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고요하게, 뜨겁게 (합본)

<1장>

민낯처럼 보이는 여자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채로 들어왔다. 마치 백지처럼 하얘 당장이라도 바닥으로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여자는 책상에 손을 짚으면서도 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입술을 뗐다.

“열은 37.7도, 콧물 심하고 두통 있습니다. 근육통이랑 인후통도….”

무슨 일인지 여자가 말을 멈췄다. 이내 여린 입술의 피부를 설핏 깨물더니 칠흑빛이 서린 남자의 눈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분명 낯이 익은 사람인데.

윤우가 묘한 기시감에 그녀의 홍채 안쪽 깊숙이 바라볼 때였다. 여자가 입술의 엷은 피부를 재차 괴롭히며 입을 열었다.

“죄송… 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약부터 말씀드릴게요.”

잠시 후 여자는 처음 내뱉었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약을 읊기 시작했다.

“오*멘틴 계열 항생제랑요, 아미노펜계열 해열 진통제, 스테로이드제제, N-side 계열 소염제, 그리고 알레르기 약 중에 에*우스(항히스타민제제) 있으면 주시고 없으면 펙*나딘(항히스타민제제) 부탁드릴게요. 더불어 싱*레어(항류코트리엔제제)도 부탁드립니다.”

분명 이 정도 약리 지식을 갖고 있다면 적어도 이 분야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참, 슈*에페드린(기관지 확장제)은 필요 없어요. 부정맥 부작용이 있어서요.”

이윽고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는 게 힘들었는지, 여자는 양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윤우가 감기에 취한 여자의 눈을 바라보다 말고, ENT 스콥에 손을 뻗었다.

“석션할 시간은 있죠?”

그런데 어쩐 일인지 여자가 입을 꼭 다문 채 남자의 눈을 바라봤다. 진주알처럼 큰 동공이 남자의 눈 속을 모조리 훑자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언어가 없어도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다는 느낌.

수많은 사람을 만나 기계적으로 일을 하면 인간적인 면이 많이 사라진다. 그런데 오늘 높은 힐을 신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여자는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것도 몹시 감정적으로.

기린서.

이름만큼 하얗고 긴 목을 갖고 있는 여자는 당장이라도 큰 눈에서 염기 가득한 눈물을 만들 것 같은 얼굴로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다른 때라면 여자의 소원대로 약을 클릭하며 빠르게 오더를 내렸겠지만, 웬일인지 윤우는 여자의 눈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의자에 앉길 기다렸다. 그것도 짧지 않은 시간을.

그때, 윤우의 이런 고집스러움을 읽었는지 여자의 작고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여자가 의자에 앉았다.

앵두 같은 입술을 떼자 여자의 붉은 입 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 말대로, 비강 점막이 충혈돼 있었고, pharynx나 larynx(인후두) 역시 부어 있었다.

“비강도, 인후도 붉게 충혈돼 있습니다. 후비루도 꽤 보이네요. 평소 알레르기 비염 증상이 있으신 것 같은데 nasal(비강) 스프레이도 처방 내리겠습니다.”

그는 ENT 장비의 비경으로 석션을 하고 덱*(스테로이드제제)와 페*에프린(혈관 수축제)을 뿌렸다.

물론 여자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망설임 없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였다. 여자가 현기증을 느꼈는지 비틀거리며 떨린 팔을 숨기지 못하고 책상 끝을 힘겹게 잡았다. 얼마나 힘든지 손도 떼지 못하고 작은 숨을 불규칙적으로 내보냈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뗀 윤우가 여자를 불안하게 바라봤다. 여자가 마지막으로 퍽이나 긴 숨을 곧게 뿌리더니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굳게 감았다.

“괜찮… 습니다. 죄송해요.”

물론 여자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감기 증상이 아닌 듯 예쁜 이목구비는 불편했고 테이블을 짚은 손은 파르르 떨렸으니까.

