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6세 생일날이었다. 유정이 무지개 빛깔 올림포스 산에서 암흑의 무저갱으로 추락한 건.

악마의 속삭임은 달콤하다 했던가. 중3 마지막 겨울방학식날, 즉 유정의 생일을 앞두고 C중학교 ‘요정’ 홍세빈이 찰싹 달라붙어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더할 나위 없이 깜찍하고 사랑스럽게, 녹을 듯 달콤한 목소리로.

<유정아, 유정아. 같이 가기만 해 주라, 응? 너 키 커서 화장하면 대학생처럼 보이잖아. 엄마 유럽 여행 가서 달리 갈 사람 없단 말야. 혼자 가긴 무섭잖아, 응? 응?>

<상담도 무서우면 성형은 어떻게 해? 나중에 엄마 오시면 같이 가.>

이른 성장과 남다른 발육으로 벌써 키가 170cm에 육박하는 유정이 귀찮다는 듯 팔을 내둘렀지만, 146cm 아담 사이즈 세빈은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치…… 그때는 늦지. 지금도 예약 거의 다 찼대. 빨리 상담 받고 예약해야 방학 동안 수술할 수 있다고.>

<에헴, 미성년자가 무슨 성형인고. 관 둬, 지금도 예뻐.>

익살스럽게 선비 행세를 하며 태연한 척 했지만, 사실은 질투와 동경이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글대기 시작했다. 작은 분식집으로 근근이 먹고 사는 유정 집에서는 언감생심 바라기도 힘든 것들을, 세빈은 마치 떡볶이 한 접시나 김밥 한 줄 사듯 아무런 고민도 어떠한 장애도 없이 쉽게 손에 넣곤 했으니까.

세빈이 파하 웃었다.

<무슨 꼰대 같은 소리야. 그 정도 안 하는 아이돌 지망생이 어디 있다고.>

그래, 지금처럼……. ‘아이돌’ 같은, 유정이 차마 꾸지도 못할 꿈을 당연한 듯 입에 담는다. 꿈조차도 특권인 시대에.

<너도 궁금해 했잖아, 거기 압구정에서도 엄청 유명한 데다? 연예인도 줄을 선대. 혹시 알아, 유명 인사라도 마주칠지? 그러니까 옆에만 있어 줘, 응? 응?>

조르기 모드에 들어간 세빈의 샐쭉 내민 탱글탱글한 입술이, 슈가 코팅한 생크림 케이크 딸기처럼 반드르르 빛난다. 러블리한 베이비핑크에 은은한 펄. 우리 학교 화장 금지인데. 까맣고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꼭 모은 작은 손. 맘마를 조르는 새끼 고양이나,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는 다람쥐처럼, 한없이 여리여리하고 자그마한 체구.

세빈은 누구에게나 보호 본능을 이끌어내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비록 겉보기완 다르게 화장 금지 학칙 따위는 개나 줘버리는 두둑한 배짱을 지녔지만, 대개의 경우 그 성깔까지 눈치 채진 못했다.

교사들조차 외모와 애교에 넘어간 사람 반. 바르는 거, 걸치는 거, 사용하는 거 모두 명품 아니면 취급하지 않는 든든한 재력에 눌린 사람 반 해서, 어느 누구도 세빈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코스피에도 상장된 회사 CEO 아빠와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엄마의 금지옥엽 외동딸과, 좋게 말해서 요식업계 종사자지만 부부 둘이 밤까지 매달려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작은 분식집 딸인 자신이 어쩌다 베프가 됐는지 모를 일이다.

둘 다 너무 바쁜 엄마 아빠 탓에 외롭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형제자매도 없는 외동이라? ……그냥 중학교 입학해서 같은 반이 된 게 문제였을지도. 에휴, 유정은 들키지 않게 작은 한숨을 삼켰다.

