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JUST THE WAY YOU ARE

막상 그의 입에서 그만하자는 그 잔인한 말이 나오자 덜컥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정말 그만두려는 것인가? 정녕 이 모든 것을 놓아 버리려는 것인가?

라이언의 헤이즐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에이미, 난 죽은 내 약혼녀 재키를 미치도록 그리워하고 충분히 아파했어.”

“알아. 안다고!”

“하지만, 3년이면… 그 정도 했으면, 이젠 족하잖아.”

“라이….”

“더 이상 후회나 남은 미련 따윈 없어. 그러니까 그만해. 이런 바보 같은 질투나 오해들은 제발 그만하자.”

라이언에게 있어 재키는 결코 지워낼 수도 도려낼 수도 없는 깊은 흉터 자국 같은 존재였다. 사랑을 몰랐던 어린 나이에 찾아온 세상의 전부였던 사람. 고집스러운 어린 마음을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나게 도와준, 때론 엄마였고 때론 누이였고 때론 연인이었던 사람. 때문에 라이언은 그 지독한 열병을 잠재우기 위해, 3년 동안 폭풍같이 몰아쳤던 미친 사랑의 끝에 또 그만큼의 시간을 침묵해야 했다.

심하게 앓고 난 뒤, 아이의 경계심과 면역 체계는 더욱 견고해졌다. 이미 면역력이 생겨 버린 아이는 다시는 똑같은 이유로 아프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는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담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가, 지금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었다.

“You are my Amy! 넌 그냥 나의 에이미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 까만 눈동자도 하얀 웃음도, 손을 꼭 잡아 주고 싶은 그 걸음걸이도, 전부 다 너야.”

진짜 사랑을 하고 있었다. 온 마음을 다해.

라이언은 에이미의 팔을 당겨 그녀를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

“그러니 제발 남들이 뭐라 하건, 듣지도 말고 믿지도 마. 오직 나한테만 집중하면 돼. 내가 너한테 그러하듯이.”

품에 안긴 에이미의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의 가슴께가 뜨거운 눈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게도 원하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쉬이 문을 열지 못했다. 이중 삼중으로 굳게 빗장이 걸린 문은 또 다른 암호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이언… 그런데 난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

울음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몹시 심하게 떨리고 있다.

“문제라니? 우리 사이에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어.”

“우린… 가족이잖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우리 둘이 도망쳐 섬에서만 갇혀 살 순 없어. 꼴이 더 우스워지기 전에 여기까지만 하자… 그렇게 하자.”

“에이미!”

“넌 어떨지 모르겠는데, 난 이런 거 싫어.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자신이 없어… 무서워.”

“에이미 제발!”

“난 아니야. 나 너같이 속 편한 몽상가가 아니야.”

쿵!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이언은 에이미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놀란 에이미는 뒤통수를 알싸하게 만드는 고통보다는 예기치 못한 반격에 대한 충격이 더 컸다. 강한 힘으로 에이미를 바닥에 쓰러트린 라이언의 양손이 에이미의 가느다란 팔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아니야….”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강렬한 그의 눈빛이 에이미의 놀란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뭐가 아니라는 거야. 이거 놔. 이거 놓고 말해.”

발악해 보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힘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라이언! 이거 놓.”

“넌 내 사촌이 아니라고!”

“뭐?”

“그러지 말았어야 해. 메이슨이 면피하기 위해 만든 거짓말에 동의하지 말았어야 해.”

“사촌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그땐 몰랐어. 네가 널 이토록 원하고 또 원하게 될 줄은. 그 거짓말이 너를 곁에 둘 수 있었던 이유이자, 또 너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이유가 될지는….”

순간 에이미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몽둥이로 뇌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큰 충격! 그와 함께 모든 시간과 공간이 블랙홀처럼 하나의 검은 점으로 수축해 들어갔다. 모든 장면들이 어둠 속으로 왜곡되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짙은 어둠 속에서 다시 빛을 토해냈다. 온갖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억눌렀던 감정이 소행성처럼 폭발했다.

에이미를 보는 라이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그 눈동자만큼이나 떨리는 그의 목소리.

“미치겠어.”

“라이언….”

“숨김없이 내 마음을 보여주는데, 그걸 알면서도 못 본 척하는 너 때문에 미칠 것 같다고!”

그 말을 들은 에이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지레 겁먹고 비겁하게 도망쳤던 그 치졸한 모습은 더 이상 안 된다. 이제 감춰 두었던 모든 걸 뱉어내야만 한다. 바로 지금이다!

