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생각보다 넓은 방 안엔 황금으로 만들어진 금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관의 주인은 카트리나의 손에 목이 베인 대신관이었다. 잠시 등불을 바닥에 내린 빅토리아가 치마 끝을 잡고 무릎 한쪽을 굽히며 대신관에 대한 예를 올렸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빅토리아가 무릎을 세우며 가까이 다가섰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여기서 나가 신의 품에 가실 수 있습니다.”

본래 신관이 죽으면 특별한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 장례를 치러야만 신께 갈 수 있다 여겼다. 그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자는 다음 대의 대신관 뿐이었다. 아버지 대신으로 여겼던 대신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라도 네프리스는 반드시 올 것이다. 관 끝자락을 가만히 쓰다듬는 빅토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반드시 올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못된 짓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해야 하고. 관에서 손을 뗀 빅토리아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

집 안으로 들어온 타샤는 노인이 내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지냈니.”

노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타샤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찻잔에서 손을 뗀 타샤가 노인을 향해 말했다.

“전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그날 공주님께 구해져 지금까지 궁에서 공주님을 모시는 일을 하고 있죠.”

“그래, 들었단다. 공주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게 왜 할아버지께서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네요.”

노인의 말을 매정하게 끊어 버린 타샤가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들었어요.”

타샤의 얼어붙은 눈동자에 노인의 주름진 눈이 흐려졌다.

“그저…… 미안했다고 말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되어서.”

모든 게 다 사라의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잘못이라며 원망했었다. 그날 마차에 실려 보낸 뒤, 모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특히나 그 안에 들어 있던 손녀딸 역시 죽어 버렸다는 소식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그동안 못 할 짓을 했던 후회 때문에.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었다. 그래서 지금에라도 말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타샤는 그저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그 말을 하려고 불렀나요?”

“얘야.”

“타샤. 타샤라고 불러 주세요, 어르신.”

“……그래, 타샤. 공주님께서 예쁜 이름을 지어 주신 모양이구나.”

“그 누구도 지어 주지 않은 제 이름을 친히 지어 주셨죠. 그러니 전 더는 그때 그 아이가 아니에요. 새로 태어났으니까요. 단지 그 말을 드리고 싶어서 온 겁니다.”

“……그래.”

노인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그런 노인의 눈이 회한의 눈물로 젖어 갔다. 타샤의 눈가 역시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타샤는 울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은 날이 없어요. 하지만, 그날 단 하루. 마차에 절 태우셨던 그날만큼은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공주님과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노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할아버지와 저와의 인연은 그때 끝이 난 겁니다. 그러니 다시는 뵐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똑똑히 전하세요. 그날 당신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던 사람은 공주님이 아니라 그 여자라고.”

“그건 나도 이미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왜 그리되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시죠.”

“……넌 안다는 말이니?”

혼란스러운 눈으로 묻는 노인을 보며 타샤가 설명해 주었다.

“신관들이 신 테라의 뜻을 왜곡해 전한 죄로 몰살당한 일로 할아버지께서 마을 사람들과 궁 앞으로 가 시위를 한 적이 있을 거예요.”

“…….”

“그 일 이후 이 마을 사람들이 마신을 섬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던 것 기억하시죠?”

기억한다. 어찌 기억하지 못할까. 신실하게 믿었던 그 신전이 불타고, 대신관님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다음 날 카트리나 왕비는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신 테라의 뜻을 왜곡해 전한 신관들을 더는 입에 올리지 말라고.

왜곡해 전했다니!

귀족들과 평민 농노 그리고 천민까지 똑같은 사람으로 대하던 신관님들이 그럴 리가 없었다.

노인은 참을 수 없었다.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수도에 사는 사람들과 수도 밖에서 사는 사람들까지 몰려왔다. 노인 역시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가 궁 앞에서 항의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마신을 믿는 악마들이라고. 흑 마법을 찬양하고 마신을 떠받든다고 말이다. 그 소문이 떠돈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주가 보낸 사람이 찾아왔던 것이었다. 노인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타샤를 쳐다보았다.

“마신을 섬기며, 신의 뜻을 왜곡하고, 흑 마법을 쓴다는 명분으로 마을 주민을 전부 몰살시키라고 한 거예요.”

“…….”

“대신관님 역시 카트리나 왕비가 죽였죠. 단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죠.”

신관이 불타고 신관들이 모두 몰살당하자,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은 더 참지 않았다. 그 안엔 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트리나는 그들이 더 커지기 전에 막고자 극단의 선택을 하기로 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띈 사람들이 바로 이 마을 사람들이었다. 빈민가 중에서도 가장 신 테라를 섬기던 마을이었다.

