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윤우의 SUV가 단 한 번의 핸들링으로 아귀에 맞춰 주차됐다.

“집에 먹을 게 없는데… 마트에 잠시 들렀다 갈래요?”

오늘따라 유달리 친절하면서도 이슥한 남자의 목소리가 가슴에 깃털처럼 박혔다.

“네.”

“참, 제가 말했던가요? 손잡고 마트 가보는 게 꿈이라고.”

순간, 린서의 손을 잡은 윤우가 갓 사랑을 시작한 연인처럼 제 품으로 끌었다.

쿵.

연인이라면 당연히 하는 행동인데. 제 심장은 또다시 부정맥을 일으켰다.

“린서 씨, 이제 갈까요?”

이윽고 명치 어딘가에 손을 가만히 묻으며 발을 뗐다.

“그럴… 까요?”

저녁 마트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다들 퇴근하고 장을 보러 온 모양인지 사람들과 부딪칠까 봐 카트 미는 걸 멈추길 반복해야 했다.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린서가 우왕좌왕하자, 윤우가 린서의 어깨를 잡았다.

“사람이 많네요. 안으로 들어와요.”

윤우가 카트를 밀다 말고 그의 품 안으로 린서를 조심히 끌어당겼다. 그 어떤 저항도 못 한 린서가 남자의 가슴과 카트 사이에 가둬졌다.

“아….”

순간 윤우의 체취에 시트러스 향이 엉겨 린서의 몸을 가두고 에워쌌다.

머지않아 지독한 향은 린서의 블라우스와 스커트,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투과해 물들였다. 게다가 그의 날렵한 턱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이마를 스쳤다.

정말, 낯선 사람들보다 그가 더 불편했다. 그렇다고 불편한 걸 불편하다 외칠 용기도 없는데.

원래 연인들은 이 불편한 자세를 알면서도 좋아서 붙어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녀 역시 이런 스킨십은 즐겨야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마음은 생소한 감각을 일며 또 다른 낯선 감각을 탄생시켰다.

이를 테면… 낮 동안 자란 그의 까칠한 수염이 녹녹하다든가.

윤우는 육중한 사람이 오거나, 앞을 보지 않고 뛰어오는 아이를 발견할 때마다, 더욱 세게 린서를 가뒀다. 결국 장을 보는 내내 새로운 감각에 정신 팔려 윤우가 뭘 고르는지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끝낸 윤우가 더욱 짙은 시트러스 향을 뿜으며 주방으로 내려왔다. 그러곤 먼저 내려온 린서를 향해 콧등을 찡긋하며 마트에서 사온 식자재를 손질했다.

“매운 음식은 잘 못 먹는다고 했죠? 닭볶음탕 안 맵게 해볼게요.”

그는 이렇게 그녀가 말한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며 이렇게 재빠르게 적용했다. 이런 그에게 보답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린서가 말했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을까요? 저도 어느 정도 요리는 할 수 있는데.”

사실 린서의 요리는 수준급이었다. 강제로 대학 방학 때마다 단기 속성으로 요리 학원을 다녀야 했기에 린서뿐만 아니라 기민서까지 요리 하나는 제대로 배웠으니. 하지만 맛이라는 게 개인차가 있어 제 요리가 그의 입맛에도 맞을지는 미지수였다.

“잘하는 사람이 해야죠.”

“아….”

사실 사윤우 역시 못 하는 요리가 없기에 곧바로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배운 걸 자랑하며 나서기도 부끄러웠다.

대신 린서는 로봇청소기 동작 버튼을 누르고 자신은 청소기가 닿지 않는 구석 쪽으로 청소를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세탁실로 걸어가 빨래를 분류했다.

이러니 뭔가… 결혼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린서의 입가에 방싯 미소가 잡혔다.

그와의 결혼이 이런 거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아니 굳이 비유하자면 천국이나 다름없었을 것 같은 느낌.

사실 스물아홉 살 이전의 내 삶은 그저 외출 가능한 라푼젤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를 위한 것 같지만 철저하게 그들에게 유리하게 길러지고 교육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곧바로 그녀가 잿빛 기억 따윈 눌러 버리고 남자가 주는 편안과 안락을 즐기며 집안을 정리했다.

“린서 씨. 손 닦고 식사해요.”

윤우의 자상한 목소리에 그녀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로 가서 손을 닦았다.