세빈에게 베프로 찍힌 이후 3년 내내 화장실까지 붙어다니면서 제멋대로 구는 데엔 제법 질렸으면서도, 왜 번번이 휘둘리고 마는 걸까. 유정은 우물우물 무익한 반항을 해 보았다.

<……어디서 들었는데, 진짜 괜찮은 덴 미성년자 성형 안 해준다더라. 나중에 해, 나중에.>

<흥, 방학마다 성형외과에 우글거리는 애들은 뭔데? 그리고, 내가 뭐 대공사한댔나? 전신 개조라도 할까 봐? 쌍꺼풀이랑 앞트임이랑 눈매 교정만 할 거야. 그런 건 수술도 아니야, 시술이지. 안전해, 안전.>

의사도 아니면서 안전하긴. ‘많이 초조해?’란 말이 튀어나오지 않게 속으로 밀어 넣었다. 요즘은 누구나 쌍꺼풀 있어서 외꺼풀이 자기만의 차별적인 매력이라더니, 아직까지 어디 연습생으로도 소속되지 못해서인지 요사이 부쩍 안달이다. 빠른 애들은 초등학생부터 픽되는 세상에, 지금도 너무 늦은 거라며 저승길 앞둔 노인처럼 하루하루 나이 먹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기껏해야 고등학생 되는 건데, 아직도 어린데…….

너 같은 금수저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있구나. 유정은 저도 모르게 말랑말랑한 볼을 쭈욱쭈욱 잡아당겼다. 호두 잔뜩 문 햄스터처럼 잔뜩 부푼 몽글몽글 보들보들한 하얀 뺨이 찹쌀떡처럼 손가락에 착 달라붙으면서 주욱 늘어난다.

<이잉…… 이번만 봐준다. 같이 병원 가는 거다, 아라찌?>

자기는 내키는 대로 터치하면서 남의 터치엔 팩 토라지기 일쑤였던 세빈이, 앙증맞은 두 손으로 복숭앗빛 물든 뺨을 문질문질하며 애기 소리를 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가 다 있을까 싶던 내 친구…….

……였던 년. 그년 따라 병원 갔던 그날의 나를 매우 치고 싶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덜떨어진 것들은 다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야 돼.

<어, 새 실장님이네? 안녕하세요, 홍세빈이에요.>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모녀 두 분 다 저희 병원 VIP셔서 언제 인사드리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잘 부탁드려요.>

병원이라기보다 어디 유럽 성채 같이 으리으리하고 눈부신 압구정동 모 성형외과의, 인조미 낭낭하지만 모델 뺨치는 미모의 상담실장이 두 손을 공손히 그러모아 깍듯하게 배꼽 인사를 했다. 자신보다 열 살은 어릴 세빈에게.

세빈은 그런 대우가 숨 쉬는 공기처럼 당연할지 모르지만 유정에게는 익숙하지 않아서 우물쭈물 마주 허리를 굽히고 말았다. 인조 속눈썹인지 연장술인지, 이쑤시개 예닐곱 개는 너끈히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상담실장의 길고 튼튼해 보이는 속눈썹이 그럴싸하게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갔다. 그러고는 언제 유정을 쳐다봤냐는 듯 세빈에게 꿀을 바르기 시작했다.

<어머, 역시 피부 너무 좋으시다. 이맘때면 여드름 때문에 난리들 나는데, 피부 관리 꾸준히 받으신 보람이 있네요. 오늘은 어쩐 일로 상담 예약을 하셨어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좀 있어서요.>

<아유,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상담해 드릴게요. 뭐든 기탄없이 여쭤보세요.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불여우처럼 살살 눈웃음치는 실장의 관심이 다시금 자신에게 향하자, 유정은 괜히 뜨끔했다.

