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데자뷔

“에이미! 에이미!”

타일러는 아침부터 미친 듯이 에이미의 방문을 두드렸다. 에이미는 모닝 살인 충동을 억누르며 간신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타일러.”

타일러는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오는 에이미에게 다짜고짜 무언가를 들이댔다.

“에이미, 이거 봐봐. 내가 배스킷볼 티켓 샀어. 오늘 저녁에 이거 보러 갈 거야.”

“바스켓… 아, 농구?”

타일러가 들이민 핸드폰 화면에 티켓팅 QR 코드가 보였다.

“응응. 재밌겠지? 재밌겠지?”

“아… 그렇겠네. 하하.”

애써 웃음 짓고 있지만 입꼬리가 부르르 떨려 왔다. 아침부터 방문을 부서져라 두드린 이유가 고작 이 농구 티켓 때문이라니. 그것도 저녁 7시에나 시작하는 경기를! 분노를 누르며 문득 시계를 보니 정확히 오전 7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의 최애 캐릭터만 아니었어도, 넌 바로 모닝 사망각인데.’

에이미는 이른 아침부터 텐션이 한껏 고조되어 있는 타일러를 보며 억지로 착한 엄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티켓팅 코드가 달랑 두 개뿐이었다. 혹시?

“너 거랑 내 거만 샀어. 라이언은 안 데려갈 거야.”

“나이스! 타일러 아주 나이스!”

에이미는 저도 모르게 쌍엄지를 치켜들었다.

​

그러나 에이미의 찐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점심에 뭘 그렇게 야무지게 처드신 것인지 갑자기 배탈이 난 타일러는 지사제를 두 개나 때려먹었는데도 병세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똥기저귀를 차고앉아서 경기를 봐야 할 판이었다.

어느덧 시계는 5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마이애미 다운타운 한가운데 위치한 경기장 주변의 엄청난 교통 체증과 주차 대란을 생각한다면 지금 출발해야만 했다.

“에이미… 난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안 돼! 타일러.”

“아니야. 난 이미 글렀어. 나 버리고 너 먼저 가렴….”

“타… 타일러. 안 돼애….”

타일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거실 소파에 반쯤 누운 채 에이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마치 피난길에서 정든 님을 떠나보내기라도 하듯 에이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아 진짜 놀구들 있네. 그만하고 빨랑 나와!”

현관 입구에 선 라이언이 짜증을 냈다.

환불이나 재판매를 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고, 아침부터 꼭 데려가겠노라고 잔뜩 설레발을 쳐놓은 타일러는 궁여지책으로 본인 대신 라이언을 보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혹시나 타일러의 상태가 호전될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감을 안고 있던 에이미는, 역시나 하는 실망감을 가득 안은 채 라이언을 따라나섰다.

삐빅!

버튼을 누르자 타일러의 집 마당 한쪽에 세워 두었던 차의 헤드라이트가 팟하고 켜졌다. 순간 강렬한 하이빔 불빛에 눈이 부신 에이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앞을 가렸다. 그리고,

쿵!

“아앗…!”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익숙함과 공포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에이미는 순간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단순히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봤을 뿐인데 왜 그렇게 놀란 건지….

“에이미! 너 괜찮아?”

라이언은 재빨리 손을 뻗어 휘청거리는 에이미의 팔을 잡아 주었고, 그의 놀라운 반사 신경 덕에 다행히 추잡한 엉덩방아는 면했다.

“아, 고마워.”

“정말 괜찮아?”

“아, 응. 괜찮아. 괜찮아.”

라이언은 어울리지 않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멀쩡한 듯 잘 지내다가도 가끔씩 라이언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에이미. 라이언은 행여나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 때문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못 보던 차네? 타일러한테 빌렸어?”

“아니, 내 거야. 수리가 끝나서 찾아온 거야.”

오래전 그날 밤, 에이미를 들이받았던 바로 그 문제의 차량이었다. 에이미를 치면서 헤드라이트를 싸고 있던 커버가 부서져 나갔고, 프런트 펜스 부분에도 살짝 스크래치가 났던 것이다. 하지만 사고와 동시에 모든 기억이 날아가 버린 에이미는 그 차를 알아보지 못했다.

딱 봐도 그냥 나 비싸요 하는 그런 고급 스포츠 세단. 에이미는 시선이 무심코 차 보닛 앞부분에 붙은 갈기를 휘날리며 앞발을 한껏 치켜든 말 문양 엠블럼으로 향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차를 몰아 본 적도 타본 적도 없는 에이미는 그 특이한 문양에서 뭔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거참 이상하네….’

왜 이런 익숙함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몸과 무의식이 그날의 끔찍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나 자연스러운 매너가 몸에 밴 라이언은 에이미가 탈 수 있게 먼저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혹시라도 낮은 차체에 머리가 부딪히지 않게 문 위쪽에 손을 대주었다.