“네, 갈게요.”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가 볼에 걸린 보조개를 금세 감췄지만 눈가에 걸친 미소까지 숨기진 못했다. 그녀가 작은 발을 고요히 떼며 식탁으로 다가가자 윤우가 의자를 빼주며 맞은편에 앉았다.

“맵진 않을 거예요.”

“고마워요.”

그는 재차 미소를 지어 주며 앞 접시에 닭과 감자 등을 골고루 놓아줬다.

“잘 먹어요. 그래야 안 아프죠.”

어찌 보면 별거 아닌 형식적인 말.

하지만 여덟 살 때부터 위축됐던 내 마음 어딘가가 꿈틀거리며 펴지게 만들었다. 마치 심폐소생술처럼. 사현주와 사윤우 남매는 오그라든 자존감마저도 펼치는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달리 보답할 길이 없던 그녀는 제법 씩씩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많이 먹을게요.”

찬찬한 린서의 목소리에 윤우가 또다시 활짝 웃으며 린서의 컵에 물을 따라줬다.

다음 날, 린서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결혼할 사람을 골랐어요. 약속대로 세 번째 선본 남자와 결혼하겠습니다.”

[…….]

물론 할머니께선 지금 당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

하지만 주선자와 통화해 보면 곧바로 알게 되실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불호령이 떨어지며 극심한 반대를 하실 테고.

아니나 다를까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최 여사에게 전화가 왔다.

“알아보니 ‘사윤우’라는 대타가 나왔다고 하더구나. 그건 곤란하겠는데.”

분명 저 이유가 아니다. 기민서까지 어깃장을 놓은 이유가 있는데. 왜 그걸 말씀하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래야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을 테니.

그래서 나는 약간의 억지를 부리기로 결심했다.

“할머니께서 거절하신 이유, 솔직히 서균이 때문 아닌가요? 대타라서 세 번째 남자가 안 되는 게 아니라, 솔직히 어떻게든 서균이랑 잇고 싶은 마음에 온갖 핑계를 끌어들이시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

린서는 제발 힌트라도 얻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말했다.

“약혼만 하면 넘겨주겠다던 집도 안 넘겨주시고. 심지어 네 번 선본 남자 중에서 고르라고 본인 입으로 호언장담을 해놓고 이렇게 우기시는 이유가 뭐겠어요? 바로 서균이 때문에 그러시는 거잖아요.”

순간 수화기를 타고 급격히 빨라진 할머니의 호흡이 느껴졌다. 노기 탱천한 할머니가 무서웠지만, 고지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심장이 떨렸다.

이윽고 최 여사는 격앙된 어조를 숨기지 않고 갈라진 목소리를 내질렀다.

[기린서! 민서도 그 남자랑 선을 봤다고! 사윤우 그 녀석을 허락할 것 같았으면 너보다 먼저 선을 봤던 민서랑 짝을 지었겠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사람을 갖다 붙이는 게야!]

할머니 목소리에 린서가 잘게 몸을 떨었다. 곧바로 린서가 품에 안고 있던 쿠션을 세게 끌어안으며 배에 단단히 힘을 줬다.

“할머니.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사윤우 그 사람은 민서랑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결혼이라니요? 요즘 어떤 젊은 사람이 집안 강요로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랑 결혼을 하죠?”

다행히 이 말이 먹혔던 걸까. 붉다 못해 터질 것같이 목소리를 높인 할머니가 말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또 다른 새로운 총알을 장전 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 예상대로라면 원인을 알 수 있는 무언가가 나올 타이밍이 분명했다.

이번만큼은 절대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 빠른 할머니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솔직히 말하마. 그 집 엄마랑 된통 다퉜어. 그 맹랑한 어미가 감히 넘보지 못할 것을 넘보며 간을 보기에… 법적 공방 직전까지 갔다. 지 아버지가 서기 제약 지분을 갖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남의 물건에 침을 바르다니! 물론 그 계집애 아비가 나서서 곧바로 깔끔하게 정리됐다만, 그런 싹수 노란 집에 너를 보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이런. 생각보다 많은 과거가 얽혀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랬으니 당연히 그 집안 좋은 윤우를 민서의 짝으로도 허락하실 수가 없었겠지.

하지만 린서는 여기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미 엎지른 말, 더 이상 번복은 없었다. 그게 실패로 끝나든 성공으로 끝나든 앞으로 나아가는 길밖에 없었다. 이판사판이니까.

