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카트리나가 몰래 제 아이에게 반지를 건넨 거 같았다. 그러고서는 시녀들을 죽였고. 그 여자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냉혹하게 얼어붙은 눈으로 종이에 그려진 반지를 내려다보던 빅토리아가 제이크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찾아라. 찾은 뒤에 만약 선왕의 핏줄인 게 드러난다면…….”

빅토리아의 푸른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숨통을 끊어 놓아야 한다.”

“……예, 공주님.”

***

“뭐?”

웃음이 가득하던 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왜 못 가는데?”

“못 가는 게 아니라 조금 늦춰야 할 거 같아.”

“그러니까 왜?”

그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웠다. 언뜻 화가 난 듯 보이는 그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빅토리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일이 생겼어.”

“그 일이 뭔데.”

“켄.”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켄의 눈빛이 일순간 가라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겠지. 그래도 켄은 애써 표정을 가라앉혔다. 조금 누그러뜨린 얼굴 뒤엔 씁쓸함이 자리 잡았다.

“모르지 않아. 당신이 내게 마음 한 자락 내어주지 않았다는 거.”

그래. 이 여잔 자신을 보지 않는다. 알고도 붙잡은 것이다. 그것도 그녀가 가장 나약해져 있을 때 말이다. 해서 불안한 것이다. 해서…… 이리도 작은 것 하나에 원망스러운 것이다. 빅토리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켄…….”

빅토리아는 미안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게 더 그의 가슴을 조여 왔다.

“그렇게 보지 마. 그게 더 아프다고.”

씁쓸하게 웃던 켄이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나약한 그의 모습에 빅토리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무수히 많은 말들이 혀끝을 맴돌았으나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뒷머리를 쓸어 줄 뿐이었다.

“널 아껴.”

그가 원하는 그 어떠한 말도 해줄 수 없었으나, 그래도 아낀다는 말은 하고 싶었다. 어느새 빅토리아의 가느다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던 켄이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게 더 아프다니까.”

“안 가려는 게 아니야. 반드시 떠날 거다. 너와 함께.”

“…….”

“그러니까…….”

차마 더는 말을 잇지 못한 빅토리아가 힘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켄은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그녀를 있는 힘껏 붙들었다. 하긴, 처음부터 바랄 주제가 못 되었다. 동정이든 연민이든 그게 뭐가 중요할까. 그것들로 이 사람을 붙들 수만 있다면 평생을 마음 한 자락 내주지 않아도 괜찮다.

***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테오와 루카 그리고 마크와 제이크는 평소와 달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약 카트리나의 소생이 선왕의 핏줄이 맞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한참 골몰하던 테오가 슬쩍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내내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 있던 마크가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저절로 계승권을 갖게 되겠지.”

“현재 유일하게 계승권을 갖고 계시는 분은 공주님이야. 근데 공주님은 왕위를 이을 뜻이 없으시잖아. 게다가 그 다음도 문제지.”

루카의 말에 테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큰일이군. 계획대로 폐하와 코티아 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다음 대의 왕위가 되어야 마땅한데. 엉뚱하게 그사이에 그 여자의 핏줄이 들어온다는 거 아니야?”

가만히 서 있던 제이크가 한마디 던졌다.

“문제는 체르당이야.”

철저하게 귀족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바로 체르당이었다. 현재는 빅토리아 공주에게 눌려 납작 엎드려 있지만, 카트리나의 편에 섰던 자들이었다. 만에 하나 정말 카트리나의 아이가 선왕의 핏줄인 게 맞다면 체르당은 즉시 그를 따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전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제이크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는 곧바로 검을 챙겨 허리에 찼다.

“어쨌든 그 전에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

제이크가 나가려고 하자, 테오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슬쩍 물어보았다.

“공주님께서 내린 명이 뭐야?”

비밀리에 일어나는 거의 대부분의 일은 모두 제이크와 그 밑에 있는 수하들이 처리했다. 그 때문에 같은 소속이라고 할지라도 다 알지는 못했다. 테오가 눈을 반짝이며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테오를 보던 제이크의 눈빛이 일순간 달라졌다.

“만에 하나 그자가 선왕의 핏줄인 게 확실하다면, 즉시 숨통을 끊어 놓으라고 하셨다.”

