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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맨해튼의 섹시한 아침
꿈같은 태양의 섬 발리를 뒤로, 도심 서울로 돌아온 혜주는 곧바로 병원으로 출근했다. 이우는 이틀 후 뉴욕으로 돌아갔고, 누구나 그렇듯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
혜주는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표범처럼 일에 몰두했다. 한 달 후, 뉴욕으로 갈 채비도 순조로웠다. 그곳에서의 업무가 안정되면 미술사 공부도 시작할 생각이었다.
알아달라는 듯 서류철 위에 놓인 폰 진동이 울려댄다.
“요한아!”
“오늘 저녁 어떠니?”
“괜찮아!”
“내가 그쪽으로 갈게, 7시에 보자!”
“그래, 좋아!”
요한이 오랜만이다. 혜주는 좀 일찍 도착해서 괜찮은 음식점을 돌아봤다. 스마트폰이 울렸다.
“나 왔어. 어디에 있어?”
“나 어디에 있냐 하면…… 어! 봤어. 요한아!”
요한이 두리번거리더니 혜주를 찾아내고 돌진했다. 여전히 하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걸어왔다. 그리고 친밀하다는 걸 각인시키듯 자연스럽게 혜주 어깨에 팔을 얹었다. 혜주는 그걸 느끼지도 못한 듯 여전히 무심했다. 친밀함. 요한은 그게 문제라는 걸 몰랐다.
“뭐 먹지?”
“중동음식점 있더라. 어때?”
“그래, 거기 가자.”
둘은 쇼핑몰에 새로 생긴 중동음식점에서 후무스 프레즈세트와 마리네이트 양갈비를 주문했다.
“파리에 얼마나 있었던 거야?”
“두 달.”
“휴가는 아니었겠네.”
“응. 사실 나 그만두고 다녀온 건데 다시 회사 복귀했어.”
“내가 전화했을 때 말 없더니. 암튼! 어쨌든, 어떻게 복귀된 거야?”
“뉴욕분원 발령받았어. 그렇게 됐네!”
“잘된 거지? 얼굴 좋아 보인다.”
요한은 잔을 한 손에 쥔 채 혜주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녀를 순간 와락 안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허리를 펴고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어 지그시 바라봤다. 이렇게 또 멀어지는구나. 너는.
“그래?”
“병원에 남을 거야? 개원할 거야?”
“응. 학교에.”
“그래, 신경정신과는 그편이 연구환경이나 여러모로 좋지. 난 지난번에 일본 호리 교수 가메다 병원 갔었어. 최면요법도 받았고.”
“오. 그랬어?”
“기억나? 나 유난히 꿈 잘 꾸던 거.”
“그래 대학 때 도서관이며 서점이며 헤집고 다녔지. 해몽한다고. 지금도 꿈 잘 맞아?”
“요즘 들어 유난히 자주 꾸긴 하는데.”
“꿈에 너무 매달리지는 마. 그게 스트레스가 될 수 있어.”
“응, 그래도 신기하잖아, 꿈과 최면은 또 다르니까.”
“그래, 신기하지. 최면에서 본대로 되기도 하니, 수백 년 전 장소에서 실제 보물을 찾기도 하고.”
“최면요법 어땠어?”
“그게 정말 신기해. 내 과거, 미래도 봤어. 과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미래는 어떻게 보이지?”
“아마 촉이겠지? 무서운 태풍이 오기 전에 동물들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든지 그렇잖아. 인간도 동물이니까.”
“뭐, 최면술을 통한 기억이 반드시 맞다 할 수 없다고 해. 상당히 자기중심적이지. 자기가 소망하는 방향으로 기억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고.”
“오랜 전생도 기억인 거잖아.”
“미래예측이 반드시 정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치유의 목적이 더 커. 긍정적인 자아 찾기지.”
“정확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우리의 무의식이 반영되는 거니까.”
“앞으로 5년 10년 후 그렇게 실현될 가능성. 매우 높은 하나의 확률로 보면 돼.”
