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알코올”

어두운 밤, 현란한 빛과 음악들로 둘러싸인 강남의 길거리. 한 시끌벅적한 술집 안에서 모두들 음악과 술에 취해있다. 화려한 조명들이 여기저기를 비추지만 그 넓은 곳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외모로 모두가 힐끗힐끗 관심을 보이는 여자가 있다. 보결이었다. 하얀 반팔 티에 청바지를 입은 게 전부였지만, 한껏 꾸민 여자들에겐 눈길이 갈 새가 없었다. 독보적이었다.

‘3개월 만에 얻은 휴가가 이렇게 날아가는구나.’

지루한 듯 턱을 괸 보결이 앞에 놓인 빈 소주잔을 보며 멍을 때렸다.

“야! 구보결! 내 말 듣고 있어?!”

“어? 아… 남친이 기념일을 까먹어서 어떻게 했다고?”

“야! 너 하나도 안 들었네! 아우, 하긴, 구보결한테 뭘 바라니.”

영은이 짜증을 내며 남아있던 소주 반잔을 비워냈다.

“미안. 알잖아. 나 어제도 야근했어.”

보결이 아차 싶어 얼른 영은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너 그렇게 맨날 일만하면 남는 거 하나도 없어! 아니, 너희 부모님은 널 그렇게 아끼시면서 네가 그러고 일하는 건 안쓰럽지도 않으신가봐.”

“…그냥, 내가 하는 거야.”

찰나였지만 영은의 소주잔에 비친 보결의 눈이 쓸쓸해 보였다.

“야. 근데 역시, 구보결 넌 무슨! 맨날 야근에 시달리는 애가 뭔 피부가 이렇게 좋니! 다크서클 하나가 없어! 어우, 역시 구재수! 별명 너무 잘 지었지 내가!”

영은은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의 이야기만 쉴 새 없이 이어갔다. 이에 익숙한 듯, 보결은 가끔씩 고개만 끄덕이며 소주잔을 천천히 비워나갔다. 그렇게 영은의 목소리를 안주 삼아 소주를 한 병정도 비워냈을 즈음, 영은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알겠지? 오늘만 내 비위 좀 맞춰주는 거다!”

“뭐? 뭘 맞춰?”

의미 없이 주억거리던 고개가 흠칫 멈췄고, 이제야 영은의 말이 들린 보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내 비위! 나 오늘 진짜 Good face랑 놀고 싶어. 그래야 그 새끼 생각이 안 날 것 같단 말이야.”

“하….”

보결이 깊은 한숨을 쉬더니, 손에서 때지 않던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아아, 야아, 이번 한 번만, 응?”

영은이 보결의 손을 잡으며 아양을 떨었다.

“네가 룸에서 조용히 마시는 거 싫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보결이 눈을 감고 이마를 지그시 문지르며 읊조렸다. 시끄러운 술집도, 노골적으로 자신을 훑어대는 시선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목소리에 못이기는 척 나와 준 것인데 역시나였다.

“아잉, 왜 그래, 이번 한 번만 맞춰줘. 나 이번엔 진짜 잘생긴 애랑 만나보고 싶단 말이야. 너랑 있어야 잘생긴 애들이 오는 걸 어떻게 하냐! 응? 응? 화 풀어.”

영은은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보결의 손을 연신 흔들어댔다.

‘여길 나온 내가 바보지.’

보결이 속으로 신세한탄을 하며 손을 뺐다. 그리곤 암묵적으로 거절을 표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다시 붙잡는 영은에 걸음을 떼지 못했다.

“놔. 싫다….”

보결이 거절을 잇지 못하고 작은 한숨으로 마무리 지었다. 어느새 영은이 눈물을 그렁거리고 있었다.

“임영은. 안속아. 놔.”

“알았어. 미안해… 내가 나쁜년이지. 내가 아무리 슬퍼도, 피곤한 친구 이렇게 붙잡으면 안 되지. 가, 나 혼자 더 마시다 갈게.”

영은이 손을 놓으며 과하게 코를 훌쩍여 댔다. 누가 봐도 가는 길 꼭 가시밭길이길 바란다는 행동에 보결은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경고하는 저 뒤끝예고를 무시할 재간도 없었다.

“이번만이야.”

보결이 들었던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영은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당연하지, 자자 마셔, 마셔.”

