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틈새.

슬아는 사빈을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이준의 곁에서 그녀를 치우는 건 역부족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한 거다.

누구에게도 밀려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특히 이준에게는 항상 자신이 최우선이었던 기억뿐이라서,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파악이 늦은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한슬아가 누군가.

그저 예쁜 외모로만 유명했던 게 아니었다.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수재 소리는 들어봤고, 몇 번의 생을 이어 가는 동안 노련해진 부분도 있었다.

상황이 그러하다는 걸 인정했으니, 이제 방법을 바꾸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까, 가장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건 그 물질을 찾는 거라는 말이지.”

“그렇지. 일단 내가 가진 건 한 사람이 딱 한 번 이동할 양뿐이니까.”

슬아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머리칼을 한데 모아 높이 틀어 올렸다. 그런다고 아름다운 얼굴이 가려지는 건 아니었지만, 제법 학자의 분위기가 풍겼다.

“돌아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왔지만, 일단 이 후보군이 전부야.”

그녀는 지도 위에 표시해 둔 곳들을 가리키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에 우리가 가볼 수 있는 데는….”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세 군데쯤?”

그런 슬아의 곁에서 이준도 미간을 좁히며 집중하고 있었다.

“따로 협조를 구할 수 있는 데가 없을까? 대학이라든지… 연구 단체가 있다든지….”

“그건 내가 알아볼게.”

서진이 자신의 태블릿을 펼치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슬아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서진아, 알아보는 김에 혹시 캐나다 쪽에 데이빗 보위라는 사람이 있나 알아봐줘, 아마도… 아직 어릴 거야. 스무 살쯤?”

“그게 누군데?”

우진이 겉에 입고 있던 니트를 벗어던지면서 물었다.

“자료에 보면 그 사람이 북반구에서는 처음으로 그 물질에 대한 논문을 썼었어.”

“오! 그럼 벌써 연구 중일 수도 있겠네!”

“응, 그런데 시기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그게 지금부터 한참 후의 일일지도 몰라서.”

“아… 그럴 수도 있구나.”

슬아의 자신 없는 말에 우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은 각각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서로 손발을 맞춰 가면서 일을 진행시켰다.

슬아가 더 이상 이준과 사빈 사이의 문제를 들먹이지 않자, 그들 사이의 분위기가 날카로워질 일이 없었다. 이제 그녀가 포기한 게 아닐까 생각할 만큼, 그날 이후로 슬아는 가시를 숨겼다.

세 남자가 자신을 보는 눈에 독기가 빠져 가는 걸 느낄수록 슬아는 더욱 몸을 낮췄다. 그리고 그건 톡톡한 효과를 발휘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우진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밥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면서.

“오늘 우리 짜장면 어때?”

“좋지!”

“사빈은?”

“오늘 바울이네 샵에 놀러 갔어. 아직 거기 있을 거야.”

사빈을 뺀 네 사람의 식사가 배달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너네 기억나? 예전에 서진이가 슬아 옷에 토한 적 있잖아.”

“아이씨… 먹는데 왜 그런 얘기를 꺼내.”

“나 기억나! 기억나! 내가 막 엉엉 우니까 이준이 자기 옷 벗어 준다고 달래고 막. 큭큭.”

우진이 꺼낸 말로 모두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웃었다.

가깝게 지내던 부모님들 덕분에 네 사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한 추억이 많았다.

“그때는 얘 진짜 어떡하지 싶었다니까? 어디 가서 바보 소리 들을까 봐….”

“야, 한슬아. 말 똑바로 해라? 다들 널 걱정했지 내가 아니라. 고집불통에 완전 막무가내였으면서.”

“내가 뭐!”

서진과 투닥 거리는 슬아를 보면서 이준도 그 시절을 떠올렸다.

지구를 살리겠다는 거창한 꿈도, 인류를 위해 무언가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던 시절.

부모님들이 살아계시던 따뜻하고 포근했던 시절을 떠올리니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막 들어서던 사빈의 눈에는 그의 미소가 향한 곳이 슬아라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왔어?”

사빈은 반갑게 맞이하는 이준을 보면서 놀란 마음을 감췄다.

“응. 선물도 가져왔지.”

“예쁘네.”

