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프롤로그

칠흑처럼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새까만 머리카락,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영롱하며 아름다운 황금빛의 눈동자, 핏기가 없는 거라고 착각할 정도로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 새까만 제복을 입고, 살벌한 기운을 풍기는 검을 든, 한 눈에 보아도 무섭도록 차갑게 잘생긴 남자였다.

거만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눈빛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과 위압감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무섭도록 잘생긴 남자의 발밑에는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싸늘한 시체가 되어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진득한 검붉은 핏물을 흘리며 죽어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은발의 여자는 겁을 먹은 듯이 손과 발을 떨고 있었다.

아니 이런 광경을 보고서도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새하얀 베일을 쓰고 있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여자 역시도 저 시체들과 똑같은 은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주군, 이 여자가 그 유명한 ‘신녀’랍니다.”

“…….”

“근데 신녀이기 이전에, 왕족이라는데….”

기사가 ‘죽일까요?’ 라는 눈빛으로 흑발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오만하며 눈빛에 전혀 흔들림이 잡히지 않는 냉혹한 성격을 가졌으며, 시리도록 차가운 얼굴을 가진 잘생긴 남자는 제국의 황제였다.

재앙의 씨앗이었으나, 성년이 되어 일찍 옥좌에 앉으면서 제왕의 운명과 뒤섞인, 다른 국가에게 있어서는 재앙과 다름없지만, 제국에게 있어서는 축복의 존재인.

신의 나라라 불렸던, ‘로단테’왕국을 멸망시킨 제국의 재앙이라 불리는 악마 같은 남자를 향해 베일을 쓴 여자는 울분에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안 페르마넨스 벨리아르!”

말 하나하나에 힘이 실린 묵직한 음성이 살아있는 이들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았다.

“너를 저주한다!”

황제는 미동조차 없이 버러지를 보는 듯 싸늘하게 식은 황금빛 눈동자로 여자를 내려 보았다.

“신녀라고 했나.”

황제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어떠한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차갑게 메말라버린 표정으로 거만하게 왕좌에 앉아있었다.

“과연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보여.”

황제는 미간을 구겼다.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든다는, 그리고 괴로운 무언가가 떠오르는 듯 처음으로 얼굴에 감정이라는 것이 서렸다. 짜증이라는 감정이.

“이안 페르마넨스 벨리아르. 신께서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니 듣거라.”

여자는 신녀답게 신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막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여자를 죽일 듯, 살기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검을 뽑지 않았다.

“제왕의 운명을 타고난 재앙이여, 네가 전쟁으로 대륙을 통일한다 하더라도 그게 얼마만큼 오래 갈 것 같으냐.”

황제는 조소를 날렸다.

“네가 전쟁으로 대륙을 통일한다 하더라도, 네가 과연 정복한 나라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느냐.”

“신녀.”

황제는 여자의 말에 짜증과 분노를 담은 묵직한 감정을 실었다.

하지만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할 말을 묵묵히 내뱉었다.

“대륙이 제국의 것이 되고, 그 후에 온전히 네 것이 되길 바란다면, 이 아이를 죽이지 말거라.”

“…….”

“이 아이를 죽이면, 너는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후회?”

남자는 후회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표정이 일렁거리더니, 한 손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고서는 어깨가 약간은 들썩였다.

“나의 아이를 통해, 내 너를 지켜볼 터이니.”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남자는 미치광이처럼 웃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토록 우스운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아하하하!”

여자는 황제가 웃든 말든 상관치 않고 묵묵히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황제여, 그대는 정녕 천하를 얻고 싶은가.”

“신녀. 그대는 정말 신의 말을 듣는구나.”

“나는 신의 선택을 받은 몸이다.”

“그래. 너를 죽이면 신벌이 떨어질 것이란 말 잘 들었다.”

한껏 조소를 머금고 황제는 말을 이었다.

“짐이 후회를 할 것이라고? 더는 짐에게 잃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니 더는 후회할 건 없다는 소리다.”

“신께서 후회할 거라는 말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혀. 더는 후회할 게 없으니까. 후회는 단 한 번으로 족하다. 그대의 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구나.”

남자는 분명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아 보였지만,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담겨있었다.

“그대의 말대로 이제는 천하를 얻길 바란다.”

“…….”

