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 사람이랑 헤어져 줬으면 좋겠어.”

“뭐?”

나는 멍한 표정으로 건너편에 앉아있는 언니를 바라보았다. 종업원이 막 내온 찻잔에서 하얀 김이 유령처럼 위태롭게 번지고 있었다.

“네게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미안해. 나랑 그 사람, 서로 정말로 사랑하고 있어.”

“거짓말!”

“믿고 싶지 않겠지만 모두 사실이야.”

빠르게 뛰던 나의 심장은 점점 거칠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차갑게 식은 손이 바들바들 떨려 꼭 마주 잡아야 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에 뭔가 커다란 것이 걸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진정되지 않는 가슴께에 떨리는 손을 얹고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울고 싶은 건 난데…….’

가슴에 날카로운 활이 관통한 것처럼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기분을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지? 아. 그래. 그때…….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지. 미미가 죽었던 그날에도…….

어릴 때 언니가 예뻐하던 강아지가 있었다. 언니가 9살 생일을 맞이하던 날, 아버지께서 선물로 안겨 주신 혈통 좋은 요크셔테리어였다. 엄마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그해 가을이었다.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엄마를 잃은 우리에게 연민을 느끼셨던 것 같다. 사실 언니가 강아지를 키우게 해 달라고 조른 건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곤 하셨다. 하지만 엄마가 떠나고 나서 아버지는 모든 것에 관대해지기로 마음먹으신 것 같았다. 언니가 외롭다며 보인 거짓 눈물에 쉽게 넘어가신 것도 결국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니는 강아지 이름을 미미라고 지어주고 아주 예뻐했다. 나 역시도 작은 생명이 뿜어내는 그 귀여움에 홀딱 빠져들어 온 마음을 내어주고 말았다. 하지만 강아지는 엄연히 언니의 소유였다. 내가 미미를 온전히 예뻐할 수 있는 시간은 언니가 집을 비울 때뿐이었다. 어린 마음엔 그게 조금 치사하고 속상했었던 것 같다. 어느 날엔가 서재에서 일하고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 내 생일에도 강아지를 사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라댔다. 처음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시던 아버진 잠시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이내 그러마하고 약속하셨다.

이듬해 봄, 나는 달력 숫자를 하나하나 지워가며 늦여름에 있을 나의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시간은 무척 더디게 흘러갔다. 마치 시계 침에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것 같았다.

집을 관리해주던 아저씨께서 마당에 심어 손수 가꾼 커다란 벚나무가 생생한 초록 잎들을 내던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오빠는 친구와 통화를 하는지 거실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시끄럽게 떠들며 웃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와 주방 아주머니께서 챙겨주신 주스를 마시던 나는 오빠의 눈치를 살피며 내 방으로 살금살금 돌아가고 있었다. 오빠는 배다른 동생이었던 나를 무척 미워했고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화를 내곤 했다. 그 무렵, 나의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귀신이나 괴물이 아닌 오빠였다.

“유박 비료? 그걸 강아지들이 그렇게 좋아한다고?”

“어, 박 씨 아저씨께서 얼마 전에 나무 밑에 뿌리는 걸 본 것 같은데……. 동글동글 나뭇조각처럼 생긴 거, 맞아. 그거.”

“정말? 그게 그렇게 강아지들 건강에 좋은 거야?”

오빠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계단 위를 오르던 내 발목을 잡을 만큼 솔깃한 정보였다. 난 방으로 올라가다 말고 벽 뒤에 숨어 오빠의 통화를 훔쳐 들었다. 곧 화제가 다른 내용으로 넘어갔고 나는 방으로 올라가는 대신 살금살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들키지 않고 문밖으로 나온 나는 신이 나서 벚나무 아래로 기어 올라갔다. 커다란 마당 한쪽에 엄마가 좋아하던 작은 인공 호수가 있었다. 우리 집의 마스코트나 다름없는 왕벚나무는 그 호수의 가장자리, 조경용 바위를 쌓아 올려 만든 작은 언덕 위에 심겨 있었다. 가파른 바위들이 조금 벅차긴 했지만, 유치원에서 매일같이 숲 체험활동을 했기에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불과 몇 주 전, 하얀 구름 같았던 커다란 벚나무는 어느새 꽃을 다 떨구고 가지마다 초록빛 잎사귀들로 가득 뒤덮여 오후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고르다가 나무 둥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나무 밑엔 동글동글 작은 나뭇조각 같은 것들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조각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조금 묻어 있었지만, 입으로 호호 불어 터니 금세 깨끗해졌다. 깨끗해진 유박 비료를 재킷 주머니에 넣어 콧노래까지 부르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언덕을 내려오느라 옷이 지저분해졌지만, 머릿속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맘때 미미는 부쩍 잠을 많이 자고 사료를 잘 먹지 않았다. 그것이 간식을 많이 준 우리 때문이라는 걸 몰랐던 나와 언니는 늘 그런 미미를 걱정하곤 했다.