“암튼 미스터리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있잖아.”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뭐. 의학에서는 치유, 법학에서는 기억검증으로 많이 활용하니까.”
“그래서 전생에 너는 뭐로 보였어?”
요한이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두 개의 전생을 봤어. 하나는 내가 수도원 원장 수녀더라고, 또 하나는 프랑스였는데 내가 죽는 장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더라. 실제로. 소름 끼치도록 너무 생생했어.”
“그랬어?”
“응, 정말 실제처럼 강렬해. 그걸 최면요법으로 치유를 하는 것 같아. 개운해지고, 머리도 맑아지고 마음이 한결 나아졌으니까.”
“네가 이혼 상처로 충격받아 더 그랬을 거야. 어…… 미안.”
“아니야. 괜찮아. 그렇더라고.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었어.”
요한은 혜주가 봤다는 미래. 묻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다. 무엇을 바라는지 궁금했다. 속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언제나 주저하고만 있었다. 그녀를 위한 것인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인지 어떤 마음이길래 도무지 갈팡질팡했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었던 것처럼 요한은 그녀를 그냥 뉴욕으로 보내고 말았다. 혜주 역시 이우와의 만남을 요한에게 말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뉴욕으로 가면 어차피 멀어질 거니까. 이기적인 마음도 필요하다 여겼다. 다시, 당장은. 당장은 말이지. 아파할 만한 한 톨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요한은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잔뜩 줄줄이 대기 중인 시험이 골치 아팠고, 군인 병원 근무도 시작할 거였다. 내년을 기약하자 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드러내보았자 그녀는 더 멀리 가버릴 것이었다. 요한은 혜주에게 잘 다녀오라는 말 외에 다른 방도가 없음을 비관했다.
“뉴욕에 놀러 와. 내가 그전에 한 번 정도는 서울 올듯해. 나, 간다!”
언제 또 볼지 모를 혜주의 말이었다. 요한은 담담하게 장난치듯 눈썹을 찡그리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도 숨기기 어려웠다. 손을 흔들고 돌아서자마자 얼굴은 굳어졌다.
‘바보 멍충이 같으니…….’
……
혜주는 요한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경쾌한 재즈를 틀었다. 뉴욕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고대했다. 꿈만 같았다. 정리할 것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우와의 발리 여행은 달콤했고, 황금 같은 휴식이었다. 그에게 뉴욕 발령 났다는 것을 비밀로 한 채 내내 장난기로 들뜬 마음이었다.
떠나는 날은 생각보다 성큼 다가왔고, 혜주는 공항 라운지에 들어가 간단히 아침을 들었다.
560톤의 뉴욕행 A380 현존하는 가장 큰 에어라인에 몸을 싣고도, 80미터의 긴 날개가 보이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항해는 시작되었고, 혜주는 자신의 인생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싶었다.
이제 14시간 뒤 뉴욕 땅에 있게 된다. 바라는 대로 된다고 했던가. 꿈만 같았다. 혜주는 탑승 후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전화하고 이우에게는 톡을 남겼다. 전혀 모르고 있는 그는 아침부터 풍경을 담은 동영상을 보내왔다. 보고 싶었다. 만지고 싶었다.
*
이우는 로스앤젤레스의 중심가에서 남서쪽으로 24㎞ 떨어져 있는 해변 휴양도시 산타모니카로 떠났다. 푸른 바다와 붉은 태양, 흰 모래, 파도, 야자수 도로 사이로 자전거를 탈 생각이었다.
조그만 마을 골목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다 귀엽고 조그마한 아이와 마주치자 이우는 반갑게 소리 내어 인사했다. 이우는 동영상에 담았고, 혜주에게 보냈다.
“헬로우.”
이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매력적인 음성. 혜주는 설렜다. 그 마음을 아는지 뉴욕행 비행기는 창공을 유유히 가로질러 갔다.
