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입덕 가이드

대현의 발표로 인해 경영기획팀의 회의는 중단되었다.

분명 기사에 발표된 초안은 나길 작가의 것이 맞았다. 어떠한 수정도 거치지 않은 나길 작가의 작품이 순식간에 메이리우 작가의 작품으로 둔갑되어버린 상황이 어이없으면서도 대현답게 치졸하다고 생각한 이안이었다.

당장 지호에게 사실을 알려야 했던 이안은 실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 왜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지호의 목소리는 누가 봐도 막 잠에서 깬 그러한 목소리였다. 계속해서 심각한 상태였던 이안은 지호의 목소리를 듣자 어이없음에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잤어요?”

- 아니요. 잠깐…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잤나 보군요. 그러라고 일찍 깨운 게 아닐 텐데요”

- 안 잤다고요. 명상했어요.

뻔뻔스런 발언에 이젠 별다른 타격감 없는 이안은 덤덤히 지호에게 전해야 할 사항만 던졌다.

“일어난 김에 나오시죠. 갑작스런 비상 상황이 생겨버려서요.”

- 오늘 새벽 6시에 기상한 것부터가 비상 상황인데요.

“농담할 때 아닙니다. 지금 바로 기사링크 하나 보내 놓을 테니 보고, 만나서 얘기하죠.”

전화를 끊은 이안은 곧바로 자켓을 걸치고 나갈 채비를 끝낸 뒤 문을 열었다. 이안이 힘차게 밀어재낀 실장실 문이 열리자 무언가 부딪치는 둔탁한 느낌과 함께 ‘아악!’ 앙칼진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이안이 실장실 밖으로 나오자, 문 바로 앞에 이마를 문지르며 한껏 쏘아보는 리애가 서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앞에 사람이 있는 줄 몰랐네요.”

리애는 잔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안을 위아래로 스캔했다.

“무슨 용건이죠?”

리애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이안은 역시나 용건을 물어왔다. 이에 리애는 볼멘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안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사과하세요.”

대뜸 사과하라는 말에 이안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리애를 바라보았다.

“저랑 상의도 없이 제 프로젝트, 대현에 떠넘긴 거 사과하시라고요!”

“아, 네. 그 점은 저도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나 순순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이안의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은 리애였다. 사과는 받았지만, 왠지 모르게 분한 리애의 마음은 풀릴 줄 몰랐다.

“저 나길 작가 싫어요!”

어린아이 떼쓰듯 갑자기 나길 작가가 싫다고 말하는 리애의 모습을 본 이안은 내적 한숨을 쉬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만약 나길 작가가 우리한테 넘긴 초안이 진짜 메이리우 작가 거면 어떡해요? 표절로 이슈가 될 뻔한 작가를 어떻게 믿고 쓰겠어요.”

“그 초안은 나길 작가의 것이 맞고, 표절은 대현 쪽에서 한 겁니다.”

“실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데요? 자기 얼굴도 내놓지 않고 활동하는 그런 사람을, 도대체 뭘 보고 신뢰하는 거냐고요.”

따져 묻듯 이안을 몰아세우는 리애였다. 그런 리애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동자는 꽤 차분하고 진중했다.

“나길 작가의 작품은 다른 사람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아요.”

“나길 작가의 작품은 알지만 나길 작가는 잘 모르잖아요.”

“꼭 그 사람을 만나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죠.”

“오빠가 무슨 수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데요?”

리애의 말에 이안은 이전에 말도 없이 지호가 자신의 화방에 들어갔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지호는 자신이 그린 그림만 보고도 강박 증세를 알아맞혔다. 지호가 그림만으로 이안의 속내를 알아챘듯이, 이안 또한 아주 오래전 지호를 만나기 전부터 나길의 그림만으로 그녀를 알아챘다.

“저는 제가 그림 속에서 본 나길의 모습을 믿어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이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리애였다. 나길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그 어떤 정보도 알 수 없었지만 리애는 왜인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이상하리만치 나길에 집착하는 이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리애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오빠, 정말 재수 없네요.”

날선 리애의 투정에 이안은 무심한 듯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할 말 다 끝났으면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이안은 리애를 뒤로한 채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러한 이안의 뒷모습만 멀거니 보고 있을 리애가 아니였다. 리애는 빠른 걸음으로 이안을 뒤 따라갔다.

“저는 이번 사건을 포함해 나길 작가의 귀책사유가 보이는 즉시 바로 쳐낼 생각이에요.”

당돌한 경고에 이안은 자신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나란히 걷고 있는 리애를 보았다.

“저 말 잘해요. 나길 작가 하나 쳐 내기 위해 팀원들 구워 삶아내는 건 일도 아니라고요. 아무리 오빠가 책임자라 한들, 팀 전체의 의견을 무시할 정도로 어리석은 리더는 아니잖아요?”

이안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다다른 리애는 이안 대신 친절하게 내려가는 쪽 버튼을 눌러주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이안은 리애의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바로 올라탔다. 리애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탄 이안을 마주보고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이안을 향해 짓는 리애 특유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민지호든 나길이든 제 계획에 걸리적거리는 건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선, 지키라고요.”

그렇게 리애의 마지막 경고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다.

***

영화의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펼쳐보고 있는 이안의 표정은 진지했다. 지호는 그저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쪼로록 마시며 심각한 영화와 이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계약서상에는 모든 작업물의 저작권은 대현에 귀속된다고 되어있네요?”

“작업이 완성되면 개인전을 여는 조건을 메인으로 걸어서 콜했던 건데, 이렇게 되고 보니 제 불찰이었던 것 같네요.”

