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변덕스러운 삶, 그 안에 사랑.

완연한 가을에 들어선 길거리는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나뭇잎들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진이 프랑스 파리로 떠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매일 톡으로 서로의 일상을 묻지만, 시차로 인해 제대로 된 통화를 한 지가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연락이 쉽지 않아 아쉬워했던 희수였다.

그런 유진과 오랜만에 페이스 톡을 하는 중이다.

“희수야, 나 너무 외로워. 흐흐흑.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고. 여기 오니깐 인성 씨는 너무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고. 흐흑. 나… 한국 돌아가고 싶어. 흐흐흑.”

“…어떡하니. 울지 마. 네가 울면 한방이도 힘들 거야. 힘내… 유진아.”

“정말 요즘 같아선 내가 왜 인성 씨랑 결혼했는지 모르겠어. 말도 안 통하지, 지리도 모르지. 인성 씨는 인성 씨 대로 회사 키운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내가 투정 부리지도 못해. 흑흑. 희수야… 나, 네가 너무 보고 싶어. 흐흐흑.”

항상 쾌활하고 밝았던 친구가, 파리 생활 한 달 만에 못 살겠다 울고불고하는 모습에 희수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희수 또한 절친 유진이 없는 빈자리가 생각보다 컸다.

“희수야, 네가 여기 잠깐 와 주면 안 될까? 내가 인성 씨한테 얘기해서 비행기 표 보내줄게. 나 정말 너무 외로워. 흐흑.”

“뭐? 파리로?”

“응. 나 너무 염치없지. 너 멀쩡히 직장 다니는데 오라고 하고. 근데 희수야, 인생 뭐 있니? 한 번쯤은 파리에서 한 달 살기 뭐 이런 거 괜찮지 않아? 내가 생활비 다 지원할 테니까 생각 한번 해봐. 파리에서 한 달 살기! 흐흐흑. 흐앙.”

희수는 엉엉 울어대는 유진을 한참 동안 달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유진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희수였다.

‘파리에서 한 달 살기라… 괜찮지 않을까.’

유진의 말처럼 한 번뿐인 인생,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해서 후회하진 않을 것 같았다.

***

식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재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희수를 바라보았다.

‘저 조그마한 입술로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어디를 간다고? 파리? 한 달? 하아… 정말 미치겠다.’

오랜만에 카페를 일찍 마감하고 희수의 집에 온 재석은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희수의 파리에서 한 달 살기 계획은 그만큼 재석을 당황스럽게 했다.

“그러니깐, 회사에서는 급하게 계약직 직원을 채용하기로 했어요. 사실, 난 너무 죄송해서 이번에 일을 그만둬야 하나 했는데, 사장님이 그러지 말라고 말리셔서. 다행히 제 선임이었던 분이 아이가 어린이집 다니게 됐다고 잠시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정말 잘됐죠?”

‘하… 어쩜, 저렇게 해맑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 있지? 한 달이나 나랑 떨어져 있는데. 하아, 김희수.’

“오빠? 오빠, 내 말 듣고 있어요?”

“응? 응. 듣고 있지. 아주 잘 듣고 있어. 하아… 근데 희수야, 언제 이렇게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 거야? 난, 네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소린 줄 알고 그냥, 유진 씨 말에 잠깐 흔들리나보다 했지. 오빠는 사실, 좀 당황스럽다.”

희수는 근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재석을 보고는, 그제야 그와 상의 없이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나 생각했다.

하지만, 재석과 상의를 했더라도 파리 여행에 대한 계획은 바뀌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지난 연애를 경험으로 희수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에게 얽매이는 것보다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사랑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물론, 희수 또한 재석과의 관계를 생각했기에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한 달 아닌가.

앞으로의 몇 십 년의 삶에 한 달은, 하얀색 도화지 위에 찍힌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 도화지를 채우는 시작점처럼 말이다.

“오빠, 오빠도 예전에 대학 다닐 때 두 달 동안 유럽 배낭여행 다녀온 적 있다면서요. 그때의 기억과 경험이 커피를 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했잖아요. 나도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나를 좀 더 들여다보는 시간이 됐으면 해요. 뭐, 거창한 미래를 계획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앞으로를 위한 쉼과 시작점?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오빠한테 구체적으로 상의하지 않고 결정한 건, 미안해요.”

“아, 아니야.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나도 더는 할 말은 없어. 그렇지만 그 낯선 곳에 널 혼자 보낸다는 게 걱정되니깐… 혹시 알아? 파리 남자가 너 쫓아다니면 어떡하냔 말이지. 진짜, 미치겠네.”

“오빠, 너무 웃겨요. 무슨 그런 말을! 난 오빠밖에 없어요. 그리고 내가 파리 남자 스타일도 아니고….”

희수가 재석의 어깨를 살짝 치며 유쾌하게 웃더니, 이내 시선을 옆으로 돌려 부끄러운 듯 빨개진 두 볼에 손을 얹었다.