보결은 영은이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으며 잔을 받아쳤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피곤함으로 지끈거리는 두통만이라도 잊어보자는 생각에 소주를 약처럼 연거푸 들이키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점점 오르고 음악도 신나게 들리면서 겨우겨우 두통이 잊힐 때 쯤 남자 둘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비싼 술을 시켰는데 나눠 드리고 싶어서, 한 잔 어때요?”

보결은 이제 막 기분이 좋아지려는 판에 찬 물을 끼얹은 느낌이었다. 미간을 구기며 소주잔을 탁 내려놓았고 눈치 빠른 영은이 두 손을 맞대며 부탁하는 시늉을 보였다. 이를 그냥 무시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랬다간 영은의 온갖 짜증으로 더 피곤해질 게 뻔했다.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놓칠 새라 영은은 얼른 남자의 술병을 받아들었다.

“어머,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술인데 당연하죠.”

그렇게 영은과 남자의 분위기는 무르익어갔지만 보결은 자신의 옆 남자에게 눈길 한 번 안주고 술잔만 비워내고 있었다. 신나게 들리던 음악도 남자의 목소리와 섞여 소음처럼 느껴진지 오래였다.

‘이젠 술도 안 듣네.’

보결은 자신의 손에 들린 반 정도 차있는 술잔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나마 술로 조금씩 잊어가던 두통이 이젠 한계라는 듯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 때 옆 테이블에서 계속 진득한 시선을 보내던 남자가 다가왔다.

“저기요. 아까부터 지루하신 거 같은 데 저랑 한 잔 하실래요?”

“너 뭐야? 우리 재밌는데? 가지?”

보결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취기에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가온 남자를 막아섰다. 두 남자의 언성은 안 그래도 지끈거리는 보결의 머릿속을 더 뭉개는 것 같았다.

“야! 꺼지라고!”

“뭐, 이 새끼야! 너 이리 와봐!”

점점 더 격해지는 둘의 싸움 소리에 맞추어 소주잔을 쥔 보결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하…, 시발.”

눈을 지그시 감은 보결이 작게 읊조렸다. 그리곤 손에 들린 소주잔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고 일어섰다.

“네? 뭐라고요? 봐봐 너 싫다고 하시잖아!”

보결의 옆에 있던 남자가 취한 듯 어눌하게 말했다.

“야, 비켜.”

보결은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가방을 들며 말했다.

“취했어?”

남자는 상황파악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보결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남자를 향한 보결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서늘했다.

“비키라고.”

날이 선 시선에 남자는 흠칫하더니 보결을 피하듯 상체를 멀리 꺾으며 비켜주었다.

“야! 구보결, 너 어디가!”

영은이 나가려는 보결을 보고 말했다.

“머리 아파서 바람 쐬러. 그리고 내가 수진이 불렀어. 곧 올 거야.”

“뭐? 야! 구보결!”

보결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시끄러운 술집을 나왔다. 밖은 늦여름이라 가을바람에 섞인 차가운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보결은 이를 느끼듯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제야 좀 살겠네.”

잠시 바람을 즐기곤 술집 옆 골목으로 걸음을 옮기며 가방에서 담배케이스와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그 때 저 멀리서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야! 너 거기 안 서!”

주변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지만, 보결은 이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보결 쪽으로 가까워지는 듯 했다. 보결은 그제야 이미 무시하기엔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인파 사이를 응시했다. 정면으로 검은 복장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분명 보결을 덮칠 것 같았지만 남자가 순간적으로 보결을 피하며 어깨만 살짝 스쳤다. 반동으로 보결의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찰나의 순간, 익숙한 향이 보결의 코를 스쳤다.

“알코올?”

보결은 무심코 읊조렸다. 남자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보결은 여전히 그 곳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보결의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무엇인지 모를 애틋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잠시 서있던 보결은 곧 정신을 차리고 잡생각을 털듯 머리를 헝클었다.

‘담배나 피자.’

다시 걸음을 때 드디어 골목에 다다르자 소음을 피해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벽에 등을 기대며 은색의 담배케이스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들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라이터가 손에서 미끄러져 땅에 떨어졌다. 탁, 탁, 타르르르. 한참을 구르던 라이터는 골목 끝 상가 뒤편에 있는 좁은 골목 앞에서 멈췄다.

‘진짜 되는 일 없네.’

보결은 눈을 찡그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좁은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허리를 숙여 라이터를 줍고 일어나려는 순간, 그 좁고 어두운 골목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이에 멈칫했지만 이미 늦은 듯, 순식간에 커다란 손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흡! 으음!”

힘껏 발버둥 쳤지만 뒤에서 입을 막은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쉿, 잠깐만 미안해. 잠깐이면 돼.”