아, 바로 이자들을 통해 본보기를 보여주면 되겠구나.

“한 번 더 내게 반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보다 더한 짓도 서슴지 않을 거라는 경고요. 그 경고로 보여주기에 알맞은 게 이 마을 사람들이었어요. 아무런 힘도 돈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짐승보다 못한 빈민가의 사람들이니까요. 죽여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본보기로 보여주기에 딱 좋은 사람들.”

“…….”

“그게 바로 이곳의 사람들이었죠.”

“…….”

“공주님은 최선을 다해 막으려고 하셨지만, 불행하게도 카트리나 그 여자가 알고는 공주님 명인 척 마을 사람들을 죽인 거였어요.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알고, 더는 저들이 공주님을 다치게 하지 마세요. 그리하지 않으면 제가 먼저 나설 거니까요.”

타샤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노인은 타샤를 잡지 못하고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타샤가 문을 열고 나오자, 문 앞에서 바짝 귀를 붙이고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떨어졌다. 이미 처음부터 저들이 엿듣고 있던 걸 알고 있었던 타샤가 매서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더는 말도 안 되는 오해로 공주님께 해를 끼친다면 이 타샤가 용서하지 않겠어요. 특히, 너.”

타샤가 어른들 뒤에 숨어 있던 소년을 가리켰다. 그 소년은 며칠 전 빅토리아를 찌르려 했던 범인이었다. 소년 앞으로 다가선 타샤가 허리를 숙이고 눈을 맞추었다.

“넌 지금 목이 떨어져야 정상이란다.”

무시무시한 타샤의 말에 소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소년을 잠시 말없이 응시하던 타샤가 허리를 세우며 싱긋 웃었다.

“공주님께서 워낙 자비로우셔서 널 그냥 두었지만, 다시 한 번 그런 짓을 벌였다간 네 목은 내가 가져갈 거야. 잘 알아들었지?”

타샤를 큰 눈으로 올려다보던 소년이 으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 버렸다. 옛날과 달리 당당하고 품위 있는 타샤의 모습에 어느 하나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흥, 여긴 어떻게 변한 게 없어.”

그들을 한번 흘긴 타샤가 턱 끝을 세우며, 그녀를 데리러 온 마차로 향했다. 그 뒤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

“공주님, 수잔느입니다.”

“들어와.”

북부에 심어 둔 첩자의 보고가 담긴 편지를 들고 들어온 수잔느가 책상 앞에 섰다.

“북부에서 올라온 보고입니다.”

붉은색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열고 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쟈이크 공작은 현재까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국경 지역의 치안에 힘쓰고 있습니다. 누구와도 만난 흔적 또한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떤 여인과 밀회를 즐기고 있으신 건지, 매일 밤 한 여인이 성을 들어갔다가 새벽 즘에 나오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알아보니, 몰락한 귀족 가문의 여식으로 별다른 특이점은…….]

쟈이크 숙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보냈던 첩자의 보고에는 별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첩자의 보고대로라면 이번 일엔 숙부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더 아파 왔다. 온통 안개에 휩싸인 길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빅토리아가 굳은 얼굴로 종이를 내려놓았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수잔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빅토리아의 얼굴을 살피고 있는데,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제이크 경께서 들었습니다.”

“수잔느, 수고했다.”

이만 자리를 피해 달라는 빅토리아의 눈짓에 예를 갖춘 수잔느가 문을 열고 밖을 나섰다. 뒤이어 제이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제이크 역시 페트릭 공작과 앙겔스로 시집간 그의 여식에 대한 보고를 올리기 위해 들어왔다.

“그렇다면 현재 틀어진 상황이란 말이냐.”

빅토리아의 말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앙겔스를 장악한 사람이 여왕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페트릭 양과 결혼한 사위가 듀크 왕자 쪽의 편에 섰답니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나. 페트릭 공작은 여왕 쪽에 서지 않고, 힘없는 왕자의 편에 선 사위에게 몹시 분노했겠지.”

“그로 인해 페트릭 양 쪽에서 먼저 연을 끊겠다고 하곤 편지도 연락도 전부 받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딸이 연을 끊겠다고 나서니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꼬장꼬장하던 페트릭 공작을 떠올린 제이크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로써 체르당 쪽은 아닌 거로 판명이 났네요. 솔직히 말해 체르당 쪽이 이번 일에 나섰을 경우는 거의 희박하다고 여겨집니다. 폐하를 암살한다고 그들이 이득을 볼 건 전혀 없잖아요? 현재 프레센에서 계승권을 갖고 있으신 분은 폐하를 제외하고 공주님과 쟈이크 공작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쟈이크 공작님과 페트릭 공작님 사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유명할 정도로 안 좋은 사이였다. 카트리나 시절 제대로 틀어진 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다.

