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별 여행.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사랑이었다.

첫눈에 반해버린 사랑은 수줍고 달콤한 시간을 지나 익숙하고 편안해져 숨 쉬는 공기와 같은 존재로 서로에게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

오랜만에 여행이다.

그동안 진우의 회사 일이 바빠 2주에 한 번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자는 그의 연락이 있었다.

오랜만에 서울을 벗어나 여행을 간다는 것에 조금 설레는 희수였다.

“11시에는 출발해야 하니깐 늦으면 안 돼. 지난번처럼 늦으면 나 진짜 화낼 거야!”

[알았어. 이번엔 진짜 안 늦을게. 믿어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진우의 말에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여행의 설렘을 깨고 싶진 않았다.

여행뿐만이 아니라 데이트 시간도 매번 늦었던 그였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던 희수도 자꾸 반복되는 진우의 지각에 이젠 화를 넘어 거의 체념했을 정도다.

진우도 항상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 스스로가 답답하고 희수에게 미안했다.

이번만은 늦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고 여행 스케줄을 잡는 데 열중했다.

왜 매번 자신이 스케줄을 짜야 하냐며 볼멘소리를 하는 희수를 보고, 이번만큼은 자신이 여행을 계획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음… 여기 갔다가 여기로 이동해서 흠… 여기 가 볼까?”

안 하던 일을 해선지 생각보다 일정을 짜는 게 쉽지는 않았다.

또 희수가 만족할 만한 여행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나름 심혈을 기울고 있었다.

지방으로 회사를 다니다 보니 예전만큼 챙겨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컸었는데, 모처럼 휴가를 내어 여행을 가는 것이니 이왕이면 모든 것이 근사했으면 했다.

나의 오래된 연인 희수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었으니깐.

일찍 자야 내일 늦지 않을 것이다. 진우는 서둘러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다음날.

11시가 다 된 시간, 희수가 집 앞에서 진우를 기다리고 있다.

희수가 진우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동아리에서다.

과 신입생이었던 희수는 친구 유진과 봉사단체 동아리에 등록하기 위해 동방에 방문했었다.

진우는 두 사람을 맞아 준 첫 번째 선배였다.

“우리 베레카는 장애인 생활공동체를 주로 돕고 있어요. 한 달에 두 번 정기적으로 봉사를 다닙니다. 이렇게 선뜻 우리 동아리에 들어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요즘 신입생들은 놀기 바쁘고, 스팩 위주로 동아리를 선택하는데 우리 예쁜 후배님들은 마음도 예쁜 것 같네요.”

너무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진우를 보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순간 희수의 마음이 두근거린 건 착각이었을까.

이마 위로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진우는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동아리 등록서류를 희수와 유진에게 건넸다.

“복잡하게 이것저것 쓰게 되어있지만, 학번, 이름, 주소, 연락처만 쓰면 돼요. 등록서류 고쳐 놓는다는 게 다들 게을러서요.”

두 사람을 향해 환하게 웃는 진우의 모습에 두근거렸던 희수의 마음은, 첫눈에 반하는 순간이 되어버렸다.

잠시 옛 생각에 빠져있을 때, 진우의 차가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희수 앞에 차가 서더니 조수석 창문이 내려졌다. 급했나 보다. 그의 머리는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미안해, 희수야. 서둘러 온다는 게 이 시간이네. 그래도 많이 안 늦었지? 어서 타. 빨리 가자!”

진우가 평소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희수를 향해 빨리 타라고 손짓하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조수석에 앉았다.

익숙한 담배 냄새가 차 안에 은근하게 배어있었다. 진우는 담배를 꽤 자주 피우는 편이었다.

희수가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가능한 그녀를 만나는 날은 피우지 않았지만, 차 안에 남아 있는 것까지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오랜만에 차 타서 냄새 좀 나지? 미안. 오는 내내 환기한다고 창문 열고 왔는데도 이러네. 어제 잠은 잘 잤어?”

희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는 진우다.

“그냥 그렇지 뭐. 그러는 오빠는 너무 푹 자서 늦었나 보네?”

조금 삐딱한 희수의 말에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싶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 희수, 오늘 왜 이리 이쁘지? 넌 까칠할 때가 더 예쁘더라.”

“치, 왜 이래? 능글맞게.”

그래도 애교까지 부리는 진우가 밉지는 않아 그의 손등을 한번 쳐주는 것으로 끝을 냈다.

***

평일에 강원도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복잡한 도심을 지나 낮은 산들이 나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높은 산새를 자랑하는 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근데, 우리 바다에 가는 것 맞지? 가도 가도 산 밖에 안 보이네.”