이우는 그새 캘리포니아 남부 해변을 줄기차게 자전거를 타며 가고 있었다. 뮈세가 바다를 좋아했던 것처럼…… 그가 바다에 앉아 있는 뒷모습은 영락없는 뮈세였다.
이우는 오후 3시경 바닷물결이 너무나 고요해서 숙연해진 듯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아크릴물감으로 어떤 이물감도 없이 칠해놓은 듯했다. 조약돌만큼이나 완벽하게 매끄러운 표면을 연출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졌다.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그림. 그 그림 그리던 남자가 뮈세라는 것을 모른 체 말이다. 이우는 감성에 젖으면 예술가처럼 은둔하고 싶었다.
*
태평양 건너다
드디어, 뉴욕이다. 오랜만에 찾은 뉴욕은 언뜻 봐서 달라진 게 크게 없었다. 새로운 환경은 두려움과 동시에 환상도 딸려오는 법이다. 기분은 꽤 괜찮았다. 묵직한 트렁크는 튼튼한 바퀴를 자랑하며, 연신 잘 돌고 있었다.
공항에 병원기획실 제이미가 나왔다. 그는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뉴욕에 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이제야 직접 뵙네요.”
“너무 잘 오셨습니다. 저희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오! 그래요? 저도 빨리 뵙고 싶었어요. 고맙습니다.”
제이미는 깔끔한 가르마 라인의 올백 포마드 스타일링을 하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무척 잘 어울렸다. 그는 혜주가 지낼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다. 관리인을 소개해주고, 자상하게도 마트에서 장을 봐 두었다며 주말에 요리해 먹을 수도 있다 했다.
“제이미 고마워요.”
“필요한 것 언제든 전화 주세요. 다음 주 출근이신데 걱정이네요. 최대한 주말까지 편히 쉬셔야. 워낙 서울서도 미리 업무 체크 하셨으니 현재 다른 큰 사안은 없습니다.”
제이미는 벌써 보고를 하더니 데이트 시간에 늦은 듯 속도를 냈다.
“고마워요, 제 친구도 뉴욕에 있으니 크게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되어요. 물론 제이미가 가장 제게 도움이 될 거고요.”
제이미는 현관을 나가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팔 불 듯 크고 경쾌했다. 혜주는 창밖 펼쳐진 뉴욕의 빼곡한 모습을 보며 뮈세의 뉴욕 맨해튼 빌딩 그림을 떠올렸다.
‘뮈세가 뉴욕에 왔었단 말이지…….’
이우는 5개국 출장 비행 스케줄을 스크린 샷으로 혜주에게 보냈다. 그중 서울 일정도 있었다. 이우를 놀라게 할 생각에 웃다가 스마트폰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긴장이 풀리고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자, 혜주는 침대에 그대로 쓰러지듯 누워 세상 모르게 잠들었다.
*
이우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혜주다.
“벌써 일어났어요?”
혜주는 뉴욕 시각 새벽 4시부터 멀쩡한 정신으로 거실과 방과 주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오늘 저녁 시간 어때요?”
혜주는 다짜고짜 물었다.
“저녁 시간? 내가 그리도 보고 싶소? 그렇다면 뭐, 당장 서울로 제트기 타고 날아가 주지.”
“와요. 그럼!”
“정말? 정말 날아간다.”
“서울까지 날아갈 필요는 없고, 미드타운 맨해튼 메디존.”
“??”
“농담하지 마. 뉴욕에 마치 온 것처럼.”
“…….”
“어? 설마 진짜 지금 뉴욕? 설마!”
“설마가 사람 잡죠. 저 진짜 뉴욕이에요.”
“아이~ 이 사람. 아주 날 놀리는 게 취미 됐군. 그러지 마. 나 힘들어.”
“여기 주소가. 잠깐만요. 뉴욕 미드타운 160 Madison Avenue, 10016번지.”
이우는 손바닥으로 이마에 갖다 대고 사실을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저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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