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에단은 웰링턴 공작의 뒤를 이어받아 재상직에 올랐다. 그동안 웰링턴 공작을 대신해 왕당파를 이끌었던 세르펜 백작은 정말 다행이라며 에단에게 임무를 건넸다. 실은 던지고 도망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문서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천생 기사였기 때문에, 그동안 꽤나 고생을 하고 있었다. 다른 왕당파의 귀족들 또한 에단의 능력과 성품을 잘 알기에 자연스럽게 그를 왕당파의 수장으로 대했다.

“제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재상으로서 빅토리아의 곁에 선 에단은 말했다.

“듀크 왕자의 의심은 당연합니다. 일면식도 없는 폐하께서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하니 당연히 의심하겠지요. 그래도 직접 만나 보겠다고 하는 거 보면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

“또한 폐하께서도 일을 실행하기 전에 그자가 어떤 자인지 직접 눈으로 파악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그렇지?”

빅토리아 역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듀크 왕자가 어떤 사람인지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건 자신이 더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렸던 건 바로 자신이 자리를 비운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에단이 대신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에단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빅토리아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페트릭 공, 조안나 페트릭에게 서신을 넣으세요.”

“예, 폐하.”

페트릭 공작이 빠르게 사라지는 걸 눈으로 좇던 빅토리아가 이번엔 마크에게 명했다.

“마크는 기사단을 통솔해야 하니까 에단과 함께 남아 있는 게 좋겠어. 테오와 루카 그리고 3기사단 몇만 추려서 데리고 가는 거로 하지.”

“그는 안 됩니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폐하.”

세르펜 백작의 말에 빅토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마크와 함께 이곳에 남아 있으세요. 제가 없는 때에 경계를 더 철저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괜찮습니다. 오히려 많아질수록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 있으니, 몇만 추려서 다녀오겠어요.”

빅토리아의 단호한 말에 모두 불만이 많았으나,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

며칠 후.

또각또각.

인적 하나 없는 고요한 산등성이에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는 정말 언제 봐도 으스스하네요.”

테오는 오랜만에 보는 네아스 산맥의 주위를 둘러보며 어깨를 떨었다. 안개가 가득한 네아스 산맥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차 없이 백마를 타고 온 빅토리아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말을 이끌고 지나가다가 순간 고개를 뒤로 꺾으며 외쳤다.

“피해!”

고개를 뒤로 꺾음과 동시에 빅토리아의 얼굴 위를 지나친 미세한 바늘이 나무에 그대로 박혔다.

고요하던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기사들은 말 위에서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컥!”

그때, 날카로운 바늘이 기사의 목을 꿰뚫었다. 목을 틀어잡은 그는 말 위에서 이리저리 휘청거리다가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뒤이어 바늘이 속속들이 기사들에게로 날아와 박혔다.

히힝!

그 바늘에 잘못 맞은 말이 거칠게 목을 털 듯 고개를 비틀다가 그대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알 수 없는 안개가 서서히 자신들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안개를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픽, 쓰러졌다.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선 테오와 루카가 빅토리아를 향해 외쳤다.

“폐하, 어서 피하십시오!”

하지만, 순식간에 발 앞까지 몰려온 안개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테오와 루카도 말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온몸이 마비되어 손가락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안개는 알 수 없는 힘으로 그들을 점령해 갔다. 결국,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빅토리아도 말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빅토리아는 마지막까지 눈을 감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시야는 점점 흐릿해져만 갔다. 그 사이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마지막 발악처럼 땅을 긁듯 손을 그러쥐며 고개를 들어 올리던 빅토리아는 그대로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꿈속에서조차 그는 나오지 않았다. 원망스럽게도. 언제는 매번 찾아와 자신을 괴롭히더니. 이젠…… 켄은 더 찾아오지 않았다. 그랬는데…….

‘공주님, 잘 잤어?’

그는 마치 매일 함께하는 사람처럼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부스스한 백금 발 머리카락도, 오묘하게 잿빛이 섞인 하늘색 눈동자도 모두 같았다. 켄이었다. 믿기지 않는 얼굴로 켄을 바라보던 빅토리아가 그만 울음을 참지 못하고 그를 끌어안았다.

‘윽! 아침부터 너무 격렬하잖아.’

빅토리아에게 깔린 켄이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빅토리아를 마주 안아 주었다.

‘왜,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

‘네가 가버렸어.’

고개를 든 빅토리아가 눈물로 얼룩진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란 그녀의 머리카락이 새하얀 켄의 볼 위로 떨어져 내렸다. 가만히 빅토리아를 올려다보던 켄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내가 어딜 가. 공주님 옆에 철석같이 붙어 있겠다고 했잖아.’