“우리가 여행을 안 가긴 했나 보다. 이렇게 쭉 가다 보면 강릉 나오잖아. 곧 바다 나올 거야. 이번 여행은 나한테 맡기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가시죠, 아가씨!”

앞만 보고 열심히 운전만 하던 진우가 희수를 쳐다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인다.

그래, 내가 저 미소에 반해서 선배를 좋아했었지.

희수 또한 엷게 미소를 지어 보이곤 창문을 열고 상쾌하게 정화된 공기를 들여 마셨다.

이제 막 3월에 들어선 날씨는 아직 쌀쌀함을 머금고 있었다.

산들이 푸릇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이 주는 상쾌함에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니 여행 오길 잘했구나 싶었다.

높은 산들을 지나 강릉 도심을 가로질러 10여 분을 가다 보니 드디어 바다가 보였다.

따뜻한 봄 햇살을 받은 동해 푸른 바다는 반짝거리는 보석을 풀어놓은 듯 아름답고 예뻤다.

바다를 보니 기분이 한층 좋아진 희수가 미소 지으며 진우를 올려다보았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희수의 둥근 이마에 진우가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얼마만의 여유고, 여행이고, 데이트인가.

“어때? 오랜만에 와서 그런가? 바다가 생각보다 너무 멋지다!”

“응, 그러네. 정말 좋다!”

“그동안 바빠서 많이 미안했어. 네가 이렇게 좋아해 주니 내가 휴가 내기 정말 잘한 거 같다.”

“회사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잖아. 휴가 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고마워, 오빠.”

“별말씀을. 그런데, 희수야. 우리 뭐 먹고 나서 주변 좀 둘러볼까?”

출출한지 배를 동그랗게 쓸며 진우가 물었다.

“많이 배고파? 말하지 그랬어. 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렸을 텐데….”

“너한테 1초라도 빨리 바다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지. 그리고 여기 항구에 맛있는 게 가득한데 휴게소 음식으로 배 채우고 싶지도 않았고. 우리 뭐 먹지?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바다에 왔으니깐 당연히 회겠지?”

“좋아, 자 가봅시다. 맛있는 횟집 찾으러!”

두 사람은 서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몸을 밀착하며 항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다 내음이 물씬 나는 항구의 모습은 여유로워 보였다.

항에 정착해 있는 배들이 파도의 너울에 장단 맞추며 춤추듯 출렁거리는 모습이 마치 두 사람의 들뜬 마음을 보는 듯했다.

호객하느라 바쁜 골목을 지나 나름 깔끔해 보이는 횟집에 들어갔다.

“오빠, 횟집 이름이 부부 횟집이네. 부부가 운영하는 곳인가 봐. 나도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남편하고 작은 카페 하나 차려서 소소하게 살고 싶어.”

가게 안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하는 희수를 잠시 쳐다보던 진우는 물 잔에 물을 조용히 채워주었다.

결혼. 우리가 만난 지 7년이 되었으니 희수가 말하는 결혼의 상대자는 바로 자신을 말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진우는 아직 결혼 계획이 없는 상태였다.

대학 4년에 군대 2년, 취준생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20대 후반이 되어있었다.

다행히 직장에 들어가면서 나름 앞가림을 하고 있지만, 결혼을 생각하기엔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희수는 나이가 한살 한살 먹을수록 결혼을 생각하지만, 진우는 당분간 결혼 계획이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진우 엄마의 반대였지만 말이다.

“말이 좋지, 막상 부부끼리 장사하면 엄청나게 싸운다던데. 난 너랑 싸우면서 살긴 싫다. 예뻐해 줘도 부족할 판에 말이야.”

희수의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진우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래, 나는 희수랑 결혼할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난 희수랑 결혼할 거야.’

마치, 주문을 외우듯 진우는 희수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바닷가 근처 전망 좋은 카페에 갔다.

바다가 코앞인데도 깊은 산속에 온 것처럼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멋진 카페였다.

평일인데도 이곳은 주말인 듯 테이블마다 사람이 많았다.

유명한 곳이라고 일부러 이곳으로 데려온 진우는 복잡한 걸 싫어하는 희수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다. 점심시간 지나서 한산할 줄 알았는데… 역시 유명한 곳은 다르긴 다르구만.”

앉을 만한 곳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며 진우가 말했다.

“관광지가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여기 정말 좋은데? 바닷가 근처 숲속 카페라… 좀 낭만적인 듯해.”

희수는 손을 들어 나무 사이를 지나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끼고 있었다.

“희수 넌 뭐 먹을래?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 어? 여기 핸드드립도 하네? 너 좋아하는 핸드드립 커피 마실래?”

“아니.”

의외의 말에 진우는 희수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특별히 달콤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 캐러멜 마끼아또로 마실 거야.”