무섭게 가라앉은 제이크의 눈빛과 빅토리아의 명에 테오가 저도 모르게 양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윽. 역시 우리 공주님이야. 무섭다니까.”

“현명하신 거지.”

테오의 말에 반박하듯 덧붙인 제이크가 픽 웃음을 흘리곤 한 손을 흔들었다. 빠르게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가는 제이크를 뒤로한 테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자식도 가만 보면 무섭다니까. 그나저나.”

테오가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살폈다.

“이놈은 또 어디 간 거야? 보니까 폐하의 옆에도 없던데.”

요즘 따라 켄이 어디론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오고 난 후 빅토리아의 명에 따라 그를 감시했으나, 현재는 중단한 상태라 그가 어디를 다니는 건지 잘 알지 못했다. 훈련 시간도 곧잘 맞춰 오더니. 오늘 새벽엔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테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마크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상해.’

그날 이후 공주님도 그도 이상했다. 그래도 한때는 길을 같이 했던 웰링턴 공작의 일 이후 공주님이 달라졌다. 마치 무언가를 정리하는 듯했다.

‘설마, 아니겠지…….’

“으아, 밥이나 먹으러 가죠.”

기지개를 쭉 켜며 일어서는 테오의 말에 상념에서 벗어난 마크가 벽에 기대고 서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새로 온 요리사는 좀 나으려나. 그전에 있던 요리사가 하도 음식을 맛없게 해서 얼마나 곤욕이었는데.”

방을 벗어나 복도로 들어선 테오가 연신 팔을 움직였다. 그 옆에서 조용히 걷고 있던 마크는 이상한 느낌에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텅 빈 복도엔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멈춰서 뒤를 보고 있는 마크가 이상했는지 테오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왜요, 뭐 있습니까?”

“……아니. 착각한 것 같구나.”

“단장님도 참.”

테오가 큭큭 웃었다.

“요즘 따라 정신을 어디다 내놓고 다니는 겁니까. 안 그래도 웰링턴 공작 일로 공주님께서 많이 가라앉으셨는데, 우리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지 않겠어요?”

평소에 워낙 흠잡을 데가 없는 마크인지라 테오는 이때다 싶어 훈계했다. 마크는 그런 그를 무시하듯 스쳐 지나갔다.

“어어 같이 갑시다!”

저 멀리 앞서 걷는 마크를 향해 소리치며 테오가 달려갔다. 그들이 입구를 벗어나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까지 마크가 살피고 있던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벽 뒤에 비스듬히 기댄 채 서 있는 건 켄이었다. 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테오와 마크를 눈으로 좇았다.

‘만에 하나 그자가 선왕의 핏줄인 게 확실하다면, 즉시 숨통을 끊어 놓으라고 하셨다.’

또다시 그 여자가 빅토리아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저들의 말대로 만약 그자가 선왕의 핏줄이라면 정말 큰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차마 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그자가 완전히 깨끗하게 정리가 되기 전까지는 떠나지 못하겠지. 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입가에 자리한 미소와 다르게 그의 눈은 한없이 건조했다.

‘카트리나의 아이라…….’

***

“갑자기 궁으로 왜 불러들이나 했더니.”

키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켄을 돌아보았다. 궁에서 가장 높은 곳, 지붕 위에 걸터앉아 있는 켄은 그저 시리도록 차가운 은빛이 흘러나오는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둠과 맞물린 은빛이 간간이 그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으로 앞만 보는 그의 옆모습을 살피던 키튼이 일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놈이 도대체 누군데?”

서운함과 기쁨이 뒤섞인 채 대장이 지시한 대로 한창 위조 신분증과 재산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궁으로 오라는 그의 부름에 달려왔더니 켄이 뜬금없이 어떤 놈 하나를 찾아보라는 게 아니겠는가.

“그놈이 도대체 누군데?”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켄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은은하게 드리워지는 달빛 사이로 그의 옅은 회색 눈동자가 짙어졌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곱슬기가 있는 백금 발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시리도록 새하얀 피부와 금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듯했다.

“짜증나는 새끼?”