<사촌 언니에요. 대학생이에요. 제가 여기 원장님 잘한다고 했더니 궁금하대서 같이 왔어요. 저, 잘 했죠?>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세빈이가 유정의 팔짱을 끼며 생글생글 웃었다. 대답 잘 하라는 무언의 압력인지 세빈의 팔꿈치가 사정없이 옆구리를 파고든다. 별 수 없이 ‘네에’인지 ‘메에’인지 염소 소리 같은 대꾸를 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세빈처럼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 하는 재주는 없다.

상담실장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땐 서클렌즈에 빛이 반사된 건가 했지만, 지금은 안다. 바로 사냥감을 포착한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실장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안내했다. 유정은 실장과 의기투합한 세빈이 진료실로 인계될 때까지, 꿔다 놓은 빗자루처럼 멍 때리고 있었다. 어쩌구저쩌구 시술이니 이러쿵저러쿵 관리니, 처음 듣는 용어가 난무해서 염불 듣는 기분이었다. 해리포터 주문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가 더 쉽겠다.

유정은 가끔 세빈이 동의를 구할 때만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다. 이거 괜찮아 보인다. 응. 패키지에 포함된다는데 안 하면 손해겠지? 그런가. 예상보다 오버되는데……. 그러게, 비싸다.

<어머, 어머님은 연회비 1억짜리 피부 관리 받으시면서 하나밖에 없는 따님 이것도 못하게 하실 만큼 쩨쩨한 분 아니시잖아요. 안 그래요?>

……이건 나 아니다. 실장이다. 세빈이 끙끙 말티즈 앓는 소리를 내더니, 만화 주인공처럼 귀엽게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에잇, 하지 뭐. 여기까지 그냥 다 할게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언니 분은 여기에서 기다리시고, 고객님 원장실로 들어가실게요.>

이것저것 잔뜩 추가한 견적서를 챙긴 실장은 봉, 아니 실적 올려준 고마우신 고객님께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음을 과시하듯, 삼각자 대각선 면처럼 비스듬히 숙인 자세로 세빈을 안내해 나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유정이 얼마나 소파에 파묻혀 있었을까. 으리으리한 인테리어를 황홀한 눈으로 구경하던 어느 순간 고소한 커피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고개를 드니 종이컵이 아니라 제법 괜찮아 보이는 머그잔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북유럽 빈티지풍 느낌의. 우리 병원은 이런 사소한 것도 싸구려는 안 쓴답니다, 하는 과시가 돋보였다.

<기다리시는 동안 커피 한 잔 하세요.>

<앗, 네, 네. 감사합니다.>

유정은 무너진 자세를 고치며 황급히 컵을 받아들었다. 사실 유정은 커피에 익숙지 않았다. 키 안 큰다고 엄마가 못 먹게 했기 때문이다. 애기 입맛이라고 친구들이 놀려도 키 큰 데에 그 덕도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도 커피는 좋아하지 않는다.

커피향을 음미하는 척하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그냥 갈 줄 알았던 실장이 싱긋 웃으며 유정 옆에 앉았다. 어쩔 도리 없이 한 입 머금자, 실장이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고객님, 대학생 아니죠?>

푸헙, 컵. 유정은 내뿜을 뻔한 커피를 어찌저찌 겨우 삼켰다.

안 되지, 안 돼. 이 재킷이랑 핸드백 전부 세빈이네 엄마 거다. 세탁비만 해도 웬만한 패딩 값이 나오는 비싼 명품. 하마터면 세 달 치 용돈 날아갈 뻔했다. 됐다는데도 세빈이가 자꾸 입고 가라고, 백화점이랑 병원은 허름하게 가면 안 된다고 하도 그래서……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옷 좀 사달라니까 돈 없다고, 홈더하기 매대에서 산 옷이나 던져 주니까 이런 꼴을 당하잖아, 칫.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서러워서가 아니야, 뜨거운 커피를 꿀떡 삼켰기 때문이다. 캑캑대고 있자니, 등을 살살 쓸어주던 실장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린다.