집 안으로 들어갔더니 통화를 하던 오빠는 방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잽싸게 언니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서 잠이 들어 있는 미미를 조심스럽게 안아 주었다. 유박을 쥐었던 손을 대어주자 미미가 눈을 뜨고 킁킁 냄새를 맡으며 관심을 보였다. 나는 소중하게 담아 온 유박을 미니의 밥그릇에 부어 주었다. 남아있던 사료 위에 동글동글한 알갱이가 떨어져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정성을 알아준 것인지 한참 동안 냄새를 맡으며 탐색만 하던 미미가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괜히 뿌듯한 마음에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하야, 여기서 뭐해?”

언제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언니가 책가방을 던져놓고 황급히 다가왔다.

“아, 언니. 미미한테 맛있는 걸 주러 왔어.”

“그게 뭔데?”

“나도 잘 몰라. 근데 미미가 잘 먹어.”

언니는 미미가 먹는 모습을 보고는 더는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잘 먹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사료를 다 먹으면 안아줘도 좋다고 허락까지 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미미의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미미는 저녁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우린 걱정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미미가 거실 구석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있는 것을 청소 아주머님께서 발견하셨다. 이른 아침 출근하셨던 아버지께서 급히 돌아오셨고 언니는 잠옷을 입은 채로 울다가 탈진해 쓰러지고 말았다.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동물병원 의사 선생님께서 미미의 입안에서 유박 조각을 발견하셨다. 그리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것이 원인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벚나무 밑에 유박 비료를 뿌려놓긴 했지만,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돌로 높게 쌓여 있는 곳입니다. 미미가 어쩌다 집을 나왔더라도 부러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에요. 동물들에게 독성이 있다는 걸 알고 벚나무 아래 외에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집어 먹이지 않고서는…….”

관리사 아저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른들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계단 구석에 서서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오빠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오빠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던 나는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어야 했다. 애써 시선을 돌린 그곳엔 그 아이가 있었다. 커다랗고 예쁜 상자 안, 언니가 덮어준 손수건 아래 편안한 듯 누워있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작은 강아지 미미가…….

관리사 아저씨는 그날로 바로 해고를 당하셨다. 아버지는 집에서 동물 키우는 것을 다신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처음엔 나를 무척이나 원망하던 언니도 시간이 지나자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미미는 그날의 사건과 함께 흐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다. 그 후로 쭉 그날의 아픈 기억이 날카로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었다.

그때 나 때문에 미미가 죽게 되어 언니는 나를 아직도 미워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나에게도 똑같은 상처를 주고 싶어서?

“그럴 리가 없어!”

“나라고 유하 너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쉬웠을 것 같아? 하지만 시간을 끌면 끌수록 네게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이렇게 털어놓는 거야”

“다 거짓말이야.”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어. 그 사람도 날 사랑한다고 했고…….”

“그. 그건 말도 안 돼.”

“믿어지지 않겠지. 너도……. 나도 사실 믿어지지 않으니까.”

“언니. 이건 말도 안 돼. 6년의 사랑이 이렇게 쉽게 변할 순 없는 거잖아. 둘 다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야? 아니면 날 놀리려고 작정이라도 했어? 그런 거라면 그만 해. 재미없으니까.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랑이 변해!”

“넌, 그 6년이라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야. 그리고 그렇게 유치하게 따지자면 그 사람은 너보다 내가 더 먼저 만난 사람이고. 우리 둘, 첫 만남 이후로 한순간도 서로를 잊어본 적 없어…….”

나는 다시 멍한 표정으로 언니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언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선우랑 나, 고등학교 다닐 때 처음 만났어. 교외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였는데, 우린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를 좋아했어. 그리고 우린 첫 키스를 나눈 서로의 첫사랑이기도 해.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지만 아직도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확인했어.”

“…….”

“지금의 걘 널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까 두 사람이 아무리 오래 만났다 해도 상관없어. 지금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이……. 그것이 중요한 거야. 너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언닌 그 사람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아.”

갑자기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었는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언니, 그 사람과 난 곧 결혼하기로 약속까지 했어. 언니도 들었잖아. 우리 두 사람 약혼했다는 거.”