‘얼굴, 몸매, 매너 다 좋은데… 하, 성질이….’

에이미는 안타까움을 가득 안고 차에 올랐고, 라이언은 익숙하게 차를 몰아 타일러의 집 마당을 빠져나갔다. 차에 탄 건지 바닥에 누운 건지 모를 이 엉뚱한 승차감. 스포츠 세단은 원래 이렇게 누워 타는 거구나 싶었다.

​

엄청난 교통체증을 뚫고 무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이곳, 탁 트인 마이애미 바닷가 옆에 자리 잡은 American Airline Arena 센터였다. 흡사 로마 콜로세움 경기장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원통형의 건물 입구는 역시나 경기를 보러 온 수많은 관중들로 몹시 붐볐다.

주차를 마치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들어간 경기장 내부는 더 가관이었다.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그곳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함성과 고막을 찢을 듯 울려대는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로 평소에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에이미조차도 몹시 흥분하게 만들었다.

좌석표를 보며 밑으로 밑으로 계속 내려가던 라이언은 이내 농구 코트와 선수들이 바로 지척에 보이는 매우 가까운 자리에서 탁 멈춰 섰다.

“하, 타일러 자식. 돈 좀 썼네.”

“왜? 여기 비싼 자리야?”

“한 자리당 1,200달러짜리야.”

“뭐어어!”

에이미는 자리에 앉다 말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두 장을 예약했으니, 수수료에 세금까지 합치면 한화로 족히 300만 원은 썼다는 얘기다.

달랑 두 시간짜리 경기 하나 보는데 그 돈을 쓰다니! 아무리 돈을 처바르고 태어난 놈이라지만 그의 지리는 라이프 스케일에 다시 한 번 리스펙!

“혹시 그거 환불되니?”

“미쳤냐? 앉아.”

라이언은 에이미의 어깨를 찍어 눌러 앉혔다.

“그나마 레귤러 시즌 중이니까 이 가격인 거야, 플레이오프 후반에 오면 이 가격에 다섯 배 얹어 줘도 못 앉아.”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엄청 비싼 자리라는 거였다.

‘타일러가 날 위해 돈지랄한 이 귀중한 시간을 라이언과 낭비해야 되다니. 하….’

타일러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라이언은 에이미를 자리에 앉힌 뒤,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곧 점보 사이즈 맥주 두 캔을 사들고 나타났다. 그사이 오프닝 이벤트와 워밍업 타임이 끝나고, 거인족으로 예상되는 어마어마한 체구의 미국 NBA 선수들이 코트 위로 들어섰다. 에이미는 그들의 반짝이는 검은 피부와 큰 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왁! 대박. 사람이야? 간달프야?”

“야야, 사람을 보지 말고 경기를 보라고.”

“아, 보고 있다고!”

마이애미 특유의 정열적인 붉은색이 돋보이는 유니폼을 입은 마이애미 히트 농구 팀은 경기 시작 음과 함께 야생마처럼 코트 위를 질주해 나가기 시작했다. 농구에 대해서 개뿔 모르는 에이미였지만, 그 엄청난 스피드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화려한 스킬에 저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기 보랴 라이언과 티격태격하랴 정신없는 와중에 1쿼터가 순식간에 지나가고, 경기장에서는 막간을 이용해 관중들을 대상으로 이벤트를 벌였다.

“키스 타임!”

“와아아아아!”

장내 아나운서의 노련한 멘트와 함께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져 나왔고, 그 외침과 함께 카메라가 쉴 새 없이 관중들 사이를 훑어나갔다. 경기장 중앙 천장에 달린 대형 스크린에 기대감에 가득 찬 관중들의 얼굴이 연이어 비췄고, 카메라가 그중 나이 든 노인 커플 하나를 집어냈다.

“그랜마, 그랜파 진정한 으른의 키스를 보여주세요!”

아나운서의 입담에 관중석에서 미친 듯이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귀여운 노인 커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름 가득한 손으로 각자의 흰머리를 부여잡고 주름진 입술에 쭉 하고 입 맞췄다.

“어메이징! 이것이 바로 TRUE LOVE!”

재치 있는 멘트가 이어지고 카메라는 다음 희생양을 위해 열심히 화면을 돌렸다. 그리고, 역시나 우리의 에이미를 놓치지 않는 센스 있는 카메라맨은 맥주를 홀짝이고 있는 에이미와 라이언을 정확히 비췄다.

“자 이제 젊은이의 패기를 보여줄 차례! 키스 후 앞니가 뽑히지 않았다면 그건 FAKE LOVE!”

대형 스크린에 대문짝만하게 띄워진 라이언과 에이미의 얼굴. 둘 다 몹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라이언은 즉시 양팔로 엑스를 그어 연인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짓궂은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연인!”