보결의 몸을 감싸는 돌같이 단단한 몸과는 달리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낮았다. 남자의 뜨거운 숨결에 섞인 목소리가 보결의 귀를 감쌌고 보결은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이 풀렸다. 긴장이 조금 풀리자 그제 서야 남자의 커다란 손에서 나는 진한 알코올 향이 코를 찔렀다. 보결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까 도망치던 그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오, 씨 이 쥐 같은 새끼 어디로 튄 거야!”

한 남자가 골목으로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남자는 보결이 있는 골목 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숨 막히는 긴장감이 덮쳐오자, 보결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거기 내가 아까 본거 같아! 이 새끼 여기 떴나봐. 빨리 가자!”

골목 밖에서 다른 남자가 소리쳤고 골목을 들어오던 남자가 발길을 돌렸다. 남자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보결의 허리를 감싸던 단단한 팔과 입을 막던 손이 풀렸다. 보결은 바로 뒤를 돌았다.

“당… 신…!”

보결은 바로 한마디를 하려 입을 땠지만 비좁은 골목 때문에 그 남자와의 거리는 생각보다 너무 가까웠다. 심지어 골목이 너무 어둡고, 검은 모자를 쓴 터라 남자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그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짙은 알코올 향뿐이었다.

“…너 뭐야. 미쳤어?”

순간적으로 얼어 남자만 쳐다보던 보결이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달이 서서히 구름 밖으로 나오며 좁은 골목 사이로 비추어 들어왔다. 달빛이 그림자에 묻혀 있던 남자의 얼굴에 스며들자, 흔들림 없이 보결을 응시하고 있는 칠흑같이 짙은 검정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고요한 소용돌이 같은 남자의 눈빛은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이건가. 사로잡힌다는 거.’

보결은 처음으로 타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유독 뛰어난 외모와 능력으로 어디서나 타인을 압도하고 사로잡기만 했던 보결이었기에 이는 더 크게 다가왔다. 그 남자와 닿았던 몸의 모든 부분에 소름이 끼치는 듯 했다.

이를 모르는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보결에게 진득이 붙어있었다. 연한 갈색 눈동자와 살짝 올라간 눈꼬리, 진한 쌍꺼풀, 긴장해서 깊게 패인 새하얀 목선과 쇄골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보결을 감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보결은 고개를 돌려 도망치듯 남자를 등지고 걸어갔다.

“담배… 안 피워?”

보결의 뒤에서 낮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는 보결의 하얀 하이힐 위에 놓인 얇고 새하얀 발목을 감아 올라왔다. 보결이 걸음을 멈추고 이끌리 듯 뒤를 돌았다. 남자는 앉아서 라이터를 집어 들곤 보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는 여전히 보결을 뚫어지게 향하고 있었다. 본능일까. 보결은 남자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걸음은 남자를 향했고 벽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물었다.

“줘.”

보결의 무심한 말투에 남자의 입꼬리가 살짝 호선을 그리더니 라이터를 건넸다. 보결은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내쉬었다.

“하…, 담배 한 번 피기 되게 힘드네.”

보결이 지친 듯 말했고 남자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리고 보결의 옆에 등을 기대섰다.

“불 좀.”

남자의 말에 보결은 눈길도 주지 않고 옆으로 라이터를 내밀었다. 남자는 라이터를 잠깐 보더니 이내 보결의 옆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두운 골목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영롱한 밝은 갈색 눈동자, 매끄러운 콧대, 살짝 도톰한 입술에 물린 담배, 그리고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과 달리 긴장한 듯 움푹 들어간 새하얀 목선. 남자는 다시 보결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기다려도 남자가 라이터를 받지 않자 보결이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남자는 보결과 눈이 마주쳤고, 이를 기다렸다는 듯 보결의 손을 잡고 순식간에 보결의 정면으로 섰다. 그리고는 보결의 담배에 자신이 입에 문 담배를 맞닿아 불을 옮겨 붙였다. 보결은 놀랐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밝게 타오르는 담뱃불이 남자의 얼굴을 밝혔다. 하지만 남자의 먹물같이 짙은 눈동자는 그 불빛마저 잠식하는 듯 더욱 검게 빛났다. 그 새까만 눈동자는 불빛으로 부족한 듯 보결의 모습까지 비추어 보이고 있었다. 보결은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모습이 마치 잡아먹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인지, 이번엔 숨까지 막혀오는 듯했고 이내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눈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