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뒷모습만 봐야 한다는 건…

창가 테이블에 앉아 봉골레 파스타와 로제 파스타, 그리고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었다. 창 가득 들어차는 햇빛이 눈부셨지만 아직 겨울인 탓에 태양이 주는 따뜻함이 있어서 좋았다.

“앞으로 우리 회사 말고 다른 데서 보면 되겠다.”

“내가 널 다른 데서 왜 보니? 그리고 회사에선 암말 안 해? 어째 원데이 미디어로 출근하는 날이 더 많은 것 같아. 김 이사님, 남의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죠.”

혁이 멋진 미소를 머금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진지하게 하영의 말에 집중했다.

“잔소리를 너무 감동적으로 듣지 말라고!”

“양하영 우리 회사 올래?”

“엥? 갑자기?”

“그냥 우리 회사 와라.”

“우와, 참 가슴 뛰는 농담이다. SUIT가 어떤 회산데.”

“농담 아닌데… 지금 스카우트 제의하는 거야.”

하영은 동그랗게 큰 눈으로 혁을 쳐다봤다.

“날 왜?”

“너 일 잘하잖아. 회사에서 누군가는 채널을 담당해야 하고, 난 그게 너였으면 좋겠고.”

혁의 표정만 봐서는 농담이 아닌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진담이라고 믿기에도 의구심은 있었다.

“욜, 김혁이! 역시 선수라 그런지 여성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군.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할 줄 알고.”

“진짜 생각해 봐, 농담으로 넘기려고 하지 말고. 그리고 자꾸 선수, 선수 하는데 뭘 근거로? 이건 엄연한 명예 훼손이야.”

“우리 팀 현수 씨가 그랬어. 너한테 버림받은 여자가 한 트럭은 될 거라고.”

“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양하영한테 버림받은 건 나라고.”

혁의 말에 하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뭐래?”

“기억 안 나? 너 나랑 키스하고 도망가서는 핸드폰 번호도 바꿨잖아.”

갑작스러운 첫 키스의 기억을 들추는 바람에 그날의 느낌까지 소환되자 얼굴이 화끈거려 하영은 큰소리를 쳤다.

“야, 그게 언제 적인데! 그땐 술김이었잖아. 그리고 그건 네가….”

이런 말에 왜 답을 하고 있는지 한심스러워져서 하영이 말을 삼켰다.

“뭐… 진심도 아니었으면서.”

혁의 표정이 굳었다.

“누가 그래, 진심이 아니라고?”

“어…?

“너한테 문자하고 전화를 얼마나 했는지 알잖아. 네가 모조리 씹어서 그렇지.”

“내, 내가 그랬나?”

“그리고 그날 술은 양하영 네가 마셨지. 난 보기와 다르게 체질적으로 술을 못해.”

“진짜? 아닌데, 캔 맥주 마시는 거 봤는데?”

“무알코올.”

그러고 보니 몇 번의 술자리에서 혁은 늘 탄산음료나 캔 맥주를 마셨던 기억이 났다.

“아무튼 양하영 팀장님! 우리 회사로 오는 거 진지하게 고민해 주길 바라고 더불어 현수한테 비참했던 나의 상황을 정확히 전달해 주길 바라.”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혁이 얄미워 귀엽게 째려보았다.

“쳇!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네가 짝사랑한 줄 알겠네. 스카우트란 말은 듣기 좋은 말이니까 예의상 고민은 해볼게, 기대는 말고. 혁아, 퇴근하고 뭐해?”

두근두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하영의 목소리에 심장이 뛰었다.

‘어이없다 김혁, 다시 10대가 된 것도 아니고 겨우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설레고 난린지….’

“금 대표 없으니까 나한테 들이대는 건가?”

“뭐래! 난 그냥 야구 배팅장 갈 건지 물어보려고 했을 뿐이라고!”

“그런 건 묻지 말고 통보만 해도 돼. 당연히 가줘야지!”

