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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드디어 정리가 끝났다. 물티슈를 뭉치며 유정은 이마를 훔쳤다.
“휴우.”
피로가 몰려와 방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소파 베드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로 소파로 사용하는 건데도 고시원 침대보다 크고 편안했다. 온통 책책책 파일파일파일 종이종이종이로 가득 찬 서재는, 방 다섯 개인 혜라 집에서 부모님 쓰시는 안방, 딸 방, 아들 방에 이어 네 번째 크기였음에도 역시 고시원보다는 넓었다.
헨젤과 그레텔은 과자집을 만났지만, 네 식구 중에서 셋이 법조계인 이 집은 대신 종이집을 세우나. 벽면을 빙 둘러 사면을 감싼 책장에는, 하나같이 두껍고 한자까지 섞인 어려워 보이는 책들이 가득했다. 제목조차 읽기 어려운 게 수두룩 빽빽이었다.
고시원에서 챙겨 온 짐이라곤 미싱, 패턴, 원단에 옷가지 몇 개 정도인 유정은 기가 죽는 기분이었다. 작은 고시원의 얼마 되지 않는 짐에도 책 같은 건 없었으니까. 어쨌건 제일 소중한 미싱과 패턴은 소파 베드 옆 책상에 잘 올려놓았다.
손에 쥔 물티슈로 괜히 미싱 한 번 더 닦다가 건너편 책장에 세워진 액자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혜라 부모님의 결혼사진이다. 딱딱한 분위기의 서재에서 그것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세월의 흔적이 흘러넘치는 옛날 사진인데도 어머님은 몹시 아름답고 젊었다. 혜라에게 이끌려 처음 서재 들어왔을 때 유정 눈엔 사진부터, 정확히는 어머님의 미모부터 시야에 들어왔었다. 홀린 듯 사진을 보는 유정에게 혜라는 씩 웃었다.
<우리 엄마 아빠.>
<우와, 어머님 너무 예쁘세요.>
<우리 엄마 예쁘다는 소리 들을 때마다 삼성전자 주식 한 주씩 모았으면 지금쯤 억만장자 됐을 텐데.>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짐을 나르는 혜라의 개구진 표정을 보고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얼마 안 되는 짐이라도 둘이 나르고 정리하는 데는 품이 들기 마련이나, 혜라의 밝고 씩씩한 분위기에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다.
서재를 왔다 갔다 하며 자꾸 사진에 눈이 갔다. 미모의 어머님 옆에 선 아버님은 또래라기보다 삼촌 정도로 나이 많아 보였다. 그리고 실례지만 ‘미녀와 야수’처럼 보였다. 좋게 말해 강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판사라기보다 산적처럼 우락부락했다. 강혜라 변호사는 아버님을 똑 닮았다. 상위 1% 미남 대표님은 어머님을 쏙 빼닮으셨고. Beast 부녀와 Beauty 모자. 혜라 변호사님도 엄마를 닮았으면 아주 미인이었을 텐데…….
<완전 거푸집이지? 엄마랑 오빠, 아빠랑 나.>
<그, 그러게요.>
독심술이라도 하는 듯 불쑥 말을 걸어와서 깜짝 놀랐다.
<오빠는 엄마 판박이라 덕분에 미남이야. 나도 엄마 닮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소리 엄청 듣고 자랐어. 그 소리 들을 때마다 천 원씩이라도 모을 걸.>
‘내가 왜 그 생각을 옛날에 못 했을까, 조기 은퇴 가능했는데.’ 신파조로 읊는 혜라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자니, 혜라가 우는 척을 그만두고 웃어댔다.
<어휴, 아빠만 왕따 당하면 불쌍하니까 내가 아빠랑 편 먹어준 거야. 나까지 엄마 닮았으면 아빠 혼자 못생겼단 소리 들을 거 아냐. 공평하게 2:2는 되어 줘야지. 세상천지 다 뒤져 봐도 나 같은 효녀 없을 걸, 안 그래?>
유정은 또 웃었다. 개그맨도 아닌데 혜라처럼 남 많이 웃겨주는 사람 처음 보았다. 잃어버린 10년의 기억, 아득하고 어두침침한 앞날, 무서웠던 고시원 옆 방 사람으로 얼룩진 처참한 하루를 구원해 준 사람이 혜라다.
<우리 집으로 가자.>
고시원에서 옆방에 안 들리게 소곤거리는 혜라 목소리가 천상의 구원 나팔처럼 들렸다. 어느 순간부터 반말이었지만 자연스럽고 친밀감이 느껴져 유정은 더 좋았다.