‘김희수, 아니 왜 파리 남자 얘기하는데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건데? 하… 진짜.’

“…희수야, 오빤 진짜 걱정이다. 하아, 너 없이 어떻게 한 달을 버티냐….”

재석이 의자에 앉은 채 무릎 사이로 고개를 떨구며 거의 절망하듯 말했다.

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으로 가서 떨궈진 그의 얼굴을 손으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재석을 보니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시무룩해진 재석의 두 볼을 자그마한 손으로 감쌌다.

“오빠, 걱정 말아요. 파리 가서 매일 매일 연락도 할 거고, 자주 영상통화도 해요. 그리고, 파리 남자는 쳐다도 안 볼게! 정말이야. 약속! 그러니깐, 너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빠가 이런 표정 지으면 내 마음이 너무 불편하잖아.”

재석은 자신의 볼을 감싸며 따스한 눈빛으로 달래듯 말하는 희수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희수의 몸에 얼굴을 묻고는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깊숙이 감싸 안았다.

그러자 희수가 재석의 머리를 살며시 쓸어주었다.

희수의 체향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제야 불안했던 그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거의 매일 만나왔던 사이인데… 재석은 새끼 강아지처럼 희수의 몸에 얼굴을 비벼댔다.

머리는 알겠는데 마음은 자꾸 가지 말라고 한다.

‘하아… 김희수, 은근 고집쟁이다.’

몇 주 뒤, 인천공항 출국 게이트.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항 안에 마치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재석이 한참 동안 희수를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가자마자 연락하고, 너 잘 부탁한다고 어제 인성이랑 통화 했어. 건강 잘 챙기고, 매일 매일 연락하는 거 잊으면 안 돼. 알겠지? 시차 걱정하지 말고 너 눈 뜨자마자 전화해. 자기 전에 꼭! 전화하고. 하아… 희수야, 안 가면 안 돼? 아, 아니다. 잘 다녀와. 사랑해, 우리 희수.”

재석이 아쉬운 듯 그녀의 이마에 한번, 콧잔등에 한번, 마지막으로 사랑스러운 입술에 한번, 쪽. 쪽. 쪽. 뽀뽀를 해댔다.

희수에게서 나는 달큰한 향이 그의 입가에 머물렀다.

“알았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오빠도 건강 잘 챙겨요. 사랑해요, 오빠.”

희수가 재석을 향해 밝게 웃어주고는, 마지막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키스해주었다.

그녀의 촉촉한 입술이 목에 닿자 재석은 혼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좀 더 붙잡아보는 건데. 하아… 보내기 싫다. 진짜.’

재석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희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다, 이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옮겨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디며 공항을 빠져나왔다.

인천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12시간의 긴 비행을 끝내고 샤를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게이트에 마중을 나온 유진을 본 순간 희수의 두 눈이 촉촉해졌다.

유진이 인성과 함께 서 있었는데, 이젠 제법 동그랗게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고 있는 친구의 얼굴이 너무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입덧으로 고생했을 때보다 더 푸석해 보이는 모습에 희수의 마음이 아파져 왔다.

“희수야! 우리 희쑤! 으아앙. 너무 보고 싶었어. 와줘서 고마워, 흐흐흑. 오느라 고생 많이 했지?”

“아니야. 나야 뭐. 그나저나 너 왜 이렇게 얼굴이… 흠, 많이 힘들었구나. 배만 나왔지 살은 더 빠진 것 같아. 유진아, 한방이는 괜찮은 거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을 희수가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희수 씨, 파리까지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유진이랑 한방이가 저 때문에 여기서 고생이 많습니다. 재석이한테도 고맙고.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어서 가시죠.”

인성이 희수의 캐리어를 끌고 앞장을 서자, 유진과 희수가 그 뒤를 따랐다.

희수는 공항에서 유진의 집까지 가는 동안, 유진의 우울했던 파리 생활 얘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파리 생활 중 가장 큰 어려움은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힘들다는 거였다.

낯선 이국땅에서 한국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도 쉽지 않다며 성격 좋은 유진이 속상해했다.

불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서툴러 인성이 없으면 시내로 나가지도 못하고 온종일 집에만 있는다는 말은 희수에게도 조금은 충격이었다.

언제나 명랑하고 쾌활했던 유진이었는데….

두어 달 동안의 파리 생활이 유진이를 많이 변화시킨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파리 시내를 조금 지나 인성과 유진의 집에 도착했다.

고풍스러운 5층짜리 주상복합 아파트는, 1층에 레스토랑과 디저트 카페를 두고 있었는데, 그나마 인성이 없을 때 유진이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고 했다.

2층에 위치한 유진의 집은, 복층으로 되어있어 아래층은 거실과 부엌, 손님방이 있었고, 위층에 침실과 곧 태어날 아이 방이 꾸며져 있었다.