“그대 이전에 존재했던 신녀가 예언을 했었지.”

남자의 말에 여자는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이내 자조적인 웃음소리를 내고는 말 하나하나를 내뱉었다.

“그래. 그대가 태어난 날, 그 분께서는 그리 말씀하셨지. 그대의 이름 안에 ‘페르마넨스’라는 미들 네임을 부여하라고.”

“잘 아는군.”

“그대는 그 단어에 대한 뜻을 알고 있더냐.”

“그건 그대가 알려줘야 할 말이 아닌가.”

“원래는 공개하지 않았던 신탁의 진정한 뜻을 나의 신께서 이제는 말하라고 하는구나.”

여자는 심호흡을 하며 잠시 뜸을 들였다.

“불변. 그대가 하는 모든 것들이 곧 운명이니, 이미 정해진 운명을 엎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자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죽거나, 옥좌에 오르지 않는 것 뿐.”

이 신탁 속에서 말하는 아이는 운명대로 흘러가, 성년이 지날 때까지 살아있었으며, 그 아이의 부모는 요절했다.

운명대로, 그 아이는 어렵지 않고 순탄하게 장애물이나 시련 없이 황제라는 자리에 앉았으며, 마지막 신탁의 뜻에 따라.

“옥좌에 앉는 그 순간부터 피바람이 불 것이다.”

예언과 다를 바 없이, 신탁 속의 아이는 옥좌에 앉자마자, 정적들을 전부 숙청하고, 자신의 혈육마저도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전부 숙청했다.

그렇게 내부에서부터 피바람이 불고, 바깥까지 피바람이 불었다. 남자를 다르게 부르는 말, ‘전쟁에 미친 황제’, ‘피에 굶주린 악마’.

수많은 피가 남자의 저 새하얀 손에 묻어나 있는 것은 변치 않을 진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들이 정해진 운명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건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거라고 본다.”

“신녀.”

여자를 부르는 차디찬 음성이 분위기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대는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

“그대는 신의 말을 맹신하나?”

“내가 신의 뜻에 의심을 품는다면, 그 누가 신을 믿을까.”

얼굴이 훤히 보이지만, 표정을 알 수 없는 남자와 얼굴을 전부 베일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 표정을 알 수 없는 여자.

“이안 페르마넨스 벨리아르. 너 역시도 신의 사랑을 받는구나.”

체념한 듯한 음성으로 여인이 말했다.

“황제여,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단 한가지다. 나의 신께서 너를 선택한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니까.”

남자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서 짐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지?”

“제국에 나의 신을 위한 신전을 세워라.”

여자의 말에 남자는 조소를 흘렸다. 그리고 살기를 흉흉하게 내뿜으며, 천천히 왕좌에서 내려왔다.

“신녀. 그대와 그대의 신은 참 주제파악을 못하는구나.”

“황제! 그대가 할 일은 나의 신을 위한 제단을 만드는 것이다. 나의 신께서 나의 조국을 버린 것은 너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신녀. 짐은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아.”

스릉-

칼이 칼집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칼로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을 망설임 없이 죽였다.

“그대를 죽이면 신벌이 내려올 거라고? 그럼 그 신벌. 달게 받도록 하지.”

남자는 여자 앞으로 다가와서는 한 발 멀어졌다. 단칼에 목을 베어버리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자비인 건지, 고통 없이 끝내주려는 것처럼 날카로운 칼날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 순간, 여자는 얼굴을 가렸던 베일을 한손으로 걷어냈다. 그리고 손에 든 작지만 날카로운 암기를 황제의 심장을 향해 휘둘렀다.

남자는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던 암기가 들려있던 여자의 손목을 쉽게 낚아챘다.

챙강-

남자는 여자를 죽이기 위해 들고 있던 자신의 검을 망설임 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서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리에나?”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적을 눈앞에서 마주한 사람처럼 보였다.

“아리에나?”

남자의 태도에 여자는 당황했다. 하늘을 담아낸 푸른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정말…아리에나…입니까?”

“…나를 알고 있습니까.”

지금껏 냉랭함을 유지하고 무감정하고 흔들림 하나 없던 황금빛 눈동자에 동요가 일렁였다.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습니까?”

여자는 암기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보려고 했으나, 남자의 손은 전혀 미동조차 없었다.