벌써 폐 많이 끼쳤는데 집에까지 쳐들어가도 될까 잠깐 망설였지만, 누군지 모르는 무서운 아저씨가 옆방에 사는, 방음도 안 되는 고시원에서는 사실 일 분 일 초도 더 머무르기 싫었다. 유정 역시 거의 귀에 대고 말하다시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도 돼요? 고, 고맙습니다. 근데…….>
<근데 뭐?>
<부모님께 안 여쭤 봐도 돼요?>
왜인지 혜라 변호사가 급히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잠깐 웃다가, 눈물마저 배인 채로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우리 부모님 여행 중이셔. 돌아오시려면 한 달도 넘게 남았거든.>
<오빠한테는요?>
<아이고, 착하네.>
혜라 변호사는 ‘신경 쓰지 마, 괜찮아’를 연발하며 유정의 머리를 문질문질 쓰다듬더니 박수 한번 짝 치고 거침없이 일을 진행시켰다.
<일단 중요한 것만 들고 가자. 어차피 월말까지는 지불됐을 거 아냐. 급한 대로 필요한 물건들만 챙기고, 다음에 또 오자고. 이불? 우리 집 거 줄 테니까 놔 둬, 놔 둬.>
겨울옷이나 이불 같은 부피 크거나 당장 쓸 일 없는 물건들은 혜라의 성화에 죄다 놔두고, 미싱 포함 두 사람의 양손으로 감당 가능한 만큼만 들고 나왔더랬다.
혜라는 그저 답답하기만 한 상황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진 동아줄이자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따스한 태양이었다. 얼굴은 미남이지만 싸늘하고 저 혼자 잘난 줄 아는 대표님보다 혜라 변호사님이 인간적으로 백 배 천 배 나았다. 사람은 역시 얼굴보다 마음이지, 흥!
대표님이 떠오르자 괜히 뾰로통해져서 소파 베드에 파묻히듯 뒹굴었다. 푹신한 소파 베드와 혜라가 가져다 준 시원하고 가벼운 인견 이불이 삐죽거리는 유정을 달래듯 감싸오는데, 갑자기 방 밖에서 ‘멍!’ 하고 큰 소리가 난다.
“으악, 이 시간에 짖으면 안 돼!”
유정은 식겁해서 거실로 튀어나갔다. 비록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도 이 집에 사람이라곤 유정 혼자뿐이지만 한밤중에 짖으면 이웃에 폐가 되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직 하나는 어린 강아지라 짖음 방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서 유정을 보자 더 신나게 짖어댔다. 멍멍! 멍! 멍멍멍멍!
그 소리에 잘 자고 있던 두리와 세쯔도 깨어났다. 자기 예쁜 거 잘 아는 멍아치 포메 두리랑, 참지 않아 당돌하고 사랑스러운 말티즈 세쯔도 알알! 캥캥! 함께 짖는다.
“너희, 잘 자다가 왜 그래. 지금은 밤이야, 짖으면 안 돼!”
유정이 안절부절 못하며 애들 달래러 펜스 문을 열었을 때였다. 두리랑 세쯔에 비해 덩치도 우월하고 힘도 센 하나가 때를 놓칠세라, 틈 사이로 냅다 뛰쳐나갔다.
그러잖아도 잠들기 전까지 더없이 무해한 얼굴로 방심시킨 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유정의 혼을 쏙 빼놓던 하나다. 두리랑 세쯔는 방임 학대의 여파가 아직 남아서 덩치도 작고 예민한 구석이 있지만, 하나는 시고르자브종답게 그저 해맑고 구김살 없이 밝은데다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만큼 사고를 쳐댔다.
<애나 개나 얌전하면 어디 아픈 거야.>
혜라 변호사님은 파하하 웃고 나가셨지만, 유정은 애들 알게 된 지 겨우 반나절 지났다. 팔팔 하나, 도도 두리, 까칠 세쯔 정도는 파악했지만 이제 살만해졌다고 말썽부터 부릴 줄은 몰랐지. 물론 그래봐야 펜스 안, 뛰어봤자 집 안이지만.
“하나, 멈춰! 하지 마! 우리 집 아니야!”
따끈한 인절미처럼 주욱 늘어나 중문 벅벅 긁는 하나를 식겁하며 떼어내려 붙잡은 순간, 중문이 열렸다. 유정은 하나를 두 손으로 잡은 채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꺄악!”