“폐하를 죽여 봤자, 내세울 왕도 없는데 그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암살 시도를 할 리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빅토리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카트리나를 도와 그녀의 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체르당은 현재 위축된 상황이었다. 그런 시점에 암살 시도라. 명분도 이익도 없는 시도였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암살 시도를 하는 범인은 누구일까…….

***

시간이 흐르는 만큼 소문은 더해졌다. 샤를 왕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들로 주변이 뒤숭숭했다. 게다가 얼마 전 신전 재건 사업 현장을 찾다가 소년의 칼에 찔릴 뻔한 공주에 대한 이야기로도 시끄러웠다. 뒤늦게 알게 된 샤를이 처음으로 크게 화를 내며 진땀을 빼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빠르게 퍼져 나간 괘서들로 인해 왕실에 대한 불신이 더 커져 버리고 말았다. 왕당파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샤를 왕에 대한 불신을 토해내며 대관식을 미루고 빅토리아의 지속적인 섭정을 요구했다.

“공주님, 왜 그렇게 가만히 계십니까? 소문을 퍼트리는 놈들을 중죄로 다스린다든가, 귀족들의 입을 틀어막을 다른 묘수를 생각한다든가,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테오는 참다못해 가슴팍을 내리치며 소리를 높였다. 이 상황에 느긋하게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며 책을 읽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 나무 밑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빅토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가린다.”

손을 올린 빅토리아가 테오를 향해 손짓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테오가 인상을 썼다.

“뭘 말입니까.”

“햇빛 가린단 말이다. 비켜서라.”

지금 그 햇빛 따위가 중요한가!

“공주님!”

빅토리아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책에서 눈을 뗀 빅토리아가 테오를 올려다보았다.

“그 입 좀 조용히 해라. 오랜만의 여유를 네가 망칠 셈이냐.”

“공주님, 지금 한가롭게 책을 읽으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시끄럽다.”

“그냥 포기하신 겁니까!”

“포기한 게 아니다. 그냥 두는 거지.”

“그게 그 말 아닙니까!”

“공주님!”

멀리서 타샤가 뛰어오고 있었다. 양쪽으로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빅토리아의 코앞까지 헐레벌떡 뛰어온 타샤가 잠시 숨을 골랐다.

“서신이 왔어요, 공주님.”

책을 덮은 빅토리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누구에게서 온 서신이더냐.”

“바야 남작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공주님.”

간신히 숨을 고른 타샤가 품 안에 끼고 있던 편지를 꺼내었다. 바야의 인장이 찍힌 실링을 뜯은 빅토리아가 봉투 안에서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바야라면, 그 바야 남작?”

평민이었으나, 여러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상업을 발전시킨 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은 자였다. 테오가 빅토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편지지를 펼친 빅토리아는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빅토리아 레테오스 공주님께.

케넬에서의 오랜 타지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음을 알려 드리기 위해 편지를 전합니다. 공주님께서는 무탈하게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공주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진귀한 책을 케넬로부터 갖고 왔답니다. 괜찮으시다면 공주님께 티타임을 청합니다.

바야 올림.]

“나갈 채비를 해야겠다.”

편지를 접은 빅토리아가 걸음을 옮겼다.

“제가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공주님!”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 난 타샤가 방방 뛰며 손을 올렸다.

“공주님께서 나가시는데 호위 기사로서 당연히 저도 가야지요.”

바야는 타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오고 있었다. 프레센에선 볼 수 없는 물건들을 사들이는데 취미가 붙은 테오는 벌써 눈을 빛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잘 아는 빅토리아는 그만 웃고 말았다.

***

수도에서 가장 북적거리고 있는 곳은 상단이 늘어져 있는 거리였다. 양옆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은 대부분이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이 바야 남작의 사무실이었다. 상단들과 연합해 조합을 만든 바야 남작의 지혜로, 프레센은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바야 남작의 도움으로 카트리나로 인해 무너졌던 프레센의 재정 상황이 좋아진 것도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바야 남작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고 여겨졌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조합원을 꾸리라고 지시한 사람은 바로 빅토리아였다. 카트리나 섭정 시절, 귀족들과 거래하는 상단에 밀려 망해 가던 바야를 찾아왔던 빅토리아는 그와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