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간째, 빈 낚싯대만 올라오는 것을 보고 우현은 오늘은 아무래도 날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낚시도구를 챙겨 차 뒤 트렁크에 집어넣고는 별장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우현이 전기 스위치를 올려 별장 앞마당에 불을 켜고 실내에도 불을 환하게 켰다. '우현은 어두운 것을 극히 싫어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더욱 더. 그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생긴 우현만의 독특한 버릇 같은 것이었다. '다시 차에 가서 낚시도구를 챙겨와 낚시 도구를 창고에 넣고 문을 닿으려던 순간, 우현은 테이프로 꼼꼼하게 붙여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처음엔 그냥 쓰레기려니 생각하고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종이의 무늬가 눈에 익어 종이를 펼쳐 보았다. ' - 장우현 씨, 정말 죄송하지만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쪽지 남깁니다. 언제 보시게 될지 모르지만 이 쪽지 보시면 꼭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한 달 전 이곳에서 우연히 만났던 예림. -' 오늘 날짜와 예림의 전화번호로 보이는 숫자가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한 우현은 한 달이 지나고 나서 뜬금없이 연락을 해온 예림의 저의가 궁금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날 이후 예림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생각하던 차에 쪽지를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급한 마음에 우현은 휴대폰 전원을 켰다. 이곳에 올 때면 매니저 때문에 휴대폰 전원도 항상 꺼두었다. 금방 왔다 간 것이라면 운 좋게 만날 수도 있을 텐데 자신이 별장을 비운 시간은 고작해야 2시간 남짓. 그 사이에 예림이 왔다 간 것이라면 금방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전화번호를 누르는 내내 우현은 묘하게 설렜다. 한 달 전쯤 우연히 만나 불같은 사랑을 나누었던 예림이 이곳에 온 며칠 전부터 생각이 났었는데 이심전심인가?' 컬러링도 없는 신호음이 한참이나 울리도록 전화를 받지 않아 우현이 막 휴대폰을 끌려고 할 찰나였다.' “네.”'예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가 맞나 하며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우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쪽지 보고 전화하는 건데?”' “쪽지요? 아! 장우현 씨?”' “지금 어디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예림은 제 기도가 통한 것일까 생각하며 차를 세웠다. 지금 우현이 별장에 있다면 지금이 임신 사실을 말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만큼 만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이런 중차대한 일을 전화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다 이해하고 받아 주리라 마음먹으며 예림은 우현에게 말했다.' “지금 별장에 계신 건가요?”' “음. 그런데 언제 왔다 간 거지?”' “조금 전에요. 지금…… 10분 정도만 가면 그곳에 도착할 수 있는데…….”' “그럼 이쪽으로 오지 그래?”' “그, 그래도 될까요?”' “기다리고 있지.”' 우현은 전화를 끊고 난 후 다시 휴대폰 전원을 껐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예림의 쪽지를 본 순간부터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냥 하룻밤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우현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최대한 편안한 스타일의 옷으로 갈아입고 난 후 창가를 어슬렁거리며 예림의 차가 들어오는지 확인하다가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이자 커튼을 치고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척하며 소파에 앉아서 예림을 기다렸다. '예림이 자신에게 연락을 해 온 것은 아마도 한 달 전 일을 빌미로 뭔가 자신에게 요구를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우현은 피식 웃으며 그녀가 어떤 제안을 할지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만나자고 매달릴까? '제법 신선한 방법이었다. 한 달이나 있다가 연락을 하다니 제법 영리한 구석도 있는 여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예림이 바로 자신에게 매달렸다면 식상해서 바로 거절하거나 금세 관계가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차에서 내리긴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 뭐라고 말을 시작할지 무척이나 떨리던 예림은 문 앞에 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 손을 들고 노크를 하려다가 다시 손을 떨구고 하기를 몇 차례. '‘그래, 모 아니면 도야. 어차피 그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나 혼자 낳아서 잘 키우면 돼. 그냥 난 그래도 그가 친부니까, 그에게 최소한의 예의니까, 그냥 말하는 것뿐이야. 이 일로 그에게 어떠한 것도 바라지 말자.’'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예림은 신부님의 말씀을 떠올리고는 용기를 끌어 모아 문을 ‘똑똑’ 두드렸고, 조금의 시간차를 두고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우현의 모습이 보이자 예림은 어색함에 뭐라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냥 “안녕하세요.” 란 밋밋한 인사를 건넸고, 우현은 “들어와.” 란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우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예림의 눈앞에 한 달 전 그 일이 마치 영화처럼 펼쳐졌다. 그땐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그 일로 인해 예림은 인생 최대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버렸다.' 