넘어지면서도 하나 다칠까 품에 껴안고 본인은 냅다 바닥에 박치기했는데, 그 은혜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나는 미꾸러지처럼 빠져나가 신나게 멍멍 짖어댔다.
“이 녀석.”
커다란 손이 하나를 안아 올린다. 눈앞의 길게 쭉 뻗은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올리니 웃는 표정으로 하나를 보던 잘 생긴 얼굴이 나타났다. 눈가에 잔주름을 만들며 하나에게 눈웃음 보내던 인한과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인한의 입이 불편한 건지 화난 건지 놀란 건지 꾹 다물렸다. 피로가 드리운 낯빛이 창백하다 못해 석고상처럼 하얗게 질린다.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백옥 같은 얼굴이 더 하얘져서 예쁘기는 했는데, 유정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툭 난입한 자신의 처지가 송구해 자꾸만 실 잃은 마리오네트처럼 고개가 숙여졌다.
“다…… 다녀오셨어요?”
바닥과 부딪힌 데가 얼얼해서 잽싸게 일어나지도 못하고 꾸무럭대며 인한의 뒤를 살폈다.
“혜라 변호사님은요?”
“밀린 일이 많아서 늦는다더군요.”
응? 그럼 이 한밤중에 대표님이랑 나랑 둘……? 잠깐 뇌에 힘 풀려서 쪼그린 유정에게 하나가 날다람쥐처럼 날아들었다.
“아악!”
유정은 다시 바닥과 쩍 달라붙었다. 인한이 자기 가슴께까지 안아 올린 하나다. 하나는 자기 몸길이 다섯 배도 넘는 높이에서 용감무쌍하게, 혹은 이판사판, 또는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내렸다. 유정 배는 폭신하기에 하나는 아무런 데미지를 받지 않은 것 같았지만, 하나의 몸무게와 중력가속도에 타격받은 배는 꿀렁 뒤틀리며 지옥의 고통을 선사했다.
“흐으으…….”
절로 눈물이 배어나왔다. 웅크려서 꿈틀대던 유정에게 하나가 병 주고 약 주는지 쫑쫑 다가와 헥헥 얼굴을 핥는다. 프로펠러처럼 팽글팽글 도는 꼬리가 연방 유정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그만, 하나야, 그만!”
침과 꼬리와 솜방망이 앞발에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돌연 하나가 뚝 떨어진다. 허겁지겁 옷자락에 대충 얼굴 닦고 정신 차려보니 인한이 하나를 들어 펜스 안에다 넣고 있었다. 앗, 멍뭉이들 케어는 내 일인데. 부랴부랴 펜스로 다가가는 유정의 눈에 뭔가 오물거리는 세쯔가 눈에 띄었다. 애들 저녁밥 다 먹고 치웠는데……?
“꺅, 뭐 먹는 거야, 세쯔?”
강아지 키우면서 제일 무서울 때는, 먹을 걸 주지 않았는데 뭔가 옴뇸뇸거리고 있을 때다. 십중팔구 먹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좋다고 입에 넣은 것. 유정은 후다닥 펜스에 들어가서 세쯔를 붙들었다.
“입 벌려!”
세쯔가 고집스럽게 입을 앙 다물고 열지 않았다. 앙칼지게 도리도리하는 세쯔에게 식은땀이 흘렀다. 양파를 먹었니 마니 난리 났던 게 불과 오늘 일이다.
“아이 참!”
“세쯔.”
옆에서 불쑥 간식을 든 손이 튀어나왔다. 세쯔가 자존심과 욕망 사이에서 잠깐 갈등하더니 금세 입을 벌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가락이 세쯔의 입에 든 것을 꺼냈다. 침에 축축하게 젖은 덩어리가 풀어지며 길게 줄줄 딸려 나온다.
“리본? 이걸 어떻게 먹었지? 어디서 난 거람?”
꽤나 먹었는지 선물 포장용 리본을 켁켁거리며 내뱉는 광경에 경악한 유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펜스 안에 이런 거 둔 기억 없는데. 아까 잠들기 전에 잠깐 거실에 풀어줬을 때 가져갔나?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아무리 갱얼쥐 세 마리가 동시다발로 뛰어다녀 정신이 없었다 해도, 명색이 펫돌보미로 이 집에 신세지는 상황에서 첫날부터 애가 뭘 먹는지조차 몰랐다는 데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대로 리본 다 먹고 아팠으면 어쩔 뻔? 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조차 모르고 동물병원으로 뛰어가 온갖 검사를 다 했을 판이다. 개는 어디가 아픈지 말도 못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보호자가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미안해, 세쯔. 죄송해요.”