천상의 외모라고 말해도 납득할 정도의 아름다운 외모와 다르게 탐스러울 정도로 붉은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건 상스러운 말투였다.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켄을 보고 있던 키튼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래, 저 얼굴에 홀려 망가진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키튼이 눈을 부릅떴다.

“왜, 잠이라도 방해한 거야?”

이건 정말 괜한 말이 아니었다. 일전에도 여러 번 그의 잠을 방해했다가 반병신이 되어 나간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수하들은 매일 아침 그를 깨우러 가는 당번이 되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도망을 쳤다. 그 정도로 성격이 지랄맞은 켄이었다.

“잠이 아니라 더 한 걸 방해하고 있지.”

순간 그의 눈빛에 살기가 일었다.

“아 그, 그래? 하하.”

그의 험악한 눈빛에 뒤로 물러선 키튼이 눈치를 살살 살피며 웃음을 흘렸다.

“그,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고? 생김새는? 이름은?”

“그건 네가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당연하지 않냐는 듯 켄의 뻔뻔한 얼굴에 그만 터져 나오려는 욕을 속으로 집어삼킨 키튼이 입꼬리를 올렸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는 바들바들 떨렸다.

“그래, 내가 알아서 잘 알아봐야지.”

키튼의 말에 켄은 그저 만족스럽다는 듯 별말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말에 켄이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좀 유별나게 잘생겼다던데. 그 여자랑 쏙 빼닮았다고 하니 저기 보이는 폐궁으로 들어가 보면 그림 하나가 있을 거다. 그걸 보고 찾아.”

“뭐,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라면 금방 찾지.”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난 키튼이 인사도 없이 순식간에 지붕 위를 뛰어넘어 사라졌다.

***

“캑.”

무성한 수풀 사이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먼지가 순식간에 콧속으로 들어왔다. 저절로 기침이 나올 정도로 무지막지한 먼지 세례에 연신 콜록거리던 키튼이 품 안에 넣어 두고 있던 복면을 황급히 꺼내 들어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세상에, 뭔 놈의 먼지가 이렇게 많아?”

먼지는 고사하고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그의 머리와 어깨를 더럽히는 거미줄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복도 양옆에 나 있는 벽엔 반쯤 타버린 초상화가 일렬로 걸려 있었다. 주변국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악명 높던 여자가 아끼던 궁이라더니. 소문과 다르게 영 볼품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궁 안은 작은 것 하나까지 보석과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곳곳엔 꽤 값이 나가 보이는 장식품도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가장 안쪽 끝 방까지 오게 된 키튼은 슬쩍 주위를 살피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과 다르게 안쪽은 그래도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고급 벨벳 커튼으로 둘러싸인 침대도 멀쩡했고, 그 옆에 놓인 작은 소파도 괜찮았다. 벽지도 그렇게 많이 훼손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가 그 카트리나의 침실이란 말이지?”

흥미롭게 주변을 돌아보던 키튼의 눈에 커다란 그림 액자가 눈에 띈 건 그때였다. 벽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 안엔 감탄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매혹적인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액자 밖으로 튀어나올 듯 생생했다.

“왕이 넘어갈 만하네.”

연신 감탄사를 내뱉던 키튼이 본격적으로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머릿속에 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보면 볼수록 어디선가 본 듯했다. 낯이 많이 익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키튼이 눈을 부릅뜨고 그림을 한 번 더 살펴보았다.

“본 적이 있던가?”

흠, 아무래도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보아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한번 본 건 강제로 지우지 않는 한 절대 잊지 않는 그였다. 그러나 여인은 낯이 익으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봤지?”

***

오랜만에 꿈을 꿨다.

빅토리아는 언제나 꾸었던 것처럼 마음과 상관없이 칼날을 뽑았다. 의사를 벗어난 손은 제멋대로 움직여 남자의 심장을 찔렀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파고든 검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아무 저항 없이 검을 받아들인 남자는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으면서도 빅토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울지 마.’

붉은 핏덩어리를 토해내면서 남자는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감싸듯 느리게 움직이던 그가 슬프게 미소 지었다.

‘사랑해.’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흐릿했다. 제발 얼굴을 보여 달라고 소리를 쳤으나, 보여주지 않았다. 가슴이 뭉개질 것만 같은 고통이 스며들어 왔다. 죽기 직전이면서도 남자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