하지만 꼭 닫은 입매를 보니 여자에게선 결코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고집이 느껴졌다. 윤우 역시 이미 균형을 찾은 여자에게 친절을 베풀 만큼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기에 제 시선을 곧바로 모니터로 향했다.

순간 여자가 역시 고개를 작게 굽혀 목례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여자는 기계적인 인사말을 뿌리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것도 여자에게 어울릴 법한 파우더 계열의 향을 짙게 남기고.

***

때는 두 시간 전. 기린서가 소강당에 놓고 온 메모지를 찾기 위해 몸을 숙일 때였다.

순간, 쾅 소리와 함께 강당 문이 다급히 열리며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가 질펀하게 큰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으으읍.”

서로의 옷을 급하게 더듬는지 섬유 부딪치는 소리가 급하게 퍼졌고, 무언가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까지 넓은 공간을 채우며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하읍.”

하필 이 타이밍에 메모장을 찾는 자신이 미안해졌다.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은 그녀인데 저들을 방해하는 느낌.

그때 형광색의 메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약혼식에 필요한 물품이나 준비물이 빼곡하게 적힌 접착식 메모지였다.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었지만 뜨겁게 달뜬 저치들을 뚫고 나갈 수도 없었기에 긴 손을 뻗어 종이를 주운 뒤 무릎을 모아 바닥에 앉았다. 몇 분만 기다리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안고.

그래, 적어도 이때까지는 당황스럽긴 했어도 주먹이 쥐어지진 않았다.

그때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흑. 서, 서균 오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손에 주먹이 쥐어지고 파르르 떨기 시작한 게.

“하아, 조금만 참아 봐.”

“후, 오빠. 히, 힘들다고요.”

정서균.

할머니께서 맺어 준 약혼자이자 친구였다. 사실 친구라 칭하기엔 많은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초중고를 함께 나왔지만 딱 한 번을 제외하곤 녀석과 한 반이 된 적이 없었고 심지어 대화조차 오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린서는 이런 녀석의 침묵을 좋아했다. 말이 없어도 남을 곤란에 빠트리거나 예의 없는 행동을 범하는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과하거나 부족함 없이 과묵한 친절을 베푼 녀석이기에 자신 역시 녀석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이 시간 전까지는.

그런데 이런 녀석에게 숨겨 둔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내 후배, 나유리. 작은 햇병아리처럼 따라 예뻐했던 귀여운 후배였다.

“선배. 여, 여기서 이러면….”

“후, 여기서 뭐?”

얼마나 사랑하면 장소 불문하고 저런 행동을 할까 싶어 턱이 내려앉았다.

“누,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나유리가 이렇게 겁이 많았던가? 내가 아는 유리는 겁 많은 여자가 아닌데?”

서균의 목소리는 당당했고, 유리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간드러졌다.

“흐읏.”

녀석의 쇳소리가 끊어지자 재차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레 나며 후배의 입에서 가칫한 숨들이 뿌옇게 뿌려졌다.

“하.”

린서의 눈동자가 경련이 인 듯 떨렸다. 한때 가슴에 품었던 녀석의 배신에, 아꼈던 후배의 뒤통수에 굵은 혈관이 팽팽하게 오르며 현기증이 일었다.

결국 린서는 굵은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연이어 살 부딪치는 소리와 구두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낯 뜨거운 몸짓과 함께 강당을 뿌리째 흔들었다.

이게 녀석의 민낯일까.

지금껏 자신이 봤던 모습은 뭘까.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녀석이 보냈던 한 시간 전 메시지를 떠올렸다.

자상하진 않지만 예의를 벗어나지 않게 예복을 논하던 문자는, 그 어떤 사심도 없이 결혼이라는 굴레 때문에 던진 형식적인 문자였던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진 깊은 절망감에 바닥을 짚는 린서의 손이 잘게 떨리며 땀을 토해냈다.