‘그래, 꿈인가 봐.’

하지만 꿈은 눈앞에 있던 켄이었다. 순식간에 모래처럼 사라진 켄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빅토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텅 빈 옆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툭.

툭.

차가운 빗물 같은 것이 계속해서 볼 위에 떨어져 내렸다. 그럴 때마다 눈가가 움찔거렸다. 아주 오랜만에 켄을 꿈에서 본 빅토리아는 자신의 꿈을 방해하는 것이 귀찮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물방울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결국 억지로 눈을 뜬 빅토리아는 순간 몰려오는 머리 통증에 고통을 호소하듯 낮게 신음을 흘렸다.

‘폐하, 어서 피하십시오!’

그러다가 순간 네아스 산맥에서의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퍼뜩 고개를 든 빅토리아는 크게 일렁이는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테오! 루카!”

불러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끼와 습한 기운으로 가득한 골방은 빅토리아뿐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방은 겨우 손바닥만 한 창만 달려 있었다. 굵은 창살 사이로 보는 하늘은 이미 저녁을 훌쩍 넘어 있었다.

게다가…….

빅토리아가 기가 막힌 얼굴로 자신의 발목을 죄고 있는 쇠사슬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바늘 같은 것들이 날아와 기사들을 꿰뚫었다. 알 수 없는 안개는 순식간에 그들의 신경을 마비시켰다. 그 이후의 기억이 없다.

분명 아무도 모르게 철저하게 준비하여 떠난 길이었다. 설마 첩자라도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듀크 왕자와 접선하기로 되어 있는 장소는 오직 세르펜 백작과, 테오, 루카, 마크, 그리고 페트릭 공작과 에단 뿐이었다. 그들 중에 첩자가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그렇다면 듀크 왕자 측에서?”

어찌 되었든 이는 분명 노출이 된 것이다. 빅토리아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때, 문 너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철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또각또각.

묘하게 울리던 구두 소리는 코앞에서 멈추었다.

“어머, 깨어났나요?”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건 붉은 핏빛의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주홍빛의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바로 앙겔스의 여왕 디케아였다. 기다란 손톱으로 빅토리아의 턱을 들어 올리며 생긋 웃던 디케아 여왕의 선홍빛 눈빛에 순간 광기가 돌았다.

쫘악!

동시에 그녀의 손이 빅토리아의 볼을 내려쳤다. 그대로 옆으로 엎어진 빅토리아의 배를 날렵한 구두 끝으로 퍽, 차버린 디케아 여왕은 생글거리던 얼굴을 집어 던져 버렸다.

“듀크 왕자에게 지원군을 보낸다고? 그런데 어쩌지? 넌 듀크 왕자에게 지원군을 보낼 수 없을 거야.”

피가 묻어나는 입술을 지그시 문 빅토리아가 두려움 하나 없는 푸른 눈으로 디케아 여왕을 돌아보았다.

“참으로 불쌍하구나.”

“……뭐?”

뜬금없는 빅토리아의 말에 디케아 여왕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아이처럼 묻는 그녀를 보며 빅토리아가 차게 일갈했다.

“한 나라의 여왕이 한낱 잡배에 불과한 짓거리를 하다니. 너 같은 여왕 밑에서 살아가는 앙겔스의 백성들이 참으로 불쌍하다 말했다.”

조금 멍청한 얼굴로 빅토리아를 바라보던 디케아 여왕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불쌍해? 불쌍하다고?”

방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씩씩거리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디케아 여왕이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곧 그녀의 눈에 구석에 처박힌 둥글고 긴 나무토막 하나가 들어왔다. 요란하게 구두 소리를 내며 구석에 박혀 있던 나무토막을 집어 든 디케아 여왕이 빅토리아에게로 다가와 사정없이 내리쳤다.

퍽퍽!

“다시 말해 봐!”

광기에 미친 그녀의 얼굴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다시 말해! 불쌍해? 어? 불쌍하냐고!”

신음 하나 내지 않고 매질을 받던 빅토리아는 결국 머리를 잘못 맞곤 고개를 뒤로 꺾으며 나가떨어졌다. 그때 터지듯 튀어 오른 붉은 피가 디케아 여왕의 새하얀 볼과 가슴에 튀었다. 나무 끝에도 어느새 피가 스며들었다.

그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켈르온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던 켈르온은 미세하게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피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폐하, 좀 자중하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자중은 무슨! 저 계집이 감히 시건방진 말을 했다고요!”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는 디케아의 모습이 익숙한 켈르온은 가볍게 그녀를 제압했다.