한 아름 안고 있던 꽃을 창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서 이준을 다시 앉혔다.

“마저 먹어. 난 들어가서 꽃병 가져올래.”

한 젓가락 먹겠냐는 우진의 말에 손을 젓고, 서진을 향해 눈으로 인사를 하고. 슬아를 향해서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예전 주방으로 쓰던 공간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들어서자마자 사빈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서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내뱉는 숨에 함께 뱉어버리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처럼, 크게 숨을 내쉬었다.

“꽃병이 어딨더라.”

그러고는 찬장에서 기다란 병을 찾아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이미 병에 가득 찬 물이 넘치고 있는데, 사빈은 멍한 눈빛을 허공에 두고만 있었다.

밖에서 들려온 웃음소리가 아니었으면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뻔했다.

***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4층으로 올라온 사빈은 소파에 앉았다.

집안은 공기가 흐르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고요했다.

소파나 장식장 같은 사물처럼 소리 없이 앉아 있던 사빈은 일어나 가방을 뒤적였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네 번호를 알려줬다. 잘 처신해.]

짧은 문자를 읽고, 손가락으로 만져보다가, 꼭 징그러운 걸 만진 것처럼 냅다 집어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짜증 나….”

가루가 날릴 것 같은 퍼석한 목소리는 금방 흩어져버렸지만, 사빈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 사빈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컵라면에 과자, 삼각 김밥까지 우걱우걱 먹어댔다.

그걸로도 모자라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하나를 다 마시고 두 번째 캔을 뜯었을 때,

“우욱!”

치밀어 오르는 구역감에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미련하게 쑤셔 넣은 음식들을 두 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의 눈에 일렁이던 분노와 짜증이 조금 가셨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뚫어지게 보던 사빈이 갑자기 자신의 뺨을 쳤다.

빨갛게 부어오르는 뺨을 보면서 씨익 웃기까지 했고.

“정신 차려.”

다행히 사빈의 기행은 그쯤에서 멈췄다.

다시 소파로 돌아온 그녀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옆으로 누웠다. 눈만 깜빡깜빡하면서 TV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봤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가느다란 팔다리, 영혼 없는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화면 속에 있었다.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사빈은 화면 속에 있는 여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어떤 여자가 살았어. 예쁜 집에서 예쁜 옷을 입었지만, 매일매일 죽고 싶어 하는 여자였지.”

텅 빈 눈을 한 사빈의 목소리 또한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속으로 하는 말을 전부 듣고 있었는지, 어느 날 신은 그 여자에게 곧 죽게 될 거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줬지.”

사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는 너무 기뻤어. 스스로 죽어버리는 건 너무 비참하고… 무서웠거든. 그런데 곧 저절로 죽을 거라니까 얼마나 좋아?”

입은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웃지 않았다. 어찌 보면 광기 어린 듯한 표정이 기괴했다.

“그런데 여자가 모르는 게 있었어. 자기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몰랐던 거야.”

큭큭 거리는 웃음소리가 서글프게 흘러나왔다.

“죽을 준비가 됐다 그러면서, 사실은 전혀 아니었던 거지. 신은 그걸 다 알고 있어서, 남자를 하나 보내줬대. 그녀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를.”

사빈의 눈동자 안에 누군가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서는 매일 깔깔 웃고 있대. 여자가 갈팡질팡하는 게 웃겨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음에도, 울고 난 것처럼 자꾸만 숨이 넘어갔다.

“하루는 행복했다가, 하루는 불행했다가, 죽고 싶었다가 살고 싶었다가, 미친 애가 따로 없더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사빈의 눈이 감겼다.

“제정신일 리가 없지. 늘 이렇게 하나씩 팡팡 터지는데… 지친다 지쳐.”

그냥 이대로 잠들었으면.

자고 일어나 눈을 뜨면 다시 상쾌한 아침이 된다거나 기분이 다시 좋아진다거나 하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싶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의 파도는 익숙한 일이었는데, 이준을 마음에 들인 이후로는 파도의 크기가 달라졌다.

사빈은 인정해야 했다.

센 척은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은 했지만 슬아의 말에 흔들렸음을.

이준의 마음이 굳건하고, 함께할 때 너무나 행복하다는 걸 확인할수록,

언젠가는 끝이 올 거고, 이준은 그 끝에서 자신 때문에 망설일 거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빌어먹을.”

