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떠나가는 교정은 언제나 쓸쓸해 보였다. 각종 팀 과제로 한 주를 바쁘게 보냈던 학생들마저 떠나간, 달의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의 학교는 폐허처럼 느껴졌다. 기숙사 생활이 의무적인 과학 고등학교는 학교를 떠나야 하는 마지막 주 토요일만 아니면 괜찮은 곳이었다.'은조는 집에 갈 생각도 않고 수다를 떨고 있는 친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해맑은 얼굴로 정신없이 떠들고 있는 두 친구는 여섯 살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한 뒤 처음으로 가족처럼 느껴졌던 존재였다.'부모님은 두 분 다 같은 대학 같은 과 출신으로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은조를 임신하면서 결혼을 하셨다고 했다. 공부 욕심이 많았던 두 분은 그녀를 낳은 뒤에도 석사, 박사 과정을 모두 마쳤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부모님에 대한 것이 별로 없었다. 언제나 종일반 유치원에,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면 할머니나 일하는 아주머니가 번갈아 그녀를 마중 나왔다. 그러다 결국 부모님은 서로에 대해 뭐가 불만인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아버지는 곧바로 유학을 떠나셨고, 미국에서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은조는 새어머니와 이복동생이 드나드는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고 싶지 않아 기숙사가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할아버지, 할머니도 언제나 그녀를 버거워했다. 그녀를 유일하게 버거워하지도, 귀찮아하지도 않는 건 막냇삼촌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영향력 있는 은행가다. 그런 집에서 이혼한 큰아들이 낳은 은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것도 부모 양쪽 모두 아무도 돌보려 하지 않는 아이는 더더욱.'막냇삼촌은 일찌감치 연예계로 진출한 사람이었다. 10대 후반쯤부터 각종 드라마에 나왔고 군대를 다녀온 후엔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 이젠 한류 스타가 되어 있었다. 늘 바쁜 와중에도 삼촌은 언제나 그녀에게 생활비와 용돈과 학비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오늘처럼 기숙사에서 나가야 하는 날엔 잠잘 곳도 마련해 주었다. 삼촌의 집에 그녀의 방이 있었다.'“너희는 왜 집에 안 가고 내 방에 와서 떠들고 있어?”'한유정, 최한나. 은조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셋 다 2년 만에 고교 과정을 마칠 예정이고 한나와 은조는 해외 진학반으로 이미 SAT를 봤으며 8개의 아이비리그 대학과 MIT에 원서를 내놓은 상태였다. 유정은 국내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