“…미안해. 모른 척해서 미안해.”

“에이미….”

“심술부리고 화내서 미안해. 다 알면서도 못 본 척해서… 미안해.”

울먹이고 있었다. 숨겨왔던 진심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음을 숨기고 싶어서 그랬어. 모두가 그래야만 한다고 해서 그랬어. 그게 널 위한 거라고 그랬어. 그래서… 그랬어. 미안해.”

그 말과 함께 에이미의 하얀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역시나 라이언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에이미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할 리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타일러의 방문과 절묘한 타이밍에 걸려온 메이슨의 전화. 그리고 굳이 별장에서 멀리 떨어진 본가로 호출한 아버지. 그들은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에이미의 멘탈을 뒤흔들 충분한 작전 시간이.

라이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아올랐다.

‘당신들 모두…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는 에이미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바닥에 누운 그녀의 목을 당겨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진작 사실을 말해 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말할 수 없었어.”

“왜… 그랬어?”

“난 그게 널 내 옆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유일한 핑계라고 생각했어. 비겁하게. 진심으로 먼저 다가갔어야 했는데, 강제로라도 옆에 두고 싶은 마음에 그만….”

에이미는 고마웠다. 한결같이 나를 향해 있는 그의 그 대단한 고집이. 항상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그의 우직함이.

‘지금이라도 말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렇게라도 날 잡아 줘서.’

라이언은 기뻤다.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니었음에. 어느 순간 너도 나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음에.

에이미의 귓가를 울리는 그의 목소리.

“I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는 거야.”

라이언의 커다란 손바닥이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에이미의 등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닿는 자리마다 전기에 감전된 듯 아찔하게 반응하는 에이미의 뽀얀 피부. 그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부서질 듯 강하게 끌어안았다.

“라이언….”

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그의 애정 표현에 에이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귀를 간지럽히는 낮은 종소리와 함께 라이언의 입술이 그녀의 귓바퀴에 와 닿았다. 뜨거운 입김이 뺨을 스쳤다.

“라….”

그리고 그녀의 입을 막았다.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숨결이 입속으로 불어 닥쳤다. 초콜릿 공장에서 방금 녹여낸 달큼한 설탕 덩어리가 입술 끝에서 묻어났다.

‘맙소사!’

미친 듯이 펌프질하는 에이미의 심장. 그리고 마친 제2의 심장이 달린 듯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 온몸을 둥둥 울리는 그 요란한 소리가 그의 귀에도 들릴까 봐 조마조마한 그때,

“서두르지 않을게. 천천히 다가와도 서운해하지 않을게. 다만, 돌아서 가지만 말아 줘.”

라이언은 천천히 에이미를 일으켜 세웠다. 서두르지 않았다.

‘아….’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에이미의 얼굴. 주책맞게도 그 순간, 그의 절제된 매너가 조금 아쉬웠다.

​

***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서쪽 하늘에서도 동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노랫소리.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부디 몸조심, 차 조심, 사람 조심해.”

“아이고 우리 김옥순 여사. 걱정 말아요. 잘 다녀올 테니.”

엄마는 대문을 나서는 딸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다.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글썽이는 엄마를 간신히 떼어내며,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재빨리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약속 시간에 맞춰 큰길가에 도착해 있던 택시를 보자 딸은 망설임 없이 차에 오른다.

“부디 몸 조심, 차 조심, 사람 조….”

막 출발하는 택시 차창 밖으로 엄마의 당부가 이어지지만, 무심한 딸은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그 소리를 짐짓 못 들은 척한다. 잠시 후, 저 멀리 택시 뒤꽁무니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이 작은 점이 되어 간다.

딸은 방금 전 매정하게 엄마의 손을 뿌리쳤던 자신의 손을 들여다본다. 손끝에서 비릿한 생선 냄새가 올라온다. 하루 종일 생선을 만지는 엄마의 손에서 옮겨온 냄새이다.

지겹다. 이 냄새….

그리고 문득, 그리워진다.

***

​

“에이미.”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

“에이미.”

또 한 번 부드럽게 귓가를 울리는 그 소리에 에이미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이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왜 시선이 옆으로 되어 있는 걸까? 옆으로 누운 나의 시선이 왜 마찬가지로 옆으로 누워 있는 너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걸까? 라는 생각도 잠시, 날렵한 턱 선 아래로 보이는 관능적인 쇄골에 눈이 번쩍 떠졌다.