사빈의 공간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들지 못한 사빈은 소리 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서야 했다.

그날은, 밤이 되어서도 이준이 올라오지 않았다.

***

이른 아침, 슬아는 물을 마시려고 방에서 나왔다.

주방으로 향하다가 발걸음을 멈춘 이유는, 소파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누군가의 발 때문이었다.

발소리를 줄이고 다가가 보니 이준이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싫은지 한 팔로 눈을 가리고 새근새근.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하다가 온 모양이었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슬아의 입꼬리도 점점 올라갔다.

‘그래, 넌 그런 애지.’

이준은 전형적인 천재 형의 인재였다.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인상을 쓰기보다는 반가워서 미소를 짓는. 그저 ‘재미’를 위해서 몇 날 몇 일을 풀이에 열중하곤 하는.

그런 그에게 풀릴 듯 말 듯 그를 자극하는 문제를 던져줬으니 이러는 건 당연했다.

정답을 알아내려면 아마도 꽤 시간이 걸릴 테니, 슬아는 계획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카페를 닫고 나서는 오로지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 이준이었다. 짬을 내서 사빈과 식사를 하고 그녀의 생활을 살피긴 하지만, 그 시간과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다.

‘예전이랑 똑같아.’

슬아는 이미 경험한 모습이었다.

늘 주위 사람을 잘 챙기고 다정하게 대하는 이준이지만, 문제에 빠져들었을 때는 달라진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제 곧 사빈은 서운해할 거고 지칠거다. 하지만 이준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거고.

‘내가 그랬으니까.’

이준이 그럴 때면 슬아는 관심을 끌기 위해서 괜히 사고를 치곤 했다. 하지만 지금껏 지켜본 사빈은 그럴 성격이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뒤로는 불안해하겠지.’

슬아는 창밖을 쳐다봤다.

따뜻한 봄날, 분홍빛 벚꽃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깝긴 하지만, 영원의 시간이 자신에게 있으므로 급할 일은 아니었다.

늘 붙어 있던 이준과 사빈 사이에 띄엄띄엄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승부를 볼 타이밍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슬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제 슬슬 진도를 더 나가볼까?’

조용히 휴대폰을 가져와 자고 있는 이준의 사진을 찍은 슬아는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

[준이가 피곤해서 오늘 조식 서비스는 힘들 듯! 좀 더 자게 해주고 싶어.]

꽤 사적인 사진과 함께.

#56. 타이밍 한번….

사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오랫동안 드레스 룸에서 머물렀다.

그녀가 갖고 있는 고가의 옷 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골랐다. 그리고 국내에 몇 켤레 들어오지도 않은 한정판 브랜드 구두도 신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민 차림으로 거울 앞에 선 사빈이었다.

늘 그냥 풀어헤치거나 하나로 묶던 머리카락도 오늘은 샵에 다녀온 것처럼 잘 정리되어 있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까만 선글라스도 오랜만이었다.

잘못해서 밟히면 뼈가 아작 날 것 같은 뾰족한 스켈레토 힐을 신고, 매끄럽고 가는 다리를 그대로 내놓은 사빈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나섰다.

그녀가 먼저 향한 곳은 1층.

이준과 나머지 세 사람이 연구에 한창 집중하고 있을 만한 시간이었다.

“어, 왔…어?”

사빈일 거라 예상한 모두의 시선이 무심하게 닿았다가, 그대로 꽁꽁 묶여버렸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모습에 가장 먼저 표정을 굳힌 건 이준이었다.

“어디 가?”

“응. 누구 좀 만나러 가.”

“누구?”

그의 물음에도 사빈의 새빨간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선글라스 안쪽에 숨겨진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사빈을 쳐다보면서 살짝 미소 짓는 슬아의 표정이라든가, 어려운 숫자들이 빼곡하게 써 있는 화면이라든가, 꽤 가깝게 붙어 있는 이준과 슬아의 의자 같은 것들에 눈길이 닿았다.

“말 안 해줄 거야?”

이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사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지 마, 이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네가 이러고… 내려왔는데.”

그의 눈에 비친 사빈의 모습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영이나 바울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닌 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