결국 여자는 손목이 아파서, 암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무언가에 단단히 홀려있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여자의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에 반해, 여자는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리에나.”

“그건 더는 제 이름이 아닙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아리에나.”

남자는 여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를 무척이나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몇 년 동안 떨어져있던 연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애달팠다.

“저는 아리에나가….”

“정말…저를 기억 못하십니까.”

“저는 그쪽을 모릅니다.”

“이래서…신이 제가 그대를 죽이지 못할 거라고 말한 것이겠군요.”

아까와는 달리 무척이나 부드럽고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는 여자에게 있어서 혼란스러움을 가중시켰다.

“그대의 신이 이겼습니다. 그대를 제가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남자는 여자를 꽉 끌어안았다. 마치 실제인지를 확인하는 듯, 손에 붙잡히는지 확인했다.

“아리에나…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여자도 당황했고, 주변에 있던 근위기사들도 어리둥절해 했다. 극명한 남자의 변화에 다들 따라가지 못했다.

#01. 그 신녀의 이야기

거울 안에는, 달빛 아래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이 나는 은빛 머리카락, 맑은 하늘을 담아낸 듯한 푸른 눈동자, 생기가 넘치지만 새하얀 피부를 가진, 마치 천사를 연상시키는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누가 보아도 감탄을 할 만한 무척이나 예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예쁜 얼굴은 새하얀 베일에 의해 가려졌다. 그리고 발걸음을 방 밖으로 움직였다.

“…….”

나는 신녀였다. 그리고 신녀이기 이전에는, 일국의 왕녀였다.

왕녀로 태어났었기에, 부족함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었다 한다. 그러다가 신의 선택을 받아, 지금 같은 신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선택 받은 이후부터는 얼굴을 새하얀 베일로 가렸고, 순백의 예복만을 고집해 입어야 했다. 그것이 관례였기에.

신녀의 삶은 불행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평탄하고도 고요한, 잔잔한 샘물이었다. 위험에도 노출이 되지 않았고, 누군가의 부인이 될 필요도 없었다.

다만, 단점을 꼽자면 ‘왕’이 될 수 없다는 것.

그것만을 제외한다면 나쁘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좋은, 반겨야만 하는 자리였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 신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삶이고 축복이라고 한다.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신의 사랑을 받았다는 의미였고, 역대 신녀들은 자연과 시간의 순리가 먹히지 않았다.

겉모습은 죽기 직전까지도 늙지 않는다.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 같았다.

18살이 되는 해에, 신의 선택을 받았다면 몸 어딘가에 표식이 나타난다. 그리고 신의 선택을 받고난 이후, 향후 50년간은 잔병치레 하나 없이 늙지 않는 몸으로 순탄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신녀가 된 이후에는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신의 힘을 빌려, 죽어가는 병자들을 살려낼 수 있었다.

예언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미래를 보는 힘은, 순탄한 시대에는 발동되지 않는 능력이었다. 가끔 예언의 능력이 발동되는 경우는 있지만, 거의 발동되지 않는 힘이었다.

그런데, 예언의 힘이 발현되었다.

“신탁이 내려왔노라.”

감미롭고 신성한 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곧 이 땅에 재앙이 닥칠 것이다. 옥좌에 앉은 재앙의 씨앗이 제왕의 운명과 뒤엉켜 이 땅을 집어 삼킬 것이니….”

아아…나의 신이시여. 정녕 저와 이 나라를 버리실 생각이신 겁니까.

다음으로 귓가에 들려오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야하는데, 그게 좀처럼 쉽게 터져 나오지를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너무나도 잔혹한 말이기에, 말을 이어하는 것을 망설이게 되었다.

“나의 왕국에 사는 인간들이여, 더는 재앙을 막을 방도가 없노라.”

죽음의 운명에 순응하라는, 잔혹한 신의 말씀. 이것이 예언이었다. 신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졌다.

“신녀님!”

“신탁이 정말 맞습니까?!”

“그 신탁이 사실이라면 정말 신께서는 저희를 저버린 것입니까?”

변치 않을 운명. 그렇기에 신께서 그리 일러주신 거겠지. 그리고 이 신탁은 내가 신녀가 된 이후로 내게 있어서는 처음 발동되었던 예언의 능력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신녀에게서 들려오는 저주의 말이었다.