“고귀하신 폐하께서 이런 물건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녀가 들고 있던 나무를 빼앗아 버린 켈르온이 그것을 내던졌다. 그러곤 디케아 여왕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래요, 이런 물건은 제게 어울리지 않죠.”

켈르온의 손길에 누그러진 디케아가 아이처럼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켈르온은 피떡이 되어 혼절한 빅토리아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이리 만드시면 협상은 어찌합니까.”

“흥, 이만하면 봐준 거라고요.”

“……다시 깨어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요.”

디케아 여왕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은 켈르온이 그녀와 함께 돌아서 나가 버렸다.

***

같은 시각.

알 수 없는 곳에서 깨어난 빅토리아의 기사들은 사라진 빅토리아를 뒤늦게 깨닫곤 몸을 일으켰다.

“폐하께서 보이지 않아!”

“당장 찾아야 해!”

하지만 그들은 네아스 산맥이 아니었다. 이상한 천막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테오와 루카는 빅토리아를 찾으러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 갖고 서둘러 천막을 나섰다. 그러나 곧 멈추고 말았다.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사막과 수많은 별이 박힌 밤하늘이 그들을 맞이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깨어나셨습니까.”

그때, 흰 천으로 눈만 빼고 얼굴을 감싼 사내가 다른 이들과 함께 그들에게 다가섰다. 테오는 경계하듯 그들을 노려보며 허리에 차고 있는 검 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누구냐.”

“조안나 페트릭의 남편이자 현재 듀크 왕자를 따르고 있는 라우드 셀바도르입니다.”

“……그럼, 여긴.”

“예, 맞습니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테오를 보며 라우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듀크 왕자 전하의 본거지이죠.”

***

머리가 몽롱했다. 잘못 맞아 찢긴 것인지 인상만 찌푸려도 통증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가 인질이라는 소리군요.”

언제 앉혔는지 모르게, 어느 순간 깨어나 보니 의자에 밧줄로 칭칭 감긴 채 앉혀 있던 빅토리아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켈르온을 바라보았다. 미친개처럼 날뛰며 제게 매질을 하던 디케아 여왕은 어제와 다르게 다시 순진한 아이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 옆엔 켈르온이 함께했다. 켈르온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명석하십니다.”

디케아 여왕은 못마땅하게 빅토리아를 칭찬하는 켈르온을 노려보다가 살쾡이 같은 눈으로 빅토리아에게 말했다.

“지원군 1만. 그 이하는 절대 안 돼. 1만을 보내라는 친서를 써서 네 조무래기에게 당장 보내.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은 없어.”

정말이지 상도라고는 없었다. 빅토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굳은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다가 되물었다.

“내가 내 목숨 하나 아끼자고 친서를 쓸 것 같은가.”

“아하, 그래?”

붉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비비 꼬던 디케아 여왕이 활짝 웃었다.

“그럼 네 수하는?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프레센의 백성들은? 똑같이 생각할까? 널 국경 근처에 매달고 그들을 붙잡아 하나씩 목을 따버리면? 그래도 괜찮겠어?”

정말 궁금하다는 듯 디케아 여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보고를 받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괴물이었다. 이런 자가 왕위에 오르다니. 디케아 여왕을 왕위로 올린 켈르온의 심중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내일 아침까지 이 종이가 텅 비어 있으면. 바로 널 인질로 삼고 네가 아끼는 모든 사람의 목을 하나씩 따버릴 거야.”

“…….”

“그러니 프레센이 전부 피바다가 되기 전에 얌전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라고, 프레센의 여왕.”

한껏 기분이 좋아진 디케아 여왕이 흥얼거리며 먼저 자리를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켈르온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전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폐하를 좋게 보고 있습니다. 이리되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빅토리아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제 폐하께서 좀 아이 같은 면이 있으셔서, 조금 전 하신 말대로 할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이었다. 켈르온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빅토리아를 대한 뒤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컥!”

그들이 자리를 떠나자 참고 있던 피를 토해냈다. 울컥, 터져 나온 핏덩어리를 뱉어낸 빅토리아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어떻게 해서든 붙들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디케아 여왕은 어떠한 상식도 통하는 자가 아니었다. 아니, 상식적인 사람이었다면 한 나라의 여왕을 이렇게 납치해 인질로 삼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 프레센의 아이들을 납치하지도 않았겠지. 디케아 여왕은 사랑스러운 외모와 다르게 잔혹했다. 그녀는 정말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마 이 종이가 내일까지 비어 있게 되면,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눈앞에서 아끼는 모든 사람을 죽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