽤 길다고 생각했던 기간이었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갈 8살 무렵부터 시작된 카운트다운은 어느새 3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힘들게 들어간 초등학교 또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그에게는 있었다. 어린 시절, 잘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 병원 신세를 몇 번이나 졌던 하늘은 키도 작고 몸도 유난히 약했다. 그리고 사건의 피해자였던 저의 얼굴이 방송사의 실수로 인해 몇 초간 모자이크 처리되지 못한 채 전국에 방송되었다. 그 때문인지 학교에 가는 날은 어머니와 지내던 지옥과 비교했을 때, 그저 장소만 다른 모양의 지옥이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그의 연약하고 초라했던 어린 시절과는 정 반대인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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