“아니요. 주영화 팀장 잘못은 아닙니다. 아무리 저작권을 귀속한다 해도 엄연히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발표하는 것은 위법이에요.”

계약 내용을 가지고 논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 지호는 이내 입이 쩍 벌어져라 ‘하~암!’ 하품을 했다. 요란스런 하품 소리에 두 사람은 어이없다는 듯이 지호를 쳐다보았고

“왜?”

해맑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 관해 묻는 지호였다.

“남에 일이냐? 지금 메이리우가 내 작품 뺏어갔니? 니 작품 뺏긴 거야 이 팔푼아!”

옆에 앉은 지호의 볼을 꼬집으며 이를 악물고 말하는 영화였다.

“아! 말로 해라! 말로 해!”

그런 영화에게 볼이 꼬집힌 지호도 양손으로 영화의 볼을 꼬집었다. 서로의 볼을 꼬집어대며 눈에 쌍심지를 켜대는 두 여자를 앞에 둔 이안은 적잖이 당황했다.

“야! 놔라! 좋은 말 때 놔라!”

“선배가 먼저 놔라!”

“야, 하나 둘 셋! 하면 놓는 거다! 하나, 둘, 셋!”

영화가 셋을 외치자 손을 놓기는커녕 더욱 손에 힘을 쥐어 상대방의 볼을 꼬집어 비트는 두 사람이었다. 이대로 두다간 오늘 안에 누구든 손을 놓지 않겠다고 판단한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여자를 중재했다.

지호의 양 볼을 꼬집던 영화의 손을 힘주어 떼어낸 뒤, 영화의 볼을 꼬집고 있는 지호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꼼짝도 하지 않는 지호였다. 결국, 안 되겠다고 판단한 이안은 지호의 어깨를 감싼 뒤, 뒤로 힘껏 끌어당겼다.

“그만해요. 얼른 놔요. 민지호 씨!”

결국 이안에 의해 지호는 뒤로 당겨졌고, 영화의 볼따구도 지호의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며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손을 놓음과 동시에 무게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간 지호는 이안의 가슴팍에 안기게 됐고 그런 지호를 지탱하기 위해 양팔로 지호를 감싸 안은 이안이었다. 본의 아니게 백허그를 하게 된 두 사람은 잠시 현실 자각 타임을 가진 뒤 이내 빠르게 원위치로 돌아왔다.

“어? 두 사람 방금 백허그…?”

“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영화의 눈빛은 음흉함과 장난기로 물들었다. 무언가 농담을 던지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영화의 상태를 눈치챈 지호는 아무 소리도 못 하게 바로 차단시켜 버렸다.

이에 이안 역시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어찌 됐든 이번 건은 저희 법률팀에서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영화 팀장은 그에 필요한 증거들을 취합해서 넘겨주세요.”

“네.”

이때,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지호가 무언가 이의가 있다는 듯 번쩍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런데 완성작도 아니고 어차피 초안인데 굳이 이렇게 할 필요 있나? 어차피 소송하더라도 컨셉 다시 잡아야 하는 거잖아.”

“초안은 작품 아니냐? 초안은 뭐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야?”

영화의 반박에 지호는 한껏 심각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해 봐. 솔직히 지금 작가 파워로만 놓고 보자면 나보단 그쪽이 더 세!”

“그래서, 작가 파워 세면 남에 작품 막 가져가도 돼?”

“그건 아니지만 이게 소송까지 가서 이슈가 된다면 사람들은 소송결과나 사실 여부랑은 관계없이 내가 그쪽 걸 가져갔다고 생각할걸? 안 그래?”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그래도 네 건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지!”

이안은 영화와 지호가 나누는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두 사람 말 모두 다 맞았다.

어차피 대현에게 뺏긴 것은 완성된 작품이 아닌 초안일 뿐이었다. 회사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최대한 잡음 없이 바로 다른 컨셉을 잡아 진행시키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지호의 작품이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 의해 기만당하는 것은 보기 싫은 이안이었다.

“선배, 생각해 봐. 어차피 메이리우, 이 업계에서 표절 작가로 유명하잖아.”

“그래! 그래서 네 거 가져갔잖아 그 개자식이!”

“어차피 초안이야. 걔가 그걸로 뭘 할 수 있겠어? 해봤자 또 표절이겠지. 그런데 내 작품 독특한 거 알지? 그 초안에 다른 작가 거 표절해서 짬뽕시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지호의 말을 곱씹어보던 영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개차반 되겠네.”

지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납득한 이안은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곤 지호가 앉은 방향을 향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호는 갑작스럽게 좁혀진 두 사람의 거리에 놀랐다. 하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그런 이안을 바라보는 지호였다.

“그래서 민지호 씨는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소송에 힘 빼지 말고 얼른 새 컨셉 잡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죠. 시간도 없는데. 메이리우는….”

“메이리우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요?”

이안의 물음에 지호는 씨익-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이안은 처음 나길 작가의 작품을 접했던 때를 떠올렸다.

빨간색 막대사탕을 물고선 상대방을 놀리듯 장난기 가득한 시선을 던지는, 묘하게 관능적이었던 소녀의 그림.

지금 지호의 모습은 이안이 처음 그녀의 작품을 만났던 레온 향수 일러스트 속 소녀, 그 자체였다.

“메이리우는 그냥 둬요. 자폭하게.”

자신만만한 지호의 모습에 이안은 나길의 작품에서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자신을 벼락같은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짜릿함. 다시 한번 느껴지는 전율에 이안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재채기를 내뱉을 기세로 간질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