<아깐 고객님이 말씀하시니까 네네 넘겼는데, 사실 언니 아니죠? 아무리 봐도 애긴데? 아직 중학생이죠, 아까 고객님 친구.>

<애, 애기…….>

애기 아닌데요. 이제 고등학생 되는데요. 키 170cm인데요. 이렇게 큰 애기 보셨어요? 당황스러워 말도 안 나온다.

<딱 보면 알아. 아무리 화장 진하게 해도 애기들은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화장이 이상했나? 장장 두 시간을 투자한 건데, 어른들 눈엔 다 보이나…….

겸연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몰래 신고 온 애꿎은 엄마 하이힐만 노려보고 있자니, 실장의 가늘고 하얀 손이 유정의 턱을 든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는 사이, 실장의 빨간 입술이 석류같이 벌어졌다.

<어쩜 여드름 하나 없어? 완전 애기 피부네, 너무 부럽다아.>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 예상치 못한 칭찬. 실장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가 엄청 신경 써주시나 봐. 피부도 곱고 키도 크잖아. 좋은 거 잘 먹여주신 거지. 이쁨 받는 딸이네에. 키 몇이야? 169? 170?>

<170cm요.>

난데없이 ‘고객님’에서 반말로 전락했음에도 의외로 불쾌하지 않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니까, 언제 들어도 좋으니까. 오히려 딱딱한 격식 차리는 관계에서 한순간에 언니 동생처럼 친근한 사이가 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유정은 실장의 손가락에 얼굴을 맡기며 고분고분 대답했다.

<어머, 딱 좋아, 딱 좋아. 아이돌 해도 되겠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긴데…….>

실장은 진료실 쪽을 힐끔거리며 비밀 얘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춰 유정에게 다가붙었다.

<요즘은 키가 제일 중요해. 얼굴이나 몸매는 얼마든지 튜닝 가능한데, 키는 안 되거든. 힐 신으면 뭐 해, 당나귀 탄 호빗인데. 귀엽고 깜찍한 거 오래 못 가. 키 작으면 청순이고 섹시고 불가능하니까. 뭘 해도 애 같잖아.>

유정을 띄우는 척 친구를 후려치는 실장에게, 어디서 고객 뒷담화냐고 빽 질렀어야 했는데.

<쉿, 친구한텐 비밀이야. 속상할라. 아이돌 지망생이라며. 친구가 예쁜 얼굴 이제 더 예뻐질 거고 애교도 넘치고 끼도 있고 다 좋은데, 키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트리던 실장에게, 이게 바로 이간질이라고 한마디 해 줬어야 했다. 세빈이 유정에게 좋은 친구였는지 아니었는지와 별개로, 유정도 세빈의 흉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은 순간 세빈의 친구 자격을 상실한 셈이었다. 그래서 결국…….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빈이를 두둔해 줬을 텐데, 헛바람 넣는 말 무시했을 텐데, 아니 애당초 그 성형외과에 쭐레쭐레 따라가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수정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과거의 유정은, 마법 주문을 외는 마녀처럼 달콤하게 속살거리는 실장이 자신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품평하게 내버려 두었다.

<일단 키는 클리어했고, 본판도 나쁘지 않은데? 조금만 손보면 3대 기획사 충분히 들어가겠어. 혹시 벌써 연습생이니?>

<아, 아니에요. 연습생은 무슨…….>

<우리 원장님, A기획사 대표랑 친하거든. 거기 애들 완전 단골이야. 생각 있어? 언니가 소개해 줄게.>

<네?>

<시크나 도도 계열도 잘 어울릴 것 같네. 꾸미기에 따라서 청순도, 보이시도 가능하겠어. 근데 그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독해야 돼. 친구는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깡이 있어 보이던데, 너는 너무 투지가 없다. 성형외과 와서 이렇게 멍한 지망생 처음 봐.>

<지망생요? 저, 지망생 아닌데요.>

<뭐? 아니야? 왜? 아깝게. 얘, 이런 키에 몸매에, 연예인 안 하는 게 손해다. 주변에서 뭐라 안 그래?>

과장되게 놀란 척하며 야단인 실장의 입에 발린 말, 고객 유치에 혈안이 된 접대용 멘트, 영혼 없는 아부가 그땐 왜 그럴싸하게 들렸을까? 홀렸던 걸까?