속상해서 목소리가 떨리는 유정은 아랑곳 않고, 세쯔는 언제 위험했냐는 듯 행복한 얼굴로 냠냠 간식을 먹었다. 멍멍, 알알, 하나와 두리가 우리는 왜 안 줘, 항의하듯 짖자 인한은 나머지 둘에게도 공평하게 간식을 주었다.
합합 간식 먹는 강아지들을 잠깐 물끄러미 쳐다보던 인한이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금방 알아차렸으니 됐습니다. 큰일도 아니고. 사과할 필요 없어요.”
혜라가 할 법한 다정한 말에 흠칫, 인한을 쳐다보았다. 혼내거나 싸늘하게 비아냥거릴 거라고 각오했는데, 얌얌 오물거리는 강아지들을 바라보는 표정은 더없이 부드럽고 상냥했다. 금세 먹어치우고 간식 더 달라 아물아물 몰려드는 멍멍이들에게 냄새 맡도록 손등 내미는 모습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깔끔하고 조용한 걸 좋아한다고 혜라 변호사님이 말씀하셔서 개는 별로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보면 꽤 예뻐하는 것 같다. 개에 대해서 잘 아는 느낌이기도 하고. 하긴, 오래 길렀다고 했지?
서로서로 박치기하듯 꼬물대는 강아지들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어 주는 손이 무척 섬세했다. 언제 재킷을 벗었는지 차곡차곡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 희고 군더더기 없는 팔뚝이 눈부셨다. 의외로 팔이 탄탄해 보였다. 책상물림인 줄만 알았는데 운동이라도 하는 걸까?
“이제 자야지.”
하품하는 하나를 방석에 올려놓고, 졸래졸래 따라오는 두리와 세쯔도 각각의 방석에 척척 올려놓는 인한의 미소 띤 얼굴이 녹아내릴 듯 다정했다. 부드럽게 접힌 눈꼬리가 나비 팔랑거리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사롭다.
애들 잘 자라고 토닥거린 인한은 한 가닥 한 가닥 피로를 걷어 올리듯 나른한 손길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유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피곤해 보이는데 이만 쉬십시오.”
“앗, 네…….”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희 퇴근 기다리신 거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불규칙적이라 저희도 언제 퇴근할지 모릅니다. 서재를 쓰신다지요? 늦으면 먼저 주무십시오.”
인한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펜스에 걸친 재킷을 집어들고 성큼성큼 걸었다. 하루 일과가 끝난 늦은 시간에도 그다지 흐트러지지 않은 흰 와이셔츠만큼 깍듯한 거리가 둘 사이에 존재했다. 방금 강아지들 보고 웃던 인한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아주 가깝게 느껴졌건만……. 유정은 왜인지 아쉬워서 손가락만 꼬물거리며 펜스를 닫았다.
자기 방문을 열기 직전, 인한이 예고 없이 뒤돌아보았다.
“편히 지내십시오. 우리 집이다 생각하고.”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없는 사람처럼, 공기처럼 조용히 살게요.”
잠깐 뇌 정지가 와서 뒤늦게 대답했을 때는 이미 인한이 방문 너머로 들어간 후였다. 하지만 이쪽을 쳐다보던 얼굴이 문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입꼬리가 올라간 것 같았다. 아주 찰나라 착각일 수도 있지만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애들 깨지 않게 조용조용 욕실로 뛰어들어 찬물부터 끼얹었다. 차가운 물이 볼과 턱을 따라 방울방울 떨어지며 늘어질 대로 늘어졌던 정신을 붙들어 맨다.
“으악?”
명료해진 머리로 거울을 보니 머리부터 찬물 맞은 듯 식은땀이 쏟아진다. 10년 치 기억 없는 유정이 좀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두룩 빽빽한 여드름밭은 차치하고, 누가 머리채 잡고 상모돌리기라도 한 듯 헝클어진 머리는 사자 갈기가 따로 없었다.
“티는 언제 또 이렇게 늘어났대?”
몇 개 없는 옷 중에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걸로 입었는데, 어느새 목이 후줄근하게 늘어져 있었다. 아까 두리가 무엇에 심통 났는지 티를 물고 늘어지긴 했는데 그새 이럴 일이야? 심지어 뭔가 흘린 자국도 있었다. 그야말로 독박 육아에 찌든 불쌍한 애엄마 같은 몰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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