그 멘트를 들은 관중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몹시 곤란해진 상황에 카메라맨은 여전히 라이언과 에이미의 당황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당장 뭐라도 해야 화면이 넘어갈 듯싶었다.

라이언은 즉시 에이미의 머리를 붙잡고 그녀의 이마에 쪽하고 급 뽀뽀를 날렸다.

“뭐… 뭐야 너. 딸꾹!”

에이미는 갑작스러운 그의 이마 키스에 놀라 딸꾹질을 해댔고, 실시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본 관중석에서 미친 듯이 야유가 쏟아졌다.

“우우우우우우우우.”

“헤이! 영맨. 그딴 식으로 대충 할 거면 집에 가.”

그 말을 들은 라이언은 몹시 곤란하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볼거리를 찾아낸 카메라맨과 아나운서는 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관중들 역시 귀여운 젊은 커플의 다음 행보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황스러움에 여전히 딸꾹질을 해대고 있던 에이미는 이대로 있다간 뭔 험할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런데 막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라이언은 결심이 선 듯 손을 뻗어 에이미의 한쪽 얼굴을 감쌌다.

‘아니 이런 미친 새….’

그리고 그녀에게 키스했다.

“와우! 이게 바로 CRAZY LOVE!”

아나운서의 환호 소리와 함께 경기 재개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그리고 에이미의 딸꾹질이 멈췄다.

​

텅! 텅! 텅!

귓가를 강타하는 농구공 바운스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선수들은 반질반질한 코트 위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멋진 장면들을 쏟아냈지만, 마네킹처럼 딱딱하게 굳어 앞만 보고 있는 에이미의 눈에는 그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전 그 민망한 상황이 지나간 후, 그녀는 도저히 라이언 쪽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에이미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듯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화… 화장실 좀.”

그녀는 구태의연한 멘트를 날리며 후다닥 일어서 나갔다.

화장실로 뛰어간 에이미는 즉시 찬물에 벅벅 세수를 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얼굴이 주접스럽게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친 새끼… 왜 입술 옆에다 키스하고 지랄이야!’

속으로 라이언을 욕했다. 그 와중에 카메라와 사람들의 집요한 시선을 교묘히 피해 자신의 손으로 에이미의 얼굴을 감싼 라이언은 제대로 앵글이 나오지 않는 그 상황에서 그녀의 입술 바로 옆쪽에 짧게 키스를 한 것이었다.

에이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을 만져 보았다. 당황스러움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머릿속에 뒤엉켜 가고 있었다.

‘내가 미친년이지. 빨리 도망쳤어야 하는 건데… 에휴.’

그녀의 양심과 도덕성이 마음속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잠시 후, 화장실을 빠져나온 에이미는 갑자기 복도로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기겁하고 말았다. 그사이 하프 타임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물밀 듯이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에이미는 사람들이 더 몰리기 전에 빨리 자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운도 지지리도 없지. 그녀는 정신없는 와중에 오고 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걷다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꼬꾸라지는 대형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엄마얏!”

본능적으로 엄마란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자신의 앞에 서 있던 남자의 등짝에 얼굴을 호되게 박았다.

“으악!”

졸지에 등 스매싱을 당한 남자는 난데없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게감에 잠시 휘청거렸지만, 이내 균형을 잡고 탁 버티고 섰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다봄과 동시에 다짜고짜 자신의 재킷을 붙잡고 늘어졌던 에이미를 그대로 품에 안아 버렸다.

“어엇!”

또다시 놀란 남자의 비명이 이어졌고, 예고 없이 날아든 에이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그는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쿵! 보기 좋게 뒤엉켜 바닥으로 쓰러진 두 남녀.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그들에게 다가왔다.

“Are you guys okay?” (“당신들 괜찮아요?”)

놀란 에이미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신의 밑에 대자로 나자빠진 남자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앗! 죄… 죄송합니다.”

“I’m okay… 아, 한국 분이세요?”

“네?”

에이미는 그제야 몹시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한국어를 뱉어냈음을 인지했다. 다짜고짜 한국말부터 튀어나왔음에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또 한국말을 알아듣는 사람 위로 자빠졌을까? 참으로 황당하고 우스운 일이었다.

남자는 즉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고, 그 둘이 안전한 것을 확인한 주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갔다. 에이미는 다시금 남자의 상태를 물어 왔다.

“아,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뭐 그럴 수도 있죠, 뭐.”

“진짜 진짜 죄송해요.”

“하하. 안 다쳤으면 됐죠, 뭐.”

남자는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에이미를 향해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시원하게 웃던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하며, 그의 미간이 드라마틱하게 좁혀 들어갔다. 그리고 에이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

“너 혹시… 키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