“인성 씨가 편하게 모던한 아파트로 가자고 했는데, 그래도 파리에 오래 있을 건 아니라서 파리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에 집을 얻자고 했거든. 여기가 지하철도 가깝고 센강도 가깝고 공원도 가까워서 좋긴 해. 말할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유진이 피곤한지 안락의자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해가 지는지 아파트 창문으로 불그스름한 햇살이 드리워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희수가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코니로 나가니 손에 닿을 듯 말 듯 한 늦가을 가로수 나뭇잎이 희수의 파리 방문을 반기듯 황금빛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아, 내가 파리에 왔구나.’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일주일 뒤.

오늘도 늦잠을 잤나 보다.

희수는 8시간 시차에 적응하는 것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유진도 여기 와서 일주일은 시차 적응 때문에 힘들었다며 희수에게 느긋하게 적응하라는 말을 했다.

유진과 늦은 아침을 먹고 10분 정도 걸으면 갈 수 있는 센강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파리의 11월은 늦가을의 정취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절정을 넘어선 낙엽들이 잔잔한 바람에 보도 위에 떨어져 희수의 발아래 바삭한 소리를 내며 밟혀왔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센강을 걸으며 관광객을 실은 배가 지나갈 때마다 영롱하게 빛나 물결치는 강물을 눈에 담았다.

평화롭고 한가롭기 그지없는 풍경에 희수의 입가가 살며시 올라갔다.

27살, 희수에게 파리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모든 것이 신비롭고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은 이곳이 파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첫 경험이라서일까.

파리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특별하게 어디를 가지 않아도 유진의 집 근처 레스토랑과 카페와 꽃집만 들렀어도 희수는 마냥 행복했다.

클래식한 건물들 사이로 오래된 돌로 만들어진 보도블록을 걸어가는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파리지앵의 모습을 보는 것 또한 희수에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희수야, 근데 너 재석 씨한테는 연락 자주 하는 거지? 하루 이틀 밤낮 가리지 않고 통화하더니 요즘 며칠 지났다고 뜸한 거 같아서 말이야.”

유진이 그사이 출출한지 입에 바게트를 한가득 물고는 희수를 바라보았다.

“응. 아무래도 시차 때문에. 내가 일어날 땐 오빠가 한참 일할 때니깐. 통화하다가 손님 오면 곧장 끊어야 해서. 오빠 퇴근할 때는 내가 이렇게 밖에 나와 있으니 연결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이따 집에 가서 톡 하지 뭐.”

“얼~ 희쑤! 뭔가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진 것 같다? 보기 좋아, 아주 좋아! 근데 사실 나야 너 오니깐 너무너무 좋은데… 재석 씨한테 좀 미안하긴 해. 이렇게 일정 급하게 잡아서 왔는데 흔쾌히 보내주고 쫌 멋진 듯!”

유진의 말에 희수가 문득 파리를 간다고 했을 때 속상해하던 재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재석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드는 희수였다.

막상 이곳 파리에 오니 이곳의 분위기를 만끽하느라 재석을 생각한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재석이 알면 서운해 하겠다 싶었지만, 희수는 지금 이 순간, 파리 생활에 심취하고 싶었다.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은 희수에게 한 달은 짧게만 느껴졌다.

유진과 아름다운 센강 변을 걸으며 희수는 떠오르는 재석의 얼굴을 일부러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금은 파리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희수야, 우리 배고픈데 밖에서 맛있는 거 사 먹고 가자.”

“그럴까?”

“인성 씨가 너 맛있는 거 사주라고 카드 주고 갔어. 왕창 먹어야지, 아싸!”

두 사람은 센강 변과 저 멀리 에펠탑이 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유명하다는 디저트 카페에서 커피와 밀푀유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오후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11월의 변덕스러운 파리 날씨는 언제 햇살이 비췄나 싶게 하늘 위로 먹구름이 드리워지더니,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맞는 것도 낭만이라며 임산부인 유진은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한 손에는 희수를, 한 손에는 배를 받치고 느릿느릿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집 앞에 거의 다 왔을 때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갑자기 굵어지더니 꽤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희수는 유진이 걱정되어 어닝이 처진 와인 숍 앞에 멈춰 서서 유진이 비를 맞지 않도록 어닝 안으로 끌어당겼다.

“어? 여기 와인 숍 인성 씨 단골집인데. 겉보기엔 작아 보여도 꽤 고급 와인을 취급하나 보더라고. 사장님이, 한국분이야. 그래서 나도 가끔 한국말 그리울 때 한 번씩 들려. 임산부라 와인도 못 마시는데 말이야. 그래도 사장님이랑 그 주드라고 조카 있거든. 내 사정 알아서 말동무도 해주고. 인성 씨가 고맙다고 바이어들 와인 선물할 때 여기서 꼭 사가.”

유진이 와인 숍을 설명하던 그때에,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희수의 등 뒤로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