**

7시에 하영을 데리러 오겠노라 약속을 하고 혁은 세인트 빌딩으로 갔다.

1층부터 3층까지 일반 회사들이 입주해 있었고 4층과 5층에 SUIT 본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6층부터는 본사에서 직영하는 Hotel Residence Saint로 그곳 11층에 혁이 살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어 회사에는 들르지 않고 바로 호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방으로 갔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들이켜며 창가로 갔다.

창밖으로 내려 보이는 서울의 풍경이 요즘처럼 예뻐 보였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누군가 나를 온전히 나 하나로 봐준다는 것에 문득문득 감사하고 있었다.

혁의 부모님은 SUIT의 대주주, 그러니까 매거진 SUIT의 창립 멤버였고 그 덕에 혁은 아쉬울 것 없이 풍족한 삶을 살아왔다. 부모님은 늘 회사 일에만 몰두했고 혁에게는 늘 최고가 되어 주길 기대했다. 따뜻한 말과 진심 어린 사랑보다 타인의 시선과 냉혹한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주의를 주셨다. 욕구를 표시 내지 말고 자신과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하고 눈치껏 행동하라고 강조하셨다.

내 인생이 아니라 남을 위한 인생을 사는 꼭두각시….

혁은 사랑이 고팠지만 그 자리를 채워 주는 건 부모가 아니라 언제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주변인들이었다.

부모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거짓임을 알았을 때 두려웠고 현실을 잊고 싶어서 더 위태로운 삶을 살았다.

이탈리아 출장을 가셨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야 혁은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때서야 부모님이 그렇게 원하셨던 SUIT에서 일할 수 있었다.

대주주로서의 권리만 둔 채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겼고 회사에서 실무를 배우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며 함께 성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보이는 결과에 다 함께 마음껏 기뻐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부모님은 언제나 부족하다고 말씀하셨고 혁이 하는 대부분의 결정을 비난하셨다. 부모님 표현을 빌리자면 격에 맞지 않는 친구들과 사귄다며 혁의 친구들을 언제나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딱 한 번,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단 한 번 칭찬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만났다. 너 윤희주라는 애랑 친하게 지낸다던데 맞니?”

“네, 희주가 사귀자고 해서요.”

“집안도 그렇고 공부도 잘하고 스타일도 마음에 들더구나. 너와 격이 맞는 아이였어.”

하지만 희주는 혁을 좋아하지 않았고 오로지 태현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를 이용했다. 운동장으로 태현을 데리고 나오라고 했을 때 희주의 집요함이 귀찮아서 요구를 들어줬고 그날 여학생이 연단 아래로 떨어져 의식을 잃은 모습을 봤을 때 소름이 끼쳤다.

혁은 의식이 멈춘 듯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지만 태현이 여학생을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뛸 때 그제야 그 여학생이 하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부터 하영을 의식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멍청한 기집애가 떨어지는 바람에 나만 곤란해졌어. 그런 애를 업고 뛰어가는 태현이는 또 얼마나 한심한지… 재수 없어!”

뇌리에 또박또박 새겨진 듯 여전히 기억나는 희주의 말….

혁이 남아 있는 생수를 마시고 기억을 털어내려는 듯 빈 병을 움켜쥐자 플라스틱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힐끗 시계를 보고는 구겨진 플라스틱 물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

나이만 먹었다 뿐이지 10대나 20대나 30대나 노는 스타일에는 변화가 없었다. 야구!

야구를 너무 사랑하는 하영의 1년 스케줄은 프로야구 선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 경기를 TV 또는 인터넷 매체, 경기장에서 보고 선수들과 함께 열광하고 때론 승리에 취하기도 했다.

스토브리그 땐 함께 선수를 분석하고 트레이드나 계약에 흥분하기도 했다. 하영이 야구 배팅장을 자주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했다.