“으악!”

에이미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알을 360도로 재빠르게 돌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에이미는 위아래 옷을 너무 단단히 챙겨 입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라이언은 웃통을 홀랑 벗어젖힌 채 맨몸으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에이미는 즉시 이불을 들춰 아래쪽을 확인해 보았다. 이분 역시 바지를 아주 잘 챙겨 입고 있었다. 에이미는 놀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며, 마치 다비드 조각상처럼 옆에 비스듬히 누워 계신 라이언 님께 정중히 물었다.

“실례지만,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어떻게 되긴? 간밤에 네가 너무 서럽게 울어서 내가 꼭 안아 줬잖아.”

라이언은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내… 내가요?”

“응. 니가요. 잠이 안 온다 그래서 내가 자장가도 불러 줬는데… 그러다 넌 금방 곯아떨어져 버렸고. 혼자 놔두기 좀 그래서 그냥 여기 있었어.”

지난밤, 라이언과의 격정적인 대화 끝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다 지친 그녀는 라이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고, 그는 그대로 아침까지 그녀를 포근히 안아 주었던 것이다.

“내가? 내가 진짜 그랬다고?”

“응. 그렇게 쉽게 빨리 잠들 줄이야. 너 나에 대해서 너무 긴장감이 없는 거 아니야?”

“뭐?”

“난 네 손만 잡아도 오감이 미쳐 날뛰는데.”

“맙소사.”

“덕분에 밤새 참느라 힘들었어.”

순간 에이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거 까딱하다간 밤새 일을 치를 뻔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라이언의 탈지구급 자제력과 쓸데없이 잘 배운 매너 덕분에 마주 누운 하룻밤을 아무 일 없이 넘겼다.

“근데 넌 왜 웃통을 벗고… 사람 놀라게.”

“나? 나 원래 더위를 많이 타서 잘 때 속옷 한 장 입고 자는데?”

열이 많은 정열적인 마이애미 남자 라이언은 에이미가 놀라 자지러질 걸 걱정해 일부러 바지까지 꾸역꾸역 챙겨 입고 잤던 것이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말이지요…. 라이언은 에이미의 애매모호한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마. 비록 키스는 내 맘대로 했지만, 그 이상은 꼭 너의 동의를 구할 테니.”

너무 야해 미칠 것 같았다. 이 시점에서 코피가 터진다면 최소 과다 출혈이었다.

“그래도 아무튼 좋았어.”

라이언은 에이미의 턱을 당겨 그녀의 볼에 쪽하고 입 맞췄다. 에이미의 눈곱 낀 꾀죄죄한 얼굴과 하늘로 솟구친 아침형 앵무새 헤어스타일을 보고도 그런 리액션이 나오는 걸 보니, 이거 이거 영락없이… 사랑에 미친놈.

“그런데 에이미.”

“응. 왜?”

“어젯밤에… 내가 꼭 안아 줬는데, 네 표정이 조금 슬퍼 보였어.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에이미는 그제야 간밤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나… 엄마 꿈을 꾸었어.”

“엄마? 한국에 있는?”

“응. 내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대문 밖에서 나를 배웅해 주던 우리 엄마.”

“엄마 얼굴이… 떠오른 거야?”

“응. 이제… 또렷이 기억나. 엄마 얼굴도. 내가 살던 집도. 내가 미국으로 오던 날 입었던 옷도.”

에이미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조금씩 기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라이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대체…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

수업 중,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성태의 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그는 황급히 음 소거 버튼을 누르며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걸려온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접니다. 메이슨. 기억하시죠?

“물론입니다. 다래는 잘 지내고 있나요? 언제쯤 다래를 볼 수 있는 거죠?”

- 아 네 그동안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전 당신 말만 믿고 여태껏 가만히 기다기만 했습니다. 제가 알기론 현재 다래가 소지하고 있는 비자가 맥시멈 3개월짜리 ESTA 비자입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요.”

성태의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맞습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불법 체류자가 될 수도 있단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다래 양을 한국으로 돌려보낼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기억이 돌아오길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다래의 신분이 확실해진 지금 상황에선, 하루라도 빨리 본인에게 사실을 인지시키고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게 맞았다.

“그런데 그 라이언이라는 남자는 어떻게 하실 거죠?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다래를 안 놔주려고 한다면….”

- 걱정 마십시오. 그건 저희 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테니.

“알겠어요. 그래서 다래는 지금 어디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