***

윤우의 서늘한 눈이 쌍둥이 동생의 얼굴에 꽂혔다. 순간, 윤우의 눈치를 보던 현주가 화르르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후배 녀석이 계속 우리 집에 살겠다는 게 아니라 세입자가 빠질 때까지만 있겠다는 거야. 4개월만 기다리면 된다고.”

“…….”

그는 쌍둥이의 종용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조각 같은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소파에 깊숙이 묻힌 몸은 거만했다.

“윤우야. 내가 장담하건대 후배가 막 남한테 폐 끼치고 집 어지르고 할 스타일이 아니라니까?”

“후….”

간절한 설득에도 제 팔을 풀지 않자 등줄기의 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당장 들어와야 하는데 이렇게 요지부동이라니.

현주가 왈칵 목소리를 높였다.

“사윤우! 어차피 방도 남아돌잖아!”

“…….”

“야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아! 애가 집도 절도 없이 4개월이나 떠돌아야겠어? 월세도 주겠다는데 얼마나 좋아!”

“…….”

이어지는 녀석의 무반응에 현주의 눈썹이 꼬리를 내리며 푹 꺼졌다.

“아, 진짜 까칠한 자식…. 아 제발, 4개월만 봐주라. 응?”

어느새 현주의 목소리는 더없이 지극하고 절절했다. 하지만 녀석은 온갖 회유에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단정하게 떨어지는 구두 굽 소리가 라운지에 퍼지며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향이 흘렀다. 그림자가 테이블을 채우자 윤우의 시선이 서서히 여자에게 향했다.

“어머! 린서 왔어? 그런데 너 안색이 좀 파랗… 다?”

현주의 말대로 린서는 예쁘게 박힌 이목구비가 하얗다 못해 파란 피부에 둘러싸여 있었다.

순간 윤우의 눈썹 하나가 호기롭게 올라갔다.

“아,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여자의 목소리는 마르고 갈라졌다. 감기 기운이 온몸을 잠식했는지 서 있는 모습도 위태로웠다. 그런데도 호텔 라운지까지 올라온 것이다.

“맞다! 감기약 처방받았다고 그랬지? 이쪽은 쌍둥이 오빠, 사윤우라고 해. 그나저나 오늘 병원 들렀다 가서 얼굴은 봤겠네?”

이윽고 유리구슬처럼 청초한 눈이 윤우에게 향했다.

“맞아, 언니.”

하얀 손을 곧게 편 린서가 윤우에게 길게 뻗었다.

“안녕하세요. 기린서라고 합니다.”

그제야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윤우의 손이 멈췄다. 그러곤 무슨 생각인지 그녀가 뻗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것도 한참을.

녀석의 망설이는 모습에 당황한 현주가 쌍둥이와 후배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봤다. 더 이상 안 되겠는지 눈썹에 힘을 주며 윤우에게 살벌한 기운을 보냈다. 당장 저 손을 잡으라는 듯이.

결국 긴 숨을 내쉰 윤우가 마지못해 여자의 손을 마주 잡았다.

“반갑습니다. 사윤우라고 합니다.”

서늘한 눈빛과 어울리지 않게 뜨거운 손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제 손을 잡은 채 놓지 않았고 열기 가득한 땀이 곧 자신의 손에도 엉겼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남자가 눈썹 하나를 작게 올렸다.

제 몸에서 아스라이 퍼지는 감기 기운을 읽은 걸까.

무언가 입을 열어 확인하려던 남자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물고 손을 풀었다.

“앉아 봐, 린서야. 음식은 주문했으니 곧 나올 거야.”

“고마워, 현주 언니.”

머지않아 각종 치즈와 과일 안주, 샌드위치 그리고 붉은 와인까지 차례대로 테이블을 채웠다. 린서는 짧지 않은 고민에 빠져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까맣게 잊은 채 와인 잔을 단정하게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것도 세 잔이나 연이어.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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