시간이 나면 할 수 있는 일의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야구를 하거나, 야구를 배우거나, 요가를 배우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빨래방을 가거나, 몽이와 놀거나, 지희와 수다를 떨거나…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랬던 하영에게 남친도 생겼고 남사친도 생겼다.

“우히히, 너무 좋아!”

물론 혁은 남사친 이길 거부하고 있었지만 하영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좋아 김혁, 오늘 저녁은 내가 베풀어 주지! 1층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아직 안 왔나?”

핸드폰을 꺼내 혁의 번호를 찾았다.

Rrrrrr Rrrrrr.

“앗, 깜짝이야! 모르는 번혼데…. 여보세요.”

[양하영, 나 희주.]

“윤희주? 네가 어쩐 일로 전화를?”

[너 어디야?]

“남이야 어디에 있건 뭔 상관이실까.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그런 사이였나? 그러는 넌 중국에 있으면서….”

[정신없이 그만 좀 주절대고 지금 좀 만나.]

“만나? 중국에 있는 애를 어떻게 만나! 그리고 떡국 먹을 때 예의도 말아먹었니? 말하는 꼬라지….”

[뭐? 어처구니없어서….]

“넌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난 시간이 없어. 바쁘다고! 끊어!”

갑작스럽게 전화를 걸어서 다짜고짜 만나자고 말하는 희주 때문에 하영은 화가 치밀었다.

“와, 열 받네. 다혈질 양하영 오랜만에 빨간 등 켜지네. 과거의 바보 같았던 양하영이 아니라고! 밥그릇 수와 나이만 비례하는 줄 아나 본데, 절대 아니지. 난 욕이랑 깡도 늘었다고. 덤벼 이씨!”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펴졌다, 눈이 커졌다 작아졌다 안면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혁은 1층 입구에서 통화하는 하영을 발견하고 적당한 곳에 정차했다.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허리를 숙여 자신을 봐주길 기대하며 열심히 손을 흔들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띠롱.

<야 김혁, 언제 와?>

“양하영 진짜… 앞만 보지 말고 옆도 좀 보라고.”

문자를 할까 하다가 차에서 내렸다.

저벅저벅 걷던 혁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측면 gate 회전문을 통과해서 긴 다리로 최대한 빨리 달려가 회전문을 밀고 나가려는 누군가의 손목을 채듯이 잡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놔! 이거 놓으라고!”

“조용히 해!”

비상계단의 문을 열고 희주를 던지듯이 계단으로 밀어 넣었다. 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뛰어서 숨이 가쁜 건지 불안감 때문에 심장이 뛰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너 미쳤어?”

“내가 뭘 어쨌는데!”

희주가 예쁜 눈으로 혁을 노려봤다.

회전문 앞에 서 있는 하영을 발견하고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맹렬히 걸었다. 화가 나면 희주는 의식의 흐름대로 움직였다. 눈앞의 것을 던져서 깨트리거나 밀어서 넘어트리거나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고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정신이 돌아오면 수습하면 됐으니까. 화가 풀릴 때까지 반복했고 행위 자체를 합리화했다.

불안했다. 일단 희주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혁은 뛰었고 희주를 붙잡았다.

“윤희주! 네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만약 그게 내가 짐작했던 일이라면 이젠 내가 못 참아.”

“무슨 말이야? 난 그저 하영이가 보여서 얘기 좀 하려고 했을 뿐이야.”

“스키장에서!”

혁이 터져 나오는 화를 참으며 손바닥으로 벽을 쳤다.

“하영이랑 부딪치는 거, 아니 네가 밀어 버리는 걸 봤어. 혹시나 싶어서 사고 영상 요청했는데….”

희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멍청아! 너도 다칠 수 있었어!”

“뭐, 뭐?”

“애처럼 굴지 말자 윤희주, 그런다고 그 자식이 너한테 올 것 같아? 네가 이럴수록 더 멀어진다는 거 몰라?”

“내가 뭘! 나한테 대체 왜 이래?”

“하아, 이젠 나도 네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