목이 메어왔다. 나는 쥐어짜듯 작은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그래, 처음엔 너희 두 사람 축하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들어왔어. 그가 나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나도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그래도 축복해주려고 했어. 그랬는데 그 사람 역시 내게 가졌던 감정을 그대로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버린 거야.”

눈물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언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해, 유하야. 정말 미안해. 언니가. 네 남자를 빼앗은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아. 그런데 이 감정이 도무지 포기되지 않아. 정말로 열심히 다잡으려고 했는데, 그게 되지 않아. 더군다나 그 사람 마음에도 내가 있다는 걸 알고서는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어. 네가 날 미워하고 증오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해. 유하야. 미안하지만 그이를 놓아줘.”

“언니!”

“너희 두 사람 6년 동안 잠자리도 한 번 가진 적이 없다며.”

“뭐?”

“유하야, 그건 잔인한 짓이야. 그 사람에게 못 할 짓이라고. 그동안 넌 사랑이라는 사슬로 그 사람을 속박하고 있었던 거야. 어쩌면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건 사랑이 아니야. 소유하고 싶은 욕망 그뿐이라고!”

몸에 있는 모든 혈관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이 이런 얘기까지 한 것일까? 언니는 우리 두 사람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이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어버린 걸까? 정말로 마음을 모두 언니에게 내줘버린 것일까?

　“오. 오빠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어. 정말로. 정말로 우리 사이를 끝내고 싶은 것인지…….”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는데 손이 덜덜 떨려왔다. 잠금 화면을 해제하기 위해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자꾸만 잘못된 번호가 눌려 열어지질 않았다.

“확인해봤자 너만 더 힘들어질 뿐이야. 넌 강한 사람이잖아. 언제나 잘 이겨냈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거야.”

언니의 젖은 목소리가 많이 떨고 있었지만 나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는 나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야, 난 강하지 않아. 난 약한 사람이야. 그 사람도 알고 있어. 모든 걸 아는 그 사람이 내게 이렇게 잔인하게 굴 리 없어.’

비밀번호가 풀어졌다. 내가 그 사람의 단축번호를 힘주어 누르자 통화연결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언니가 내 전화기를 빼앗아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언니! 무슨 짓이야!”

나도 모르게 격앙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언니는 그런 날 잠시 노려보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네가 이럴수록 언니가 더 미안해지잖아. 너한테 이런 얘기까지 하게 만들면 어떻게 해. 유하야. 그냥 언니의 부탁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들어줄 수는 없겠니? 언니는 정말 그 사람 없인 살아갈 수가 없어.”

“언니!”

‘나도야! 나도 그래. 나도 그 사람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가 없다고.’

다음 말은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입안에서만 맴도는 그 말을 마치 주문처럼 중얼거렸지만, 목에 걸려 튀어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이런 미래를 예감했었던 걸까? 흐릿해진 눈가로 나의 사람이 점점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낚아챈 내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얼굴을 묻고 흐느끼던 언니는 핸드백 안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쓱 밀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멍하니 언니가 내민 그것, 정확히는 사진 한 장을 바라보았다.

투둑.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섬뜩한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여전히 흐릿한 눈을 깜박이며 흑백으로 된 작은 초음파 사진에 적혀있는 글씨를 바라보았다. 8주 4일.

“이것까지 네게 말하게 되는 건 원치 않았는데…….”

사진을 향해 떨리는 손을 내밀던 나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쳐야 했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선우한테는 얘기하지 않았어. 요즘 병원에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고 너와의 관계도 정리되지 않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면 더 힘들어할까 봐. 너희 두 사람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면 그때 이야기할 예정이야. 그러니까 빨리 정리해 줘. 내 말이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그것이 우리 두 사람과 아기, 그리고 너의 미래를 위해서도 최선일 테니까.”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꿈인 것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혹시 이 모든 것이 정말로 꿈은 아닐까? 가위에 눌려 심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빨리 깨어나고 싶은데…….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괴로운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요란하게 장맛비가 쏟아지던 그 날, 사랑하는 제 남자의 품에 안겨있던 낯선 여자. 잊고 싶은데 도무지 잊히지 않는 그 잔인한 밤의 거리.

뒤늦게 그 여자가 언니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니였으니까, 언니라면 마땅히 그럴 거라 여겼으니까…….

오해였다는 얘길 듣고 싶었다. 그래서 당장 언니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으면서도 발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두 사람이 부적절한 관계였을지라도 아니라고 한다면 모두 믿어줄 생각이었다. 무척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 옅어질 흉터처럼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갈 바람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볼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