“그건 제가 거절하겠습니다. 분명 이번에도 할머니 마음대로 약속을 또다시 어기시면 그땐 이 집과 연을 끊겠다던 말, 기억하실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

예상대로 할머니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과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허락도 거절도 못 하는 게 당연했다. 손녀를 잃든 사윤우와의 결혼을 허락하든. 두 결정 모두 할머니에게 큰 절망을 가져다줄 테니.

어쩌면 손이 귀한 할머니에게 나라는 사람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존재일 수도 있었다.

“그럼, 전화 끊겠습니다.”

린서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가까스로 핸드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머그잔을 쥔 채 2층 테라스로 나온 린서가 할머니와의 다툼을 지우기 위해 애써 심호흡을 했다. 물론 그런다고 지워질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무심결에 본 기사 하나에 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깨끗이 지워졌다. 바로 윤은형의 기사였다.

각 포털의 연애면 헤드라인에는 은형의 야심작이 흥행에 성공했다며 앞다투어 기사를 내보냈다.

뉴스마다 평론가의 호평이 줄섰고 댓글 창 역시 칭찬으로 가득 찼다. 게다가 몇몇 기사에는 만년 조연배우였던 은형의 인생 스토리까지 언급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여자의 일상을 소개했다.

어느덧 린서는 자신도 모르게 은형의 기사를 클릭했다.

그러자 불우했다던 여자의 어린 시절은 물론 불행했던 전남편과의 결혼 생활까지 재조명되고 있었다.

“이런….”

그런데 그때, 테라스 문이 열리며 짙은 커피향이 후각 세포에 깊이 닿았다.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윤우의 긴 팔이 테라스에 매달린 린서를 감쌌다.

“……!”

순간 린서의 홍채가 한껏 오그라져 그대로 멈췄다. 물론 윤우는 자연스럽게 커피향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봄이 깊어지네.”

린서는 와닿지 않는 윤우의 갈라진 목소리에 몸을 옴쳤다. 스칠 듯 말 듯 묘하게 서 있는 몸에선 열기가 돋았고, 커피향은 바디워시 향과 섞여 표표히 떠돌았다.

“…그러… 게요.”

연이은 스킨십에 당황스러웠던 걸까.

어느새 입에선 제 속도를 내지 못한 말이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밤이 늦었는데… 커피 마셔도… 괜찮아요?”

“워낙 자주 마셔서 느낌도 없는 걸요.”

등 뒤에서 들리는 남자의 잠잠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울렸다.

“너무 많이 마시면 몸에 안 좋을 것 같은데….”

“하하. 지금 내 걱정 해준 건가요?”

순간 고개를 기울인 그가 린서의 동공을 깊숙이 바라봤다. 린서가 부끄러운지 눈동자를 밖으로 돌리자, 윤우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며 말했다.

“그런데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핸드폰 보고 있었어요.”

“음. 혹시 언제쯤 식 올릴지 생각은 해봤어요?”

벌써 식이라니….

린서가 당황했는지 눈 둘 곳을 몰라 방황했다.

하지만 2세를 생각한다면 남자도, 자신도.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 역시 선 자리가 연이어 잡혔을 게 분명했을 터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이를 테면, 2세를 가지려면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당연하면서도 얼토당토않은 생각 .

결혼식 하나에 밤일은 물론 2세까지 고민하는 맹랑한 자신이라니.

물 오른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는지 까슬거리는 턱이 린서의 이마에 뾰족이 닿았다.

“앗.”

우연히 벌어진 그 작은 스킨십 하나에 숨이 멎은 듯 고요해졌다. 얼마 남지 않은 하얀 벚꽃이 손등에 곱게 떨어졌지만, 린서는 감촉조차 느낄 여력이 없었다.

“결혼 날짜가 늦어지면 양가 어르신들 반대할 시간만 늘려 주는 셈이니까, 이번 여름 어때요?”

“…….”

“이왕이면 초여름. 너무 더우면 식 올리기도 힘드니까.”

린서는 까슬한 턱에 빠져 날짜 계산을 할 틈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늦게, 린서의 눈과 입이 동시에 한껏 벌어졌다. 초여름이라면 2개월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

“초여름이라면… 6월이요?”

“사실 5월도 괜찮아요.”

맙소사. 원래 이 남자는 쇠뿔도 단김에 빼는 걸까.

한번 결정하면 망설임이나 주저함 따윈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