어색하게 서 있는 예림을 소파 쪽으로 인도한 우현이 주방에서 빛깔이 고운 와인 두 잔을 따라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 “한 잔…… 할래?”'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운전을 해야 해서요. 마신 걸로 할게요. 고맙습니다."' ‘또 시작이군. 저 괜찮다, 고맙다.’ '조금 답답할 정도로 꽉 막혀 보이는 예림이 그날 밤 그렇게 쉽게 자신의 처음을 자신에게 허락했다는 사실에 우현은 또다시 아랫도리로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꽉 막혀 보이지만 그날 밤 침대에서는 달랐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우현은 저도 모르게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예림에게 형식적으로 묻고 있지만 어떻게 알았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자신의 뒷조사도 하고 자신의 스케줄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지독한 팬이겠지.' “몰랐어요. 그냥 할 말이 있는데…… 어떻게 연락해야 될지 몰라서…….”' “그럼, 우연이라 이건데 우연치곤…… 우리 너무 자주 만나는 것 같지 않나?”'“네?”' “뭐야? 할 말이라는 게……?”' 우현은 예림의 할 말이라는 게 뭔지 대강 예상은 하고 있었다. 순진해 보이지만 꽤나 계산적이고 똑똑한 여자였다. 남자를 아주 잘 아는.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사라지고 난 후 한 달이 지나고 연락을 해 오다니. 조금 신선하긴 했다. 우현도 여기 온 후 며칠 동안 예림의 생각을 했었으니까 예림이 사귀자, 만나 달라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간은 그럴 생각도 있었다. 의도적이라면 분명 이 여자는 보통은 아닐 것이다.' “저…… 그게…… 그게…….”' 우현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니 예림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어떡해? 나 못하겠어. 도저히 말 못하겠어.’'예림이 계속 입술만 축이고 있자, 와인 잔을 내려놓은 우현이 예림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괜찮아. 이미 다 예상하고 있으니까 말해도 돼.”' “네? 정말 제가 하려는 말을 알고 있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해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우현도 알고 있다니. 예림은 두 주먹을 꼭 쥐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우현에게 말해 버렸다.' “저…… 임신했어요!”' “뭘 해?”' 예림의 어깨를 잡고 있던 우현의 손에서 힘이 좌르르 빠져나갔다.' “뭘 했다고?”' “다 알고 계신다면서요?”' “하하하…….”'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한 우현을 보며 예림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대체 뭘 생각하고 있던 것일까. 무엇이 됐든 자신이 한 말은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 한참 동안 크게 웃던 우현이 예림을 쳐다보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야. 임신을 했다고?”' “네.”'모깃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예림이 대답을 하자 우현은 다시 되물었다.' “확실해?”' “아직 병원에 가 보지는 않았지만 임신 테스트기로…….”'예림의 말을 딱 잘라버린 우현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길로 예림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내 말은 그 애가 내 애라는 게 확실하냐고?”' “네?”'우현이 자신을 뚫어지듯 강렬하게 쏘아보는 눈빛에 예림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보다 그는 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저렇게 묻는 것일까?'그날 분명히 자신이 처음이었다는 것은 우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어떻게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상처받은 예림은 울먹거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장우현 씨, 저…… 저는…….”'“그 애가 내 애라는 증거 있냐고? 난 그날 분명히 제대로 처리한 것 같은데?” '“아! 저, 저는 다, 당신이 처음이었어요.”'이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예림은 눈물을 글썽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건 알지.”' “그런데 어떻게……?”' “내가 처음은 맞지만 그 후에 네가 누굴 만났는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안 그래?”' 자신을 빤히 보고 있던 예림의 눈가에서 참고 있던 눈물이 차오르자 이번에는 우현이 고개를 돌렸다.' “뭘 어떻게 하시라는 거…… 아녜요. 그냥 그래도 당신이 친부니까 알고 계시라고…….”' “웃기지 마.”' “지금까지 남자랑 잔 건, 당신이 처음이었고 그 후로도 없었어요.”' 그에게 뭘 바라고 온 거 아니었잖아?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말하려고 온 거지. 예림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자 우현이 조금 당황한 듯 예림을 올려다보았다.' “전 할 말 했으니까 가 볼게요.”' 예림이 밖을 나가고 시동 켜는 소리가 들리고 그때와 똑같았다. 우현은 예림을 잡지 못했다. 아니 잡을 자격이 없었다. 무슨 사이라고 그녀를 잡는단 말인가. 예림이 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예림의 임신했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우현은 떨리는 손으로 예림이 입도 대지 않은 와인을 단숨에 입 안에 털어 넣고, 거실을 서성였다.' 그날 확실히 밖에다 했었나?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신이 없었다. 언제나 여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철두철미하던 우현이었는데 그날은, 예림을 안았던 날은 확신이 없다. 변명을 하자면 일찍부터 혼자서 몇 잔 걸치며 적당히 취해 있었던 상황이었고, 또 그날 예림은 정말 매우 강렬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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