뭔가 큰 결심이라도 한 것 마냥 두 눈에 힘을 주고 말하는 희수를 진우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웬일로 단 커피야? 그런 거 잘 안 마셨잖아?”

“그냥… 이젠 천천히 기다려야 마실 수 있는 그런 거 마시고 싶지 않더라고. 기다리는 게 좀 지친 달까. 좀 더 달콤한 인생을 살고 싶은 마음? 뭐 그렇게 생각해 줘.”

별것 아닌 듯 말하는 희수의 모습을 보며 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달콤한 인생이라….

희수가 바라는 달콤한 인생은 결혼을 말하는 것일까?

결혼을 갈망하는 그녀의 삶에 갈수록 자신의 자리가 좁아지는 것 같아 불안감을 느끼는 진우였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은 저녁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점심으로 먹은 회가 아직도 소화되지 않은 채 더부룩함을 주고 있었기에, 숙소에서 먹을 간단한 음식을 사러 가까운 마트에 들렀다.

“희수야, 뭐 보는 거야? 케이크 사려고?”

진열장 안에는 심플한 케이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생일도 아니고 기념일도 아닌데 케이크에 한참 동안 눈을 두고 있는 희수였다.

“오빠, 우리 오늘 언약식 할까?”

진우에게 눈도 돌리지 않은 채 희수가 마치 케이크에게 말하듯 말했다.

“응? 언약식?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랑 나랑 언약식 하자고.”

순간 진우는 너무 뜻밖의 말이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진열장 안, 순백의 케이크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희수는 진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마음에 의심은 없었다.

언제나 다정했고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관심해졌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예전의 설렘과 애틋한 감정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편안함과 익숙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이런 감정이 사랑인가 생각하기 시작하는 희수였다.

진우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나 싶었다.

그저 소박한 언약식을 하자는 것뿐인데… 진우는 피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던져 본 말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숙소는 바닷가 근처는 아니지만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나름의 운치를 자랑하는 곳에 있었다.

깊은 숲속의 밤은, 짙은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준비하고 두 사람을 맞이해주었다.

“희수야, 여기 어때? 내가 더 좋은 곳 예약하려고 했는데… 다음엔 더 멋진 곳으로 가자.”

그녀를 뒤에서 껴안으며 미안함 반 아쉬움 반을 섞어 진우가 말했다.

“난 이걸로도 만족해. 우리 여행 중 제일 좋은 곳에서 머무는 거잖아.”

희수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진우의 손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포개었다.

진우가 희수의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희수야. 사랑해.”

“나도 사랑해, 오빠.”

진우의 입술이 희수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숨결이 하나가 되고, 순식간에 익숙한 열감에 휩싸인 두 사람은 입술을 넘어 서로의 몸을 쓰다듬으며 서로를 사랑하는 시간으로 빠져들어 갔다.

***

다음날.

삭막한 도시 생활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새소리에 희수가 눈을 뜨고 자신을 안고 곤히 자는 진우를 눈에 담았다.

참 좋은 사람, 참 착한 사람, 참 마음 약한 사람, 진우는 희수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Rrr… Rrr….

익숙한 벨소리에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보았다.

진우에게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 전화를 한 것이다.

희수는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겠다는 표정을 짓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엄마’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미간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우 엄마는 희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을 7년 동안 항상 불안하게 했었다.

7년을 만나면서 단 한 번도 진우 엄마를 만나본 적이 없는 희수였다.

이유 없이 진우 엄마에게 아들의 여자친구로서 부정당하고 있었다.

아니, 분명 이유는 있었다. 잘나가는 집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6년 전의 일이다.

진우와 온종일 연락이 닿지 않는 날이었다.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진우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진우 선배 학교 후배인데요. 혹시, 진우 선배 집에 있을까요?”

[학교 후배라고요? 근데 어쩌지? 진우 지금 집에 없는데….]

“아, 네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저기, 잠깐만요!]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진우 엄마가 수화기 너머로 급하게 불러 세웠다.

[그런데 우리 진우한테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전화한 용건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말이었지만, 그 말에 숨겨져 있는 날카로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희수였다.

“아… 네. 선배랑 오늘 연락이 안 돼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요.”

[그랬군요. 오늘 진우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시골 외갓집에 내려갔어요. 핸드폰을 놓고 가서 연락이 안 됐나 보네요. 그런데 우리 진우랑 무슨 사이예요?]

희수는 눈앞에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진우 엄마에게 추궁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진우 엄마가 아닌가. 좋은 마음으로 대하자 생각했다.

사귄 지 1년이 넘도록 부모님께 여자친구가 있다는 얘기도 하지 않은 진우를 생각하니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들이 말하지도 않은 여자친구의 존재를 먼저 밝히는 것은 진우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