……아냐, 말은 바로 하자. 예쁘단 소리가 듣기 좋았던 거잖아. 친구를 깎아내리든 말든 자기 칭찬하는 소리가 기뻤던 거잖아. 그동안 세빈이한테 맺힌 게 있어서 통쾌했던 거잖아.

사실 세빈이랑 붙어다니기 전만 해도 예쁘단 소리 가끔 들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쭉쭉 키 크고 날씬해서. 하지만 원래도 예쁘면서 더 예뻐지려고 늘 노력하는 세빈 옆에 있다 보니, 어느새 요정 같은 세빈의 들러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병풍, 배경, 주인공 돋보이게 해주는 엑스트라, 아가씨 옆 몸종, 선녀를 선녀답게 해 주는 못난이.

엄마 아빠 빼고 예쁘단 소리 들은 게 하도 오랜만이라 그만 들떴던 것이다.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 해서 꾹 참느라 힘들었다. 고만고만한 집안 형편과 부족한 자질로 인해 차마 꿈꾸지 못했던 아이돌이며 연습생이란 단어가 황홀했다.

그런 얘기 있잖아. 오디션 보는 친구 따라갔다가 엉겁결에 데뷔했다는…….

설마 되겠어 싶으면서도 칭찬과 아부는 귀에 달콤했다. 그래서 실적에 눈 멀어 미성년한테도 기술 거는 영업의 화신에게 홀랑 넘어가 버렸다. 잡아먹혔다고 해야 하나? 백 년 묵은 구미호, 노회한 능구렁이, 저주 거는 마녀한테.

역시 어렸던 것이다.

<콧대…… 조금 높이면 좋으려나? 쌍꺼풀도 있는 게 낫겠고……. 이 마스크면 양악은 안 해도 되겠다. 효녀네, 삼백만원도 안 들겠는데?>

<아, 아니요. 저는 안 해요.>

현실적인 돈 얘기에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유정은 두 손을 내저었다.

<어머, 그 가격이면 거저나 마찬가지야. 우리 원장님, 실력도 좋은데 요금도 양심적이시라니까? 둘러 봐. 요 근방에서 이 가격으로 코랑 눈 둘 다 할 수 있는지. 설마 부담 돼? 방금 친구는 거의 천만 원 썼는데?>

삼백만원을 떡튀순 한 세트처럼 취급하며 세빈이까지 들먹이면서 긁는 실장 앞에서, 유정은 그저 고개만 떨어트렸다. 부담된다. 당연히 부담되지. 한 달 용돈 오만 원 처지의 유정에게는 공양미 삼천 석처럼 큰돈이었다. 그렇다고 뻔히 형편 아는데 엄마 아빠한테 내달라고 할 수도 없고…….

하지만 ‘돈 없어서 못 해요’란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유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실장이 아양부리듯 몸을 흔들었다.

<아이 참, 나 좋자고 이러는 것 같아? 그럴 거면 양악부터 들이밀었지. 진짜 아까워서 그래. 얘, 외모도 재능이다? 썩히는 건 죄악이야. 어때, 견적은 무료니까 한번 받아 봐. 내가 잘 해 줄게.>

손잡고 일으키려는 실장에게 다급히 말했다.

<진짜 안 돼요. 우리 엄마 아빤 허락 안 할 거예요.>

미성년자 최초의 관문이자 만고의 변명거리이며 최후의 무기, 엄마 아빠 실드. 아무리 뭐래도 돈 없단 고백보다는 엄마 아빠 핑계 대고 숨는 게 유정의 위태로운 자존심을 지키기에 더